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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101)화 (101/129)

101화

손등 근처에 새카맣게 탄 자국이 보였다.

‘이건 아까 혹시 에녹이 걸어 준…….’

출발하기 전에 에녹이 걸어 준 방어 마법을 떠올렸다. 당장은 고마운 일이었지만, 마왕의 표정을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은 얼굴로 루퍼트의 손을 보는 마왕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느슨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지만, 눈은 사악하게 빛났다.

“리케포로스의 힘이 가호하고 있었구나, 귀찮게.”

마왕은 나를 가둔 그대로 손을 들어 올렸다. 들어 올린 손바닥 안에 어두운 기운이 넘실넘실 모여들었다.

“조금 아프겠지만 참거라. 나와 함께 지내려면 그런 거추장스러운 걸 두르고 오지 말았어야지.”

“내가 언제 온다고…… 아, 윽!”

그 검은 기운이 쏘아지듯 어깨에 닿자 그곳부터 시작하여 온몸에 파직파직 스파크가 일어났다.

마왕은 힘으로 방어 마법을 깰 생각인가 보다. 그 충격의 일부가 나에게 전달되어 통증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따끔하기만 했던 통증이 점차 몸이 부서질 듯 아파 왔다. 그리고 걱정이었던 건, 방어마법이 깨지면 그 이후의 일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생각할 수록 두려워져서 앞뒤 따질 겨를이 없었다.

나는 그대로 지팡이를 뒤로 세게 휘둘렀다. 마법으로 근력이 강화되어서 한 방에 유리창이 깨져 나갔다.

그리고 마왕이 잡을 새도 없이 뒤로 몸을 던졌다. 그가 섬뜩한 시선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흑마법을 쏴서 나를 잡으려 했지만, 검은 연기는 내 몸에 닿자마자 무력화됐다.

덕분에 나는 가파른 속도로 나무 사이로 떨어졌다.

여기저기 긁힌 상처와 떨어질 때의 충격이 크긴 했지만 어디가 부러지거나 한 건 아닌 거 같았다. 이것도 에녹이 걸어 준 마법 덕분인 것 같았다.

아무튼 바로 찾으러 올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공작성 건물에서 나를 찾기 위해 몇몇 무리들이 튀어나왔다.

나는 숨을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왼쪽 손목에 있는 팔찌를 발견했다. 그 팔찌 위의 마법석을 엄지손가락으로 재빨리 문지르면서 일단 정원수 뒤에 몸을 숨겼다.

타닥타닥 소리와 함께 두런두런한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에는 루퍼트의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여기로 떨어졌다. 멀리 도망치진 못했을 것이다. 공작 부인께서는 지금 정신이 온전치 못하시니 찾거든 내게 모셔 와라.”

“네, 공작 전하!”

이곳 사람들은 저 마왕을 철석같이 루퍼트로 믿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나라도 마왕의 기운을 감지 못했다면 깜빡 속을 뻔했다.

발소리들이 점차 가까워져 오면서, 나는 순간 손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

루퍼트 모습의 마왕을 비롯하여 공작성에서 봤던 눈에 익은 사람들이 나를 찾고 있었다. 그러다 마왕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헉, 어떻게.’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는 금방 고개를 돌려 다른 곳으로 시선을 보냈다. 두근대는 심장 소리와 함께 나는 조용히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내렸다.

정신 차리고 보니, 내 눈에도 내 손이 보이지 않았다. ‘은신’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 이럴 때가 아니지.’

어느 방향으로 도망가야 할지 가늠해 봤지만, 성벽은 너무 높았고 정문은 철통같이 경계하고 있었다.

에녹이 팔찌로 내 위치를 찾았다 해도, 그가 마왕이 있는 이 성에 바로 구하러 올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점점 시간이 흘렀다.

에녹이 말하길 이 은신 기능은 한 시간 동안 지속된다고 했다.

나는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 후원으로 나왔다.

‘개구멍 같은 것도 없으려나.’

벽 주변을 샅샅이 뒤지며 돌아다니다, 반대편 벽에 빈틈이 있는 걸 발견했다. 후원을 가로질러 가야 해서 꽤 거리가 멀었다.

‘은신 시간이 얼마나 남았으려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뛰어가려는데, 나를 찾던 무리들이 후원으로 들이닥쳤다. 나는 본능적으로 다시 수풀 속에 숨었다.

꽤 많은 수의 인원이 왔다. 혹시 들킨 건 아니겠지?

하지만 눈앞에 두고도 지나치는 걸 보니 아직 들킨 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들과 부딪히지 않고, 표시 나지 않을 정도로만 움직였다. 하지만 꽤 많은 인원이 있어 빠르게 가기가 어려웠다.

점점 초조해졌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동쪽과 서쪽 성벽 주위를 샅샅이 살펴봐라!”

이곳은 없다고 판단했는지, 다시 병사들이 지시에 따라 흩어져 사라졌다. 나는 한숨 돌리며, 아까 발견한 개구멍으로 돌진했다.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고, 그 판단이 옳았다.

구멍에 막 도착했을 무렵, 내 손과 발이 보였기 때문이다. 숨어서 돌아다니는 와중에 벌써 한 시간이 지나 버렸다.

나는 그대로 바짝 엎드려 성벽 아래 있는 구멍을 기어나갔다.

그러나 그렇게 나가자마자 누군가가 내 머리채를 콱 움켜잡았다.

“아……윽, 뭐야!”

정말 엄청난 악력이었다. 머리가 당겨지는 통증을 참으며 간신히 고개를 치켜들어 보니 아는 얼굴이었다.

“클로에…가 아니구나.”

클로에의 얼굴을 한 또 다른 악마였다. 아마도 클로에는 안타깝게도 지나치게 흑마법을 쓰다 자신과 계약한 악마에게 먹힌 모양이었다.

“놔! 이거……!”

머리를 흔들어 그녀의 손에서 빼내려 했다. 하지만 점점 쥐고 있는 손의 힘이 강해졌고, 악마는 웃으며 ‘쉿.’ 하고 소리를 냈다.

“조용히 해, 안 그러면 그분이 듣고 쫓아오실 테니까. 마왕님은 너에게 관심이 있는 모양이야. 아마 죽을 때까지 놔주지 않겠지. 마계까지 데려갈지도 몰라.”

“그러는 너는 왜 날 잡은 건데?”

“그 꼴을 두고 볼 수가 있나?”

악마의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그리고 그 이상 기억이 이어지지 않았다.

뒤통수를 내려치는 강한 충격에, 나는 애써 도망친 보람도 없이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

레드스톤 밸리에서의 전투는 완벽한 승리로 끝이 났다.

하지만 에녹은 그것에 기뻐할 겨를이 없었다.

“전하, 이대로 진군할까요? 아니면 잠시 빠져서 정비 후에 다시 갈까요?”

부총사의 질문에도 에녹은 선뜻 답하지 못했다. 늘 사태를 냉철하게 파악하고 답해 줬던 그가 지금은 얼이 빠진 채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전하.”

“부총사, 일단 빠져서 대열을 정비하도록 해. 나는 갈 곳이 있어. 신녀가 납치당했다.”

“전하!”

그렇게 부총사에게 지휘를 맡긴 채, 에녹은 거의 날다시피 뛰어 산 정상으로 갔다.

하지만 아무리 높은 곳에서 봐도 에린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젠장.”

필시 마왕과 함께 먼 곳으로 순간이동을 했을 것이다.

에녹은 뼈가 으스러질 만큼 주먹을 꽉 쥐며 먼 곳에 있는 클리포드 공작성을 바라보았다. 원래 저곳은 황군이 점령하려던 마지막 종착지였다.

클리포드 성은 단단하고 큰 만큼 적들의 최후 방어선이었고, 아마 지금은 마왕성이 되었을 것이다.

“저곳에…….”

굳이 에린의 마법석 위치를 확인하지 않아도, 아마 저곳에 납치되었을 것이다. 생각만 했을 뿐인데 목에 핏대가 솟아올랐다.

납치한 마왕을 당장이라도 찢어 죽이고 싶었지만, 그보다도 그녀를 지키지 못한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다.

왜 미리 예상하지 못했었는가.

마왕의 최종 목적이 칼릭스 제국의 멸망이라고만 생각했다. 이미 잡힌 포로에게 마왕이 에린 스필렛을 원했다는 말을 듣고도 안일하게 대처하고 말았다.

에녹은 애써 분노를 가라앉히며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그의 발밑에 마법진이 저절로 생성되었다.

순간이동 마법진이었다. 이렇게 순수 마력으로만 순간이동을 하게 되면 엄청난 마력이 손실되지만, 그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전하, 전하!”

데이먼이 뒤늦게 전속력으로 달려와 에녹이 있는 곳까지 올라왔다.

“안 됩니다!”

데이먼이 에녹의 팔을 잡아 말렸고, 에녹은 그를 거칠게 뿌리쳤다.

“놔, 저 성에 그녀가 잡혀 있다.”

“전하답지 않으십니다. 혼자 가서 어떻게 마왕과 그의 군대를 상대하시려는 겁니까!”

에녹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데이먼을 바라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데이먼은 순간 간담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그를 말리는 걸 멈출 수는 없었다.

만일 에녹 혼자 그곳에 가서 잘못되기라도 하면, 칼릭스 제국은 정말 끝장이었다.

“저도, 저도 제 레이디가 걱정됩니다. 하지만 감정을 앞세울 일이 아닙니다. 신녀님은 아직 무사할 겁니다. 마왕이 그분을 원하니까요.”

그의 마지막 말이 에녹을 더 분노케 했지만, 동시에 차갑게 이성이 돌아왔다.

에녹이 숨을 내뱉으며 마력을 끌어올려 기감을 확장시켰다. 자신이 에린에게 준 마법석 팔찌가 저 멀리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래, 아직 살아 있다.’

확실히 지금 자신은 정상이 아니었다. 원래대로라면 무조건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만 전투에 나서곤 했다.

데이먼이 간절한 목소리로 그에게 다시 말했다.

“제발, 전하께서는 이 전쟁의 총사령관입니다. 그렇게 무모하게 가다가 전하께서 잘못되시면, 신녀님을 구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발요, 전하.”

에녹이 한숨을 내뱉으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래…… 내가 여유를 부리고 있었어.”

그녀가 자신의 옆에 있으니 이제 걱정할 게 없다고 생각했었다.

마왕이 그녀를 어떻게 할까. 그 생각만으로 미칠 지경이었지만, 당장은 꾹 눌러 참았다.

최대한 빨리 이곳을 정리하고 군을 움직여 갈 것이다. 그동안은 제발 무사하길.

결심이 선 이상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데이먼, 몇 명의 기사를 더 붙여 줄 테니 자네만은 먼저 가게. 가서 마왕성의 동태를 살펴보도록. 부탁하지.”

“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하!”

데이먼은 그 명령을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그 길로 클리포드 공작성으로 향했다.

에녹은 그렇게 갈 수 있는 데이먼의 뒷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데이먼 혼자 살펴보는 정도라면 들키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잠시 있던 에녹은 자신도 곧 산에서 미끄러져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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