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성수는 그 자체로 악에 대한 저항성이 있었고, 신성력을 극대화시켜 주는 능력이 있었다.
신전에서 성수를 가져오는 데만 하루가 걸려서, 다음날 진행해야만 했다.
결국 해결 방법은 이랬다.
각 부대의 핵심 병력은 신녀인 내가 축복을 내려 주고, 나머지는 신관들이 나눠서 해 주기로 했다.
같은 축복이라도 질의 차이가 있다나, 뭐라나.
그렇다고 해도 내 앞에 서 있는 기사들만 벌써 스무 명이었다. 그나마도 먼 곳에 배치된 자들은 당장 해 줄 수가 없어서 이 정도였다.
나는 의자에 앉아 성수 몇 방울을 손바닥 위에 톡톡 뿌린 후, 다가와 꿇어앉는 기사들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는 신성력을 흘려보내며 짧은 기도문을 외우는 것이 축복의 전부였다.
그런데 확실히 그 수가 열 명이 넘어가니 약간의 피로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서, 결국 스무 명을 모두 끝냈다.
다 끝내고 보니 손바닥에서 새하얗게 빛이 날 지경이었다.
축복을 다 받은 기사들과 병사들을 모아 놓고, 에녹이 단상에 올라 지시를 내렸다.
“오늘 밤, 서쪽에 있는 레드스톤 밸리를 탈환한다. 이미 배치된 부대와 협공할 예정이니, 각각의 단장들은 전략을 잘 숙지하여 해가 지기 전에 미리 그곳으로 이동해서 잠복하라.”
“예, 알겠습니다.”
축복이 백 퍼센트 방비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저도 준비해야겠죠?”
내 질문에 에녹은 잠시 뜸을 들였다.
“원치 않으신다면 안 가셔도 됩니다.”
“하지만 가면 훨씬 좋은 거니까요.”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전투가 벌어지면 뒤로 물러나 계세요.”
다행히 가는 것 자체를 말리지는 않았다. 에녹이 저렇게 나온다는 건 정말로 내가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나는 서둘러 내 막사로 가서 방어구와 무기를 챙겼다. 그렇게 나가려는데 밖에서 에녹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 들어오세요!”
휘장을 걷고 들어온 그의 손에는 은색의 팔찌가 들려 있었다. 그 팔찌에도 어김없이 마법석이 달려 있었다.
“손을 줘 보세요.”
오른쪽 손목에는 평소 차고 다니던 마법석 팔찌가 이미 있었으므로 왼손을 내밀었다.
“이건 무슨 기능이 있나요?”
“일단 이렇게 여기를 누르면 독침이 나옵니다.”
평평한 부분을 누르자 달칵 소리가 나며 바늘 같은 것이 튀어나왔다. 에녹은 그것을 꺼내는 법을 보여 준 후에 다시 집어넣었다.
“오호.”
“그리고 마법석에 이렇게 마력을 넣으면…….”
에녹은 엄지 끝에 푸른빛을 만들어 내더니 그것을 마법석 위에 문질거렸다.
“어어, 몸이?”
그러자 눈앞의 팔이 투명하게 변했다.
“은신 기능이 있습니다, 지속 시간은 대략 한 시간 정도.”
에녹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몸 여기저기에도 따로 마법을 걸어 주었다.
“이렇게 하면 운동 능력이 향상될 겁니다. 지속 시간은 약 이틀 정도, 이틀 후에 다시 걸어 드리겠습니다.”
그의 말을 들으며 팔다리를 움직여 보았다. 확실히 움직임이 가벼웠다.
“제가 갈 때 뒤처질까 봐서요?”
계곡까지 말을 타고 가는 건 무리라고 했다. 그럼 걸어가야 하는데, 내가 겨우 한 달 남짓 훈련한 거로 기사들의 걸음을 따라잡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에녹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가는 건 함께 갈 겁니다. 이건 오직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
“아, 도망이라도 잘 치라는 거군요!”
입을 딱 다물고 쳐다보는 눈빛에 일부러 장난스럽게 굴자, 에녹은 건성건성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뭐, 그런 셈이죠.”
그 외에 방어 마법까지 꼼꼼하게 걸어 주는 것을 보며, 참 자상한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다 끝났습니다. 나가죠.”
“잠시만요, 전하.”
나는 나가려는 에녹의 팔을 살짝 붙잡았다. 그가 돌아봤을 때, 신성력을 듬뿍 담아 그의 볼에 입술을 맞췄다.
“고마워요.”
그리고 그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얼른 나와 버렸다. 뒤따라 나오는 기척이 들렸지만, 왠지 부끄러워 돌아보지 않았다.
***
숲속이 어두워질 무렵이 되어서야 레드스톤 계곡에 도착했다.
나는 마법을 걸어 준 덕분인지 대부분은 내 발로 걸어왔고, 너무 높거나 뛰어내려야 하는 곳에서는 약간의 도움을 받으며 올 수 있었다.
‘역시 마법을 배워야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마법은 너무 사기적으로 편리하다.
“쉿, 저기 오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외침에 조용히 숨을 죽였다.
레드스톤 계곡에서부터 베이스캠프로 이어지는 길은 단 하나였다. 우리는 좁은 길 양옆 높은 곳에 있는 수풀과 나무 뒤에 매복하고 있었다.
소수의 기사들이 빠르게 지나간 뒤, 그들의 정예부대가 발맞춰 걸어오고 있었다.
군데군데 기사들의 보호를 받고 있는 흑마법사가 눈에 보였다. 기사들과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마기에 민감해진 내 눈에는 위장이 소용없었다.
“신녀님.”
에녹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말씀 드린 대로 해주시면 됩니다.”
“네, 맡겨 둬요.”
오늘 내 무기는 활이 아닌 지팡이였다.
무슨 신성한 나무로 만든 지팡이라고 했는데, 아무튼 손에 잡아 보니 신묘한 기운이 느껴지기는 했다.
그곳에 천천히 신성력을 불어넣자, 갑자기 빛이 번쩍이더니 내가 넣은 양보다 훨씬 많은 신성력이 몸 안에서 훅 빠져나갔다.
순간 다리 힘이 풀릴 뻔했지만, 간신히 정신을 차려 적들이 오고 있는 길목을 향해 지팡이를 뻗어 휘둘렀다.
그러자 새하얀 빛의 반구가 넓은 범위로 생성되었다. 내 의식이 끊어지지 않는 한, 이 안에서는 흑마법의 힘이 무력화된다.
“수고하셨습니다.”
일을 마치고 탈진하여 털썩 주저앉자, 에녹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줬다.
저 빛은 어차피 나에게밖에 보이지 않는다. 에녹은 보이지 않으면서도 당연히 내가 성공했을 거라고 믿는 모양이었다.
적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올수록, 긴장감에 숨이 막혀 왔다. 어차피 지금부터 내가 할 일은 별로 없었다.
방비에도 불구하고 흑마법에 당한 기사가 있다면, 그를 정화시켜 주는 정도만 하면 된다.
반구 안으로 상당수가 들어왔을 무렵, 나는 에녹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줬다.
에녹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벌떡 일어나 검을 빼어 들었다.
“가라!”
불붙은 활이 솟아오르고 일제히 무기를 들고 달려 내려갔다. 주춤거리는 병사들 사이에서, 흑마법사들이 주문을 외워 댔지만 내가 만든 반구 안에서 모두 무력화됐다.
우왕좌왕하는 적군을 우리 쪽 군사들이 차근차근 베어 나갔다. 복색이나 실력으로 보아 클리포드 쪽 기사단들은 이 방향에 없는 것 같았다.
우리 측 군사들이 앞뒤에서 그들을 밀어붙이고, 후퇴하는 척하면서 적군을 한곳으로 모이게 했다.
그때 에녹이 적들을 베어 가며 중앙으로 파고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에 맞춰 우리 편 군대는 슬금슬금 반구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적들만 에녹을 포위했을 때였다.
에녹이 검을 높이 치켜들자, 어둑해진 하늘이 번쩍이더니 반구 안으로 섬광이 내리쳤다.
“와아, 대단해.”
정말 눈으로 보고 있지만 믿기지 않는 장면이었다. 그 안에 있는 모든 생명체는 단말마의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쓰러져 버렸다.
빛이 사라졌을 땐, 오직 에녹만 물끄러미 서서 쓰러진 적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런 식이면 힘들게 군대를 동원할 필요가 있나? 에녹 혼자 나가도 다 이기겠는데.
“전하께서 전쟁에서 이렇게까지 마법을 쓰는 건 처음 보는데.”
곁에 있던 데이먼이 중얼거렸고, 그의 말에 이런 식의 전투가 흔한 일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게 말이야, 저거에 맞으면 나도 무사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겠는걸. 리케포로스의 애송이가 꽤 제법이군.”
그런데 데이먼의 말에 대답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태연한 목소리에 흠칫 놀라 돌아보니, 루퍼트 클리포드가 그곳에 있었다.
“마왕!”
데이먼이 놀라 검을 빼어 드는 순간, 뒤에 있던 루퍼트가 손으로 내 입을 막고 허리를 끌어안았다.
멀리 있던 에녹이 상황을 보고 바로 날아왔지만 이미 늦고 말았다.
마왕과 내 몸이 투명해지더니, 데이먼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에녹이 막 도착했을 때엔, 눈앞의 장소가 이미 바뀌어 있었다.
아주 익숙한 장소, 바로 클리포드 공작성에서 내가 머물던 방이었다.
“놔, 놓으라고!”
나는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고 지팡이를 휘두르면서 그의 품을 빠져나왔다. 의외로 루퍼트의 몸을 한 마왕은 순순히 나를 놓아주었다.
그 바람에 바닥에 고꾸라졌지만, 얼른 일어나 뒷걸음질 쳤다.
“뭐야? 왜 나를 데려온 거야?”
날카롭게 소리 질렀지만, 사실은 너무 무서웠다. 그는 천연덕스럽게 루퍼트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 내 눈엔 그 안에 꿈틀대는 마왕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차라리 모르면 몰랐지, 그 강대하고 검은 실체를 보자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걸 티 낼 순 없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지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으음, 기억 그대로군. 에린, 반갑구나.”
그가 내 이름을 부르자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생전의 루퍼트에게서 들어볼 수 없었던 다정한 목소리였다.
“겁먹을 필요 없다, 너를 해칠 생각은 없으니.”
그 말에 몸의 힘은 조금 풀었지만, 경계는 늦추지 않았다. 물론 그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마왕이 마음만 먹는다면야 나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겠지. 굳이 그 전장까지 와서 날 이리로 데려오는 수고로움을 감수했다는 건, 당장 죽일 마음은 없다는 거다.
“그래서 왜 데려온 건데? 마왕 발리노스.”
“루퍼트라고 불러도 돼, 예전처럼.”
“……아닌 걸 아는데 어떻게 그렇게 불러. 대체 무슨 속셈이야.”
“이 몸이 애달플 정도로 너를 생각하더군. 나까지 동화될 지경이었다. 그래서 궁금하더구나.”
루퍼트의 몸이 천천히 나에게로 가까이 걸어왔다. 나는 뒷걸음질 쳤지만, 창문에 닿아 더 갈 곳이 없었다.
“에린 스필렛.”
그가 손을 들어 내 볼을 손등으로 쓰다듬으려 했다. 소름 끼쳐 그를 밀어내려는데, 갑자기 그의 손등 위에 파지직 소리와 함께 스파크가 일어나더니, 그가 황급히 손을 떼어냈다.
“뭐야,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