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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99)화 (99/129)

99화

“오늘은 뭘 한대요? 전투는 안 벌어지나요?”

“어제 정찰이 끝났으니 오늘 선발대가 투입될 겁니다. 당장은 전투가 벌어져도 전면전으로 가진 않겠지만, 전쟁이란 게 꼭 예상대로 흐르는 건 아니니까요.”

데이먼은 앞에서 우적우적 빵을 씹으며 태연하게 답했다.

“내가 할 일은 아직…… 없겠죠?”

“네, 없는 게 모두에게 좋겠죠.”

그 말을 이해하면서도 왠지 의기소침해졌다. 신녀가 필요하다는 건 저쪽에서도 흑마법을 쓰기 시작했다는 거니까 할 일이 없는 게 좋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모두가 바쁜데 가만히 있는 건 역시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그런 내 기분을 알았는지 데이먼이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도 레이디가 제일 중요한 역할입니다. 결국 마왕을 무너뜨리는 건 레이디의 활이 될 테니까요.”

“알고 있어요, 나도.”

식사를 끝내고 나가 보니 이제 출전 준비를 마친 부대가 눈에 보였다. 데이먼이 은근히 나를 그들 쪽으로 앞세우며 소곤거렸다.

“가서 격려라도 해 주세요. 기뻐할 겁니다.”

나를 발견한 그들의 표정이 먼저 활짝 펴지는 것을 보니, 어찌 모른 체할 수가 있겠는가.

천천히 다가가서 생긋 웃으며, 그들 중 제일 높아 보이는 기사에게 악수를 청했다.

“다치지 말고 무사히 돌아오세요.”

그러자 기사단장은 몸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과하게 허리를 숙이며 내 손끝을 살짝 잡았다.

“신녀님, 이렇게 배웅 나와 주시니 오늘 전투는 승리할 것 같습니다.”

나는 가볍게 그의 손을 잡아 흔들며, 신성력을 약간 넣어 주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 있던 부단장을 비롯하여 몇몇 기사와도 차례차례 악수를 했다.

“우와아아!”

“감사합니다, 신녀님!”

신녀의 축복을 받은 기사들은 무릎을 꿇으며 내게 감사 인사를 했다.

그들의 환호에 어깨가 으쓱 올라가긴 했지만, 가벼운 축복에 너무 과한 반응이라 조금은 부담스러울 찰나였다.

다행히 에녹이 다가오자 그들은 다시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태도를 바꿨다.

“선발대는 적의 위치와 규모를 파악하는 역할이다. 무리하지 않게 진입하면서 끊임없이 상황을 보고하도록 해라.”

“예, 알겠습니다.”

숲속이기 때문인지 규모가 큰 병력보다는 날쌘 기사들 위주로 팀을 짜서 투입되었다. 떠나는 그들을 보고 있는데, 에녹의 엄한 목소리가 들렸다.

“신성력을 쓰셨습니까.”

“네? 아주 조금……요?”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괜히 찔끔했다. 에녹이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곧 쓰실 일이 많으니 되도록이면 아끼는 게 좋겠습니다.”

“……네, 그럴게요.”

에녹은 커다란 회의실 책상 위에서 연신 작전을 검토하느라 분주했고, 나는 그 옆에 앉아 그런 그를 구경만 했다.

다른 곳에 가려고 해도 에녹은 자기 옆에서 떨어지는 걸 허용하지 않았다. 출발할 때 옆에만 있으라더니, 정말 그 말을 철저하게 지켰다.

그렇다고 해서 그와 말을 많이 주고받을 수도 없는 게, 기사들이 드나들며 끊임없이 보고가 올라왔고, 짧은 회의가 계속해서 열렸다.

그렇지 않을 땐 서류를 검토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보였고, 무엇보다도 신경이 날카로워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내게 그것을 티 낸다거나 하진 않았지만 말이다. 혼자 그것을 다 감당하는 걸 보니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뭔가 도울 게 없을까.’

고민하는 사이 또 다른 기사가 들어왔다.

“전하, 보고 드립니다.”

“말해라.”

에녹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였다.

“어제 잡아 온 녀석에게서 세뇌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에녹이 고개를 들었다.

“세뇌의 흔적이 없다. 그럼 어제 놈이 지껄인 말이 사실이라는 거지.”

일하는 내내 목석같이 별 감정을 보이지 않던 그의 얼굴에 드물게 불쾌감이 서려 있었다.

“예, 루퍼트 클리포드 공작이 마왕이라는 것도 정말 몰랐던 눈치였습니다. 말해 줘도 영 믿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또 다른 반응은?”

“그 마왕이 된 공작이 에린 스필렛, 아니, 그러니까 신녀님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면서…….”

“정말 웃기는 소리군.”

에녹이 쿵, 하고 책상을 치며 일어났다. 조금 움찔했지만 놀랄 정도는 아니었다. 그의 과민한 반응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알 것 같아 잠자코 있었다.

보고하러 온 기사가 나간 후, 나는 양손으로 턱을 괸 채 에녹을 올려다봤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에녹도 날 바라보았다.

나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안 간다니까요.”

“……네, 압니다.”

에녹이 흐트러진 머리를 위로 넘기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속내를 들켰다는 게 민망한지, 그는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그런데 마왕이 저를 어떻게 알고 데려오라고 하는 걸까요?”

에녹은 지그시 날 바라보면서도 말하기를 머뭇거렸다.

“뭔가 아는 거죠?”

“확실한 건 아닙니다, 마왕에 대한 건 오로지 기록에 의존하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말해 주세요.”

“다른 마족들과 달리 마왕은 강림 직후 단번에 인간의 신체를 지배하기 때문에 생전의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만…… 아주 강렬하게 머릿속에 각인된 경우에는 기억이 이어진다고 합니다.”

“강렬하게 각인되면…….”

그 말을 듣고 나니 조금 민망해졌다. 루퍼트가 나를 그렇게까지 생각했다는 건가.

그럼 있을 때나 좀 잘해 주지, 왜 그렇게까지 피하고 매정하게 굴었는지 모르겠다. 마지막쯤 되어서야 마음이 움직인 것 같긴 했지만, 그 정도로 생각했을 줄이야.

“새삼스럽네요, 좀.”

에녹에게는 뭐라 말해야 할지.

에녹도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한 듯 나를 보다 다시 서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갑자기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에녹의 보좌관 리암의 목소리였다.

“전하, 전하!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에녹과 나는 서로를 쳐다보며 황급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전투에 나갔던 기사들이 급하게 돌아온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지?”

뭔가에 겁을 먹었는지, 그들의 얼굴은 한결같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말을 해라, 무슨 일인지.”

“그, 그게…….”

그나마 빠르게 정신을 차린 몇 명이 더듬더듬 말문을 열었다. 자세히 보니 아까 나와 악수를 했던 사람들이었다.

나는 내 마음대로 아까 봤던 기사단장의 손을 잡아 가볍게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졌다.

에녹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눈치였지만, 그래도 효과가 있어 잠자코 있는 것 같았다.

기사단장은 호흡을 고르더니 천천히 사건의 전말을 설명했다.

“산 중턱쯤에서 가벼운 교전이 있었습니다. 최대한 마찰을 피해 보려 했지만, 정면으로 마주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계속해라.”

그는 송구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에녹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히 말했다.

“처음에는 놈들이 몇 명 되지 않아 우리 편이 유리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다 하나둘 사상자가 나오기 시작하자…… 죽은 자들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일제히 우리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신관 하나가 중얼거렸다. 요한이라는 신관이었는데, 전쟁 경험이 많은 신관이라고 했다.

“언데드…….”

“그러다 보니 점점 저쪽의 수가 많아졌고, 저희는 점점 줄어들다 결국엔…….”

기억을 떠올리며 점점 흥분하려는 기사단장을 에녹이 저지하며 어깨를 두드렸다.

“알았다, 충분히 알아들었어.”

“하아, 감사합니다, 전하.”

사선을 넘나드는 기사들이 단지 싸움에 졌다고 저렇게 겁을 먹진 않을 것이다. 아마 그 기이한 상황에 놀란 거겠지.

“언데드라고?”

에녹의 질문에 신관 요한이 고개를 조아렸다.

“예. 방금 저 기사가 말한 내용은 흑마법의 일종으로, 살아난 시체를 가리켜 언데드라고 합니다.”

“들어 본 적이 있다, 개체 하나하나의 위력은 크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예, 본신의 절반 정도의 힘밖에 내지 못합니다. 다만 사상자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위력이 더해지고, 죽은 자들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일반 기사들은 상대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들어가서 마저 이야기하지.”

나는 자연스럽게 에녹을 따라갔고, 에녹은 그런 나를 보며 잠시 주춤거리다 이내 다시 걸었다.

신관인 요한과 보좌관 리암, 몇몇 기사들도 함께 들어왔다.

에녹이 앉자마자 말을 꺼냈다.

“언데드가 까다롭다고는 하지만 뛰어난 기사들이 그렇게 겁을 먹을 이유가 있나?”

“물론 전투 자체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죽고 나서 저런 모습이 된다고 생각하면 두려울 수밖에요.”

요한이 어깨를 으쓱거리자, 에녹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턱을 만지작거렸다.

“대응 방법은?”

“언데드가 된 시체의 머리를 날리면 됩니다.”

요한은 신관임에도 말하는 데에 거침이 없었다.

“이미 언데드가 된 것 자체가 병력 손실을 말한다, 다른 방법은 없나?”

그러자 요한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애초에 언데드가 되지 않게 하는 것이죠.”

“제가 할 수 있는 일인가요?”

“네, 신녀님이 도와주시면 저희 신관 나부랭이들끼리 하는 것보다는 훨씬 수월해집니다.”

“잠깐.”

에녹이 대화를 중단하려 했지만, 나는 그의 말을 가볍게 넘기며 요한에게 물었다.

“뭘 하면 되는데요?”

“간단하죠, 축복을 내려 주시면 됩니다. 아까 보니 멀쩡한 기사들이 있던데. 신녀님이 구해 주신 것 아닙니까?”

“거절한다, 수가 너무 많아.”

에녹이 다시 끼어들었고, 이번에는 나도 잠시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모두에게 축복을 내려 준다면, 신성력의 소모가 너무 클 것이다. 그럼 도리어 마왕전에서 힘들어질 수 있었다.

요한도 에녹도 고민하는 동안, 구석에 있던 데이먼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성수를 함께 쓰는 방법은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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