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하인이 가리킨 곳은 한참 떨어진 언덕이었다. 언뜻 봤을 때 저곳에서는 아무런 마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루퍼트는 마왕이었다. 그런 마왕이 ‘에린 스필렛’을 데려오라 했다니 이상한 일이다.
“뭐라고 하면서 데려오라던가요?”
“부부가 뜻을 함께하는 게 당연하다 말씀하시면서…… 위험하지 않게 모셔 오라고…….”
말을 끝내기도 전에 에녹이 내 앞을 가로막고 섰다.
“데려가서 세뇌의 흔적이 있는지 조사하라.”
“예, 전하!”
“아이고, 아이고, 마님……!”
하인은 기사들에게 다시 질질 끌려갔고, 에녹은 나를 보더니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절대 가시면 안 됩니다.”
그의 말에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당연히 안 가죠, 뭘 걱정하고 그래요.”
지금 루퍼트 본인이 부른다 해도 갈 마음이 없는데, 루퍼트의 모습을 한 마왕이 부른다고 갈 리가 있나.
하지만 찝찝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에린 스필렛을 어떻게 아는 걸까. 브리먼 황자가 알려 준 걸까? 그렇다 해도 이런 식으로 부르는 건 무엇 때문이지.
생각에 빠져 있는데, 에녹이 내 어깨 위에 겉옷을 걸쳐 주었다.
“밤이 깊었습니다, 이만 쉬러 가시죠.”
“……자도 되는 거예요?”
“오늘은 전투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며칠이나 걸릴지 모르니 당연히 잘 수 있을 때 자야 합니다.”
그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순순히 막사가 설치된 쪽으로 다가갔다.
신녀가 묵는 막사는 에녹과 데이먼의 막사 바로 옆에 있었다. 데이먼 외에도 내 호위를 위해 기사들을 잔뜩 배치해 놓았다.
막사 안은 생각보다 아늑하고 따뜻했다. 한쪽 구석에는 천으로 막은 욕실도 갖춰 놓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물이 커다란 나무 욕조 안에 한가득 준비되어 있었다. 아마도 이건 특혜일 것이다. 일반 병사들이나 기사들은 이런 호사를 못 누리겠지.
고민할 것도 없이 나는 옷을 벗고 욕조 안에 퐁당 들어가 따뜻한 물을 만끽했다. 안 그래도 하루 종일 말을 타고 온 지라 온몸이 욱신거렸다.
그렇게 말끔하게 씻고 나와 옷을 갈아입은 후, 잘 정리된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그래도 전쟁 중이라는 자각 때문에 잠옷을 입진 않았다. 언제 어느 때고 튀어나갈 수 있는 상태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자려고 보니, 낯선 불안감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다. 하긴, 아무리 나라도 이런 상황에서 쿨쿨 잘 수 있을 만큼 무딘 성격은 아니다.
‘……에녹은 뭐하려나.’
슬쩍 일어나 막사의 휘장을 걷고 나왔다. 데이먼은 잠시 교대했는지 다른 기사가 앞을 지키고 있었다. 그와 눈인사를 하며 에녹의 막사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명색이 황태자가 묵는 곳인데 어째 신녀인 나보다 호위 인원이 적었다. 그리고 내가 다가가는데도 딱히 경계하거나 막지도 않는 분위기였다.
“전하께서는 안에 계시나요?”
“아니요, 방금 전에 씻으러 가셨습니다.”
“안에서 씻으시는 게 아니고요……?”
“예? 간부들 욕실은 저쪽에 있습니다.”
내 질문에 기사는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끔뻑거렸다. 내가 여자라서 따로 욕조를 놔준 건가.
“아, 아니에요. 제가 안에 들어가서 기다려도 될까요?”
“예, 물론입니다, 신녀님. 밤공기가 차니 들어가서 기다리십시오. 전하께서 오시면 말씀 드리겠습니다.”
기사는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며 막사로 들어가는 휘장을 손수 걷어 주었다.
“……고맙습니다.”
사실 안 된다고 하면 얌전히 돌아갈 생각이었다.
어쩐지 에녹이 나에 대해 뭐라 말해 뒀는지 알 것 같아 목 안쪽이 간지러웠다.
나는 조심스럽게 들어가 안을 둘러보았다.
책상 위에는 펜과 종이가 굴러다녔고, 의자 위에는 벗어 놓은 옷가지들이 걸려 있었다. 전쟁터이긴 하지만 황태자의 침실이라는 걸 감안하면, 너무 단출했다.
어쩐지 내 막사보다 더 추운 것 같기도 했고.
앉을 곳을 찾다 보니 결국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괜히 왔나, 그냥 내 방에서 기다릴 걸 그랬나.”
손바닥에 닿은 이불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그 이불의 표면을 쓰다듬으며, 조금만 있다가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
타월로 젖은 머리를 털며 에녹이 막사로 돌아가고 있었다.
“전하, 안에 신녀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
되묻는 음성에 반가움이 묻어나왔다.
에녹은 들어가려다 말고 멈칫하더니, 머리카락을 슥 손으로 넘겨 정리하고 대충 걸쳐 입은 셔츠의 옷깃도 바로 세웠다.
그렇게 들어가자마자 에녹은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에린이 침대에 옆으로 엎어져 잠들어 있었다. 다리는 아래로 내려간 것이 앉아 있다 그대로 잠든 것 같았다.
“신녀님.”
나지막하게 불러 봤지만 그녀는 깨지 않았다.
에녹은 잠들어 있는 에린의 곁으로 발소리를 죽인 채 홀린 듯이 다가가더니, 허리를 굽혀 에린의 이목구비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언제 봐도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아름다웠다. 더군다나 이렇게 자세히 볼 기회는 흔치 않았다.
그녀도 조금 전 씻었는지 피부와 머리카락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숨죽이고 들어 보니 고롱고롱 곤히 잠든 소리가 꽤 크게 들렸다. 은은하게 좋은 향기도 나는 것 같았다. 지나치게 유혹적이었다.
“……에린.”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 봤지만 미동조차 없었다. 조금 벌어져 있는 도톰하고 붉은 입술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고정되었다.
그리고 입술끼리 가깝다는 걸 깨달은 순간, 에녹은 퍼뜩 정신이 든 듯 몸을 일으켰다.
“하아.”
기나긴 한숨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다시 내려다보고 있자니 또 홀릴 것 같았다.
에녹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에린을 침대에 똑바로 눕히고는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 주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좀 추운가.”
자신은 전혀 춥지 않았지만, 에린을 생각하니 공기가 조금 차갑게 느껴졌다.
에녹은 손으로 불꽃을 일으켜, 구석에 쓸모없이 있던 마법 난로에 불을 지폈다.
그러다 조금 뒤척이는 에린을 보자마자 다시 숨소리를 죽였다. 다시 곤히 잠드는 에린을 보며, 에녹은 쫓기듯이 그곳을 빠져나왔다.
“전하?”
밖에 있던 기사가 의아한 목소리로 에녹을 불렀다. 그러자 에녹이 검지를 치켜세우며 그의 입을 다물게 했다.
그는 신녀의 막사 주위를 지키고 있던 기사들을 모두 이쪽으로 배치한 후에, 간부급 기사들이 묵는 막사로 갔다.
갑자기 들이닥친 황태자에 놀란 기사들이 벌떡 일어났지만, 에녹은 그러거나 말거나 구석 침대로 가서 누워 버렸다.
기사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 황태자가 자신들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각자 할 일을 했다.
에녹은 눈을 감았지만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아까 에린의 입술이 계속 머릿속에서 아른거렸다. 잠을 청하던 그는 결국 다시 벌떡 일어났다.
“전하! 어디 가십니까?”
기사의 질문에 대꾸도 없이 그는 홀로 깜깜한 숲속을 달려 나갔다.
***
포근하고 따뜻한 이불에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베개 위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다 뭔가 평소와 감촉이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으…….”
억지로 눈을 떠보니 육각형 모양의 막사 천장이 보였다.
‘아, 전쟁터였지.’
그렇게 생각하니 게으름 부릴 일이 아니다. 벌떡 일어나고 보니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느꼈다.
“앗…… 여긴, 에녹의 숙소잖아.”
재빨리 침대에서 빠져나온 후, 허겁지겁 막사 밖을 나가려다 도로 들어왔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고, 밖에는 병사들과 기사들이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와, 정말 이게 웬 민폐야.”
머리를 쥐어뜯으며 한탄하고 있는 사이, 의자 위에 가지런히 놓인 내 옷가지들과 활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도 없었지만 괜히 주위를 살피며 옷을 갈아입었다. 부끄러워 한숨이 나왔다.
“여기서 잠들다니…….”
잠든 거로 모자라 이불까지 덮고 완전히 푹 자 버렸다. 덕분에 컨디션은 꽤 좋아졌지만, 에녹은 그럼 어디서 잔 거지?
간단히 세수까지 한 후, 멋쩍은 얼굴로 나가 보니 에녹은 밖에서 보좌관인 리암을 비롯하여, 몇몇 기사단장들과 모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기사들이 흩어지고 난 후, 나는 에녹과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그러자 그가 싱긋 웃으며 다가왔다.
“잘 주무셨습니까?”
“저, 제가…… 어제 기다리다가 잠들었나 봐요.”
그의 눈을 슬그머니 피하며 손바닥으로 뺨을 문질거렸다.
“곤히 주무시길래 그냥 나왔습니다.”
기분 탓인지 에녹의 눈가가 어두운 것이 평소보다 조금 피곤해 보였다.
“죄송해요, 본의 아니게 침대를 차지해서. 어디서 주무셨어요? 피곤해 보이시는데.”
“아, 아닙니다. 간부 숙소에서 잘 잤습니다. 나는 잠시 할 일이 있어서.”
나는 그렇게 돌아서려는 에녹의 팔소매를 붙잡았다.
“저는 오늘 뭘 하면 되죠?”
그러자 에녹이 잠시 뜸을 들이다 꽤 규모가 큰 천막 안을 가리켰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상대는 내가 아니었다.
“신녀님을 저쪽으로 모셔 가게.”
“네, 전하.”
내 대신 데이먼이 다가와 대답하는 사이 에녹은 몸을 휙 돌려 가 버렸다.
데이먼이 나를 안내한 곳은 식당으로 쓰는 막사였다. 이미 식사 중인 기사들도 눈에 보였다.
구석에 앉자마자 누군가 음식을 날라다 줬다. 고기가 큼지막하게 들어간 스프와 포슬포슬한 빵, 과일 주스가 나왔다.
‘보급 상황이 좋은 편인가 봐. 음식이 생각보다 잘 나오네.’
그렇게 음식들을 입 안으로 밀어 넣는데, 저쪽 자리에서 하는 이야기가 귀에 들어왔다.
“황태자 전하께서 어제 갑자기 들어오셔서 얼마나 놀랐는지.”
“그러게 말야. 그런데 또 금방 나가셨잖아?”
“어디 가신 거래?”
“새벽에 나가 보니까 산에서 내려오고 계시던데.”
나는 나도 모르게 그들의 대화를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산에서 내려왔다고? 그 밤에 뭐한 거지?’
“완전히 땀을 흠뻑 흘리셨더라고.”
그 말에 기사가 감탄을 하며 답했다.
“대단하시군, 여기까지 와서도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으시다니.”
정말 깊은 새벽에 산에 올라가 훈련을 했다는 건가.
‘생각보다 에녹이 훨씬 부지런한가 봐.’
그렇게 생각하면서 스프 그릇을 기울여 싹싹 긁어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