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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97)화 (97/129)

97화

나는 에녹과 함께 황궁으로 돌아가, 나를 위해 준비해 둔 멋진 흑마를 바라보았다. 에녹의 도움을 받아 안장 위에 앉아서 익숙하게 말의 고삐를 잡았다.

에린이 이미 승마를 배워 뒀기 때문에, 말 타는 건 무리가 없었다. 그런데 말에 올라타고 보니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나는 에녹의 곁으로 말을 몰아 가며, 그에게만 들릴만한 목소리로 물어봤다.

“그런데 말을 타고 전쟁을 치뤄요? 마법이 이렇게 발달한 세상에…….”

슝 날아간다던가, 마법진을 그려서 단체로 텔레포트 한다던가, 하다못해 마법 전차를 타고 간다던가.

“이동만 말로 합니다. 가서 싸울 땐 내려야겠죠.”

“마법으로 한 번에 이동할 순 없나요?”

그러자 에녹이 슬쩍 뒤를 보더니 마찬가지로 소곤거렸다.

“그럼 환경이 오염됩니다. 마법은 자연의 마나를 끌어다 쓰기 때문에 질서를 흐트러뜨리죠. 그래서 꼭 필요한 곳 외에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이렇게 많은 인원을 한꺼번에 이동시키는 건 무리이기도 하고요.”

“환경 오염…….”

이쪽 세계에서 이런 단어를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니까 마법도…… 환경 오염을 일으킨다는 거지?

출전을 하기 전, 황제가 나와 짧은 연설로 군대를 독려해 줬다. 나는 뒤에서 울려 퍼지는 커다란 함성에 소름이 쫙 끼쳤다.

사실 나는 대부분의 전장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마왕을 위한 히든카드였기 때문에, 최대한 방해되지 않게 구석에 숨어 있다가 그가 나타났을 때 활을 쏘는 역할이다.

하지만 이미 내가 신녀라는 게 방방곳곳 소문이 난 건지, 나를 바라보는 군사들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아마 행운의 여신이 자신들과 함께 한다는 사실에 사기가 충만한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뒤를 흘끔 보며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아까보다 더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대신관이 ‘크흠’ 하며 헛기침을 했고, 에녹은 떨떠름한 얼굴로 날 바라보다 정신 차린 듯 황제를 향해 경례를 했다.

“무엇이든 네 선택을 믿겠다, 에녹.”

황제의 격려에 눈빛으로 답한 후, 에녹은 선두에 서서 말을 몰았다.

출발할 때는 분명 내가 에녹보다 조금 뒤에 있었는데, 에녹이 말의 고삐를 잡아 속도를 늦추더니 나와 나란히 말을 몰았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요?”

“마왕의 군대는 대부분 클리포드 영지에서 출발합니다. 그곳과 수도 북부지역 산맥을 경계로 하여 대치할 겁니다.”

“……마왕인데 인간들의 전쟁을 잘 아나 봐요.”

“인간 세계를 오래 지켜봐 온 존재니까요.”

나는 그렇게 말하는 에녹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에녹은 다른 기사들보다 조금 더 가벼운 차림이었다. 금속도 아닌 가죽으로 된 방어구에 검만 하나 달랑 차고 있었다.

“걱정되지 않아요? 마왕이 생각보다 쉬운 상대인가요?”

“아뇨, 매우 어려운 상대입니다. 그래서 여기 신녀님께서 함께 가는 게 든든하면서도 두렵습니다.”

에녹은 여전히 작은 목소리로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마왕이 다행히 인간의 방식을 고집하여 그나마 여유가 생긴 편이죠. 그가 처음부터 인간 세계의 멸망만을 원했다면, 이렇게 여유 있게 준비할 순 없었을 겁니다.”

“마왕이 왜 인간의 방식을 고집하는 거죠?”

“마계의 힘은 인간의 악한 감정에서 나오니까요.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 세계를 지배하여 고통스러운 세상 속에서 살게 하는 겁니다.”

조금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었지만, 나는 이야기 그대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내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걸 말했기 때문인지, 질문하기가 훨씬 편했다.

에녹은 그 사실을 들은 후에도 변함없이 날 대했다. 어쩌면 리케포로스의 핏줄도 비슷한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에 크게 거부감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한참을 얘기하며 말을 몰고 가다 보니 둥글고 평평한 지대 앞에 커다란 산맥과 숲이 나왔다. 여기가 에녹이 말한 북부 지역 산맥의 초입인가 보다.

그는 갑자기 손을 들어 대열을 정지시켰다.

모두를 말에서 내리게 하더니, 갑자기 에녹이 내게 손을 달라고 했다.

“올라갈 겁니다. 놀라지 마세요.”

“네, 네?”

얼떨결에 그에게 손을 내밀었더니, 갑자기 쑥 하고 몸이 딸려 올라갔다.

에녹은 날 안은 채 하늘로 높이 솟아올랐다.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르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뭐, 뭐예요?”

“앞을 보세요,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우리는 아주 높은 곳에서 두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사냥 대회 때였던가.

“마왕의 위치를 알려 달라는 거죠?”

“그렇습니다. 보이십니까?”

아무튼 이곳에서 보니 숲의 모습이 한눈에 보였다. 나는 침착하게 신성력과 기감을 끌어올렸다.

“아뇨, 안개가 너무 짙어요. 드문드문 보이긴 하지만…….”

에녹이 나를 한 번 고쳐 안으며 짧은 단어를 읊자 강한 바람이 일어났다. 숲의 나무들이 일제히 흔들리더니, 쏴아, 하는 소리와 함께 흐렸던 시야가 단번에 맑아졌다.

정말 감탄이 나올 만한 능력이었지만, 놀랄 시간이 별로 없었다.

“이제 보이십니까?”

그러자 아까까지 눈에 보이지 않았던 어두운 기운들이 먼 숲속 곳곳에 퍼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저기, 저쪽 골짜기, 그리고 저 위의 언덕에 모여 있어요. 가운데 제일 높은 언덕 쪽이 마기가 가장 짙은데, 그게 마왕인 줄은 잘 모르겠네요.”

“충분합니다.”

올라갈 때와 달리 내려갈 때는 천천히 내려왔다.

내려오자마자 에녹은 주변에 있던 기사단장들에게 하나둘 위치를 지정해 줬다.

“하지만 만일 마왕, 루퍼트 클리포드를 마주치면 즉각 퇴각하고 이곳에 알려라. 브리던 황자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말하며 각각에게 연락을 위한 마법 도구를 손에 쥐어 주었다.

“데이먼.”

에녹이 부르자 근처에 있던 데이먼이 즉각 달려왔다.

“네, 전하.”

“자네는 이곳에서도 호위 기사의 임무를 수행하게. 신녀님을 최대한 안전하게 보호할 테지만, 만약의 경우엔…….”

“신녀님을 들고 달아나면 되는 겁니까? 전하든 뭐든 다 팽개치고요.”

“아니, 잠깐만요, 데이먼!”

“맞네.”

데이먼의 대답에 내가 즉각 반발하려 했지만, 에녹이 바로 긍정해 주었다.

“전하.”

“그럴 일이 없는 게 가장 좋겠죠.”

에녹은 반박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나를 보며 다정하면서도 단호히 말했다. 그 모습을 보니 새삼스럽게 그가 황태자라는 걸 깨달았다.

병사들은 부지런히 움직이며 평원 위에 천막을 쳤다. 이곳을 베이스캠프로 하여 여섯 개의 기사단과 군대가 산맥을 포위하듯이 올라갈 것이라고 했다.

이번 전쟁이 단순히 인간들끼리의 전쟁이 아닌 만큼, 나 외에도 각각의 부대에 신관들이 여러 명 배치되어 있었다.

신관들과 마법사, 기사 몇몇이 움직이며 땅에 뭔가를 심고 있었다. 내 시선을 따라가던 에녹이 짧게 설명해 줬다.

“결계를 설치하고 있습니다. 웬만한 놈들은 얼씬하지 못할 겁니다.”

결계가 완전히 설치된 것을 확인한 후, 에녹은 내게 이곳에서 쉬고 있으라고 말한 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은 해가 지면서 점점 어두워졌고, 지상에는 안개까지 꼈다. 확실히 자연스러운 현상은 아니었다. 흑마법과 관련이 있는 거겠지.

“이렇게 안 보이는데 괜찮을지 모르겠네.”

“기사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시야가 밝은 편이라 괜찮을 겁니다.”

옆에 있는 데이먼이 혼잣말에 답을 했다.

캠프는 간간이 두런두런한 말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그래도 전쟁 첫날이기 때문인지 대체적으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사방이 조용했다.

그리고 얼마 후, 기다림이 조금 지루해질 무렵 조금쯤 떨어진 곳에서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연이어서 커다란 폭발음도 함께 들렸다.

“뭐지?”

멍하니 앉아 있던 나는 벌떡 일어나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았다.

여기 없는 에녹이 걱정이 됐다. 그래서 다른 기사들이 튀어 나가는 걸 보고 반사적으로 뛰어가려 했으나, 데이먼이 내 팔을 잡아 막아 세웠다.

“데이먼.”

“레이디, 기사들이 나갔으니 소식을 갖고 올 겁니다.”

그리고 얼마 후, 돌아온 에녹과 몇몇 기사들이 검붉은 피를 뒤집어쓴 채 나타났다. 멀리서 날 본 에녹은 잠시 멈추었다가, 윗옷을 갈아입고 수건으로 대강 피를 닦아낸 후에 다가왔다.

“무슨 일이에요? 전하, 다친 거예요?”

나는 즉각 그에게 신성력을 쓰려 했지만, 에녹이 내 손을 잡고 만류했다.

“아뇨, 내 피가 아닙니다, 괜찮아요.”

기사들이 줄로 꽁꽁 묶은 사람을 끌고 와 바닥에 집어 던졌다.

“전하, 다른 놈들은 다 도망갔고 이놈만 저쪽 풀숲에 숨어 있길래 잡아 왔습니다.”

“아까 맞서 싸웠던 자가 아니군.”

묶인 채 내던져진 사람은 두리번거리다 갑자기 나를 보며 크게 눈을 떴다.

“마님……! 클리포드 마님 맞으시죠!”

“네?”

누군데 날 알아보는 거지? 물론 이혼해서 지금은 클리포드 마님이 아니었지만, 그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저는 클리포드 공작성에서 일하던 하인입니다!”

“당신이요? 그런데 이런 곳에 숨어서 뭘 하고 계셨던 거죠?”

“저는, 저는 그저…….”

하인이 주춤거리며 말하기를 꺼려 하니, 기사가 검을 빼어 그의 목을 벨 듯이 위협했다.

“똑바로 답해라.”

하인은 검을 보더니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공작……공작님께서 에린 스필렛…… 마님을 모셔 오라고…… 저를 보내셨습니다, 절대, 절대 나쁜 뜻은 없었습니다……!”

“날 데려오라 했다고요? 공작이라면, 루퍼트 클리포드가요?”

“예, 예. 지금 저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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