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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96)화 (96/129)

96화

루퍼트의 모습을 한 마왕 발리노스가 수하들을 둘러보았다.

사마엘의 노예 브리먼, 악마 니마스, 몇몇 흑마법사와 세뇌당한 기사들, 그리고 브리먼 황자를 지지하는 가문들의 사병들까지.

발리노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걸론 택도 없다.”

“왕께서 계시는데 안 될 리가 있겠습니까? 그깟 인간 놈들 다 쓸어 버리면 되지요!”

니마스가 클로에의 얼굴로 애살스러운 미소와 함께 그에게 아부를 떨었다.

“멍청한 악마야, 인간들을 다 죽여 버리면 마계를 유지하는 힘도 사라진다. 인간들의 숫자를 어느 정도 보존하되 공포와 증오를 키우는 게 마계에 도움이 되는 일이지.”

발리노스는 그녀를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더니, 브리먼에게 말했다.

“이 몸으로 부른 건 이유가 있을 테지.”

그러자 브리먼이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즉답했다.

“물론입니다, 클리포드 가의 사병들은 황군과 견줄 만큼의 실력과 무기를 갖고 있습니다. 가서 영주의 권한으로 그들을 합류시키면 됩니다.”

“좋아, 좋아. 네놈과 이 몸 중 어느 쪽이 상급자이지?”

“그건…… 저입니다. 제가 황족인지라.”

“그럼 지금부터 나를 원래 하던 대로 대해라. 그게 의심을 사지 않을 테니까.”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하지만 누구의 의심을 피하려고 하시는지, 물론 클리포드 가의 기사들을 설득하려면 그편이 좋긴 하겠습니다만.”

그러자 발리노스가 음흉한 미소와 함께 말 위에 올라탔다.

“에린 스필렛, 이 몸의 아내라고 하지 않았더냐?”

그 말에 브리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마도 신녀일 것입니다. 마왕님과는 상극으로, 보자마자 죽이셔야 합니다.”

“신녀라고? 하하하, 그건 더 재밌겠구나. 아무튼 지금부터 원래 하던 대로 해라. 나는 상관없으니.”

“……알겠네, 클리포드 공작.”

확실히 마왕은 하급 악마 니마스와 달리 멍청하지 않다. 오히려 웬만한 인간들보다 똑똑하고 교활했다.

브리먼은 침을 꿀꺽 삼키며 말에 올랐다. 그리고 발리노스를 안내하며 클리포드 영지로 향했다.

***

신녀 서품식이 모두 끝났다.

신관들 앞에서 대신관이 선언하고, 신관들과 함께 축복의 기도를 올리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저 의식으로만 여겼던 서품식이었지만, 막상 치르고 나니 몸속의 신성력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나는 이제 그것을 능숙하게 손끝으로 꺼내 사용할 수 있었다.

“잠시만요, 신녀님.”

그렇게 의식이 끝나고 돌아가려는데, 대신관이 나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단상 위에 있는 종이를 가리켰다.

“여기 서명하셔야 합니다.”

그 종이를 찬찬히 읽어 보니, 나와 루퍼트 사이의 결혼을 무효화 하는 것에 대한 서약이었다.

나는 조금 가라앉은 기분으로 깃펜을 잡고, 종이 위에 시선을 뒀다.

“저만 하면 되는 건가요?”

“네, 마왕을 여기로 불러서 서명시킬 순 없는 거니까요. 저와 황제 폐하께서 이미 승인한 일입니다.”

서명을 하기 직전, 펜을 잡은 손이 살짝 떨렸다.

‘정말 안녕, 루퍼트.’

붉어지는 눈을 깜빡거리며 결국 서명을 한 후, 속으로 다짐했다.

‘그래도 마왕에게서 반드시 구해 줄게.’

그날 이후 훈련에 좀 더 매진했다. 신성력을 아무리 잘 쓴다고 해도, 활을 적에게 맞추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다.

걷거나 뛰면서도 해 보고, 말을 타면서도 쏴 봤다.

여전히 적중률은 낮았지만 그래도 날이 갈수록 나아지는 것에 의의를 뒀다.

그러던 어느 날, 신전으로 한 사람이 찾아왔다. 그의 몰골은 마치 전쟁터에서 겨우 빠져나온 사람처럼 넝마가 되어 있었다. 다 죽어가는 그를 데이먼이 발견해서 데려왔다.

그는 신전 앞에서 의식을 잃는 순간, 내 이름을 불렀다고 했다. 그래서 찾아가 보니 역시 아는 얼굴이었다.

“리차드……?”

그는 클리포드 공작의 충직한 기사 리차드였다. 안 그래도 클리포드 영지를 떠날 때 그와 인사조차 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었는데, 이런 모습으로 만날 줄이야.

“일단 응급 처치는 끝냈습니다. 통증이 심한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군요.”

리차드는 부상도 심각했지만, 뭔가에 중독된 듯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아직 신관은 부르기 전이었다.

나는 내 두 손을 바라보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아직 정식으로 배우진 않았지만, 신성력이라면 나도 있으니 어느 정도 치유술을 쓸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리차드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짧은 기도와 함께 몸 안에 기운을 갈무리하여 천천히 손끝으로 내보내 봤다.

그러자 아주 희미한 빛줄기가 손에서 나와 그의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때 미리 불러 뒀던 안토니오 신관이 왔고, 나는 얼른 손을 떼어냈다.

“왜 그만두십니까? 잘하고 계시는데요.”

“그런가요? 혹시나 잘못될까 봐서요.”

“아주 정결하고 순수한 치료술이군요. 저보다도 훨씬 나으신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는 게 맞아요?”

“예에, 다만…….”

그는 내 손의 위치를 바꿔 주면서 미세하게 조절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신성력도 무한대가 아니니까요. 아낄 수 있을 땐 아끼는 게 좋겠죠.”

그의 조언에 따라 치료를 하니 확실히 신성력의 낭비가 덜했다.

그렇게 얼마가 흘렀을까, 리차드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피를 쏟아냈다.

“쿨럭, 쿨럭……!”

“수건, 수건을 가져다주세요!”

그렇게 피를 토하던 리차드는 다급하게 말을 뱉었다.

“마님, 컥, 공작님이, 영지의 군사들을 모두 데려가셨습니다, 쿨럭, 쿨럭.”

“마왕이 군사를 데려갔다는 말인가요?”

“마왕, 마왕이라고요? 이럴……수가, 쿨럭, 쿨럭!”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이야기하세요.”

데이먼이 리차드를 다시 자리에 눕혀 주었고, 리차드는 헐떡거리며 숨을 가다듬었다.

“마왕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냥 갑자기 이유도 말씀하지 않고 군사를 달라 하셔서 반대를 했죠. 브리먼 황자까지 옆에 있는 걸 보니 어쩐지…… 그분이 황태자 전하를 배신하려는 것 같아서, 쿨럭.”

“지금 루퍼트의 몸에 마왕이 들어가 있어요.”

“어, 어떻게, 그분이…….”

“어떻던가요, 모습이?”

리차드는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잠시 있었던 일을 떠올려 봤다.

“그분과…… 완전히 똑같았습니다. 그냥 루퍼트 공작님 그 자체였어요. 아마 성에 있는 기사들은 모르고 다 따라갔을 겁니다.”

그 말을 들은 방 안 사람들 모두의 표정이 굳어 버렸다.

나는 그 즉시 데이먼에게 말했다.

“데이먼, 이 사실을 전하께 알려야겠어요. 당신이 얼른 좀 다녀와 주세요, 부탁드려요.”

“혼자 괜찮으시겠습니까?”

“신전 안에만 있을 거예요, 걱정 마세요.”

“그럼 최대한 빨리 다녀오겠습니다.”

데이먼이 사라지고 나는 리차드의 몸에 신성력을 더 불어넣으며 치료에 다시 집중했다. 리차드는 연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마왕, 마왕이라니…….”

그가 놀랄 만도 했다. 신전에서부터 마왕이 강림했다는 소식은 이미 널리 퍼졌지만, 그게 구체적으로 누구의 몸에 강림했는지는 아직까지 몇몇 관계자들 외에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클리포드 가의 문장이 새겨진 복장의 군사들이 움직인다면, 이제 더는 쉬쉬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고통에 신음하는 리차드를 빨리 회복시키기 위해 일단 잠들게 했다.

“깨어나면 알려주세요.”

“네, 신녀님.”

다른 신관에게 병간호를 맡기고 밖으로 나왔다.

“군대…….”

브리먼 황자와 함께하고 있으니, 군대가 동원될 것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군대가 동원되면 흑마법 때문이 아니더라도, 병사들의 희생이 불가피했다.

브리먼 황자 쪽도 여기까지 일을 벌였으니 절대로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마왕과의 싸움보다 인간들끼리의 정치적 싸움 때문에 희생이 클지도 모르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최대한 마왕을 빨리 해치우는 것, 그것만이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

나는 경갑옷을 입고 등 뒤에 혼돈의 활을 매었다. 제법 커다란 활인데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아 신기했다.

“꼭 필요할 때만 사용하십시오.”

대신관은 몇 번이고 내게 다짐받았다. 혼돈의 활은 쏠 때마다 신성력이 소모된다고 했다.

“네, 명심할게요.”

혹시 몰라서 활뿐만 아니라 단검도 받아 허리띠에 매달아 뒀다. 그렇게 준비를 막 마칠 때 즈음,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에녹을 비롯한 기사들이 날 데리러 오고 있었다.

“신녀님.”

그는 나를 ‘백작’이 아닌 ‘신녀님’이라 불렀다. 그런데 내 모습을 아래위로 훑어본 에녹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그러지?

“왜요? 너무 예뻐서 그래요?”

“아, 그게…….”

그러자 그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다가왔다. 아무래도 정곡을 찌른 모양이다.

에녹은 갑자기 말없이 몸을 낮추더니 내 전투화 끈을 다시 고쳐 매어 줬다. 이것 때문에 그랬나? 하지만 위에서 바라보니 그의 귓바퀴가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아마 내 예상이 맞는 모양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까만 머리카락 위에 손을 얹은 후 가볍게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에녹이 움찔하며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봤다.

“다치지 말라고요. 다들 나가기 전에 축복 정도는 받는 거 같으니까…… 혹시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 먼저 받았어요?”

“그럴 리가요. 고맙습니다, 신녀님.”

전투화 끈을 다 묶은 에녹이 손을 털며 일어섰다. 나보다 훨씬 큰 키의 그가 잔잔한 웃음과 함께 내려다보니 아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내 옆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말아요.”

에녹의 길고 커다란 손이 내 손을 깍지 껴 마주 잡았다. 나는 당황할 틈도 없이 그에게 이끌려 밖으로 나갔다.

갑작스런 등장에 놀란 눈들이 우리를 바라보았고, 나는 붉어진 얼굴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푹 숙여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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