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백작.”
“하아, 콜록, 콜록.”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관 안에 앉아서 연신 기침을 토해 내고 있었다.
‘뭘까? 그 꿈은. 왜 이전의 세계가 보인 거지. 그리고 역시 저 세계의 난…… 죽었구나.’
신녀가 되는 서품식에서 왜 나의 개인적인 과거와 연관된 꿈을 꾼 걸까.
꿈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에린 스필렛 그 자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거울 속의 에린과 마주 본 순간, 에린 스필렛의 옛 기억이 완전하게 떠올라 버렸다.
그런데 떠오른 건 단순히 기억만이 아니었다.
루퍼트에 대한 감정까지도 고스란히 전해져 가슴 속에 통증이 일어났다. 그가 마왕이 되었다는 걸 안 지금, 옛 감정까지 더해지자 안타까움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끝내 눈물 흘리지 않은 건, 옆에 있는 사람 때문이었다.
에녹은 여전히 내 손을 꽉 잡은 채 내 등을 두드려 줬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 사람 앞에서 루퍼트에 대한 지난 사랑 때문에 눈물을 보일 수는 없었다.
나는 간신히 눈에 힘을 주며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창문 밖이 어두워져 있었다. 밤이었다.
“제가…… 얼마나…….”
대신관은 곁에 없었고, 크리스티나 신녀가 옆의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그리고 에녹은 약속대로 내 옆을 지키고 있었다.
단단히 어깨를 잡아 주는 손길에 떨리던 몸이 점차 진정되어 가면서, 그제야 차근차근 꿈이 생각이 났다.
아직도 멍한 기분 속에서, 크리스티나 신녀가 이곳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내 정수리와 이마, 입술을 차례로 손끝으로 짚으며 기도문을 외웠다. 그러자 그때까지 부유하며 불안했던 의식이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 갔다.
“수고했어, 이제 들어가서 푹 쉬도록 해.”
“이걸로…… 끝인 건가요?”
“거의 다 끝났어. 내일 이곳에 와서 신관들과 정식으로 인사를 하면 끝이 나.”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에녹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는데,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몸이 휘청거렸다. 멋쩍어 할 틈도 없이 에녹이 나를 번쩍 들어 안아 주었다.
조금 민망했지만 크리스티나 신녀는 별 관심 없는 듯 주변의 성물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나도 힘이 없어 그냥 에녹의 어깨 위에 폭 기댔다.
“……얼마나 걸렸어요?”
“대략 여섯 시간쯤 걸렸습니다.”
중얼거리는 내 질문에 성실히 대답해 주며, 그가 팔을 들썩여 나를 다시 한 번 고쳐 안았다.
에녹이 내가 묵고 있는 방으로 가서 침대에 내려줄 때까지 나는 잠시 침묵을 유지했다.
뒤엉킨 기억들이 한데 얽혀 여전히 혼란스러웠지만, 단단하게 나를 안고 있는 팔의 온기가 감정을 추스릴 수 있게 도와주었다.
‘에린의 감정은…… 지나간 거야. 그리고 나는 지금 이 사람과 미래를 약속했어.’
그가 침대에 나를 앉혀 줬을 때에야 나는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에녹은 그런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인사를 했다.
“수고했습니다. 푹 쉬세요.”
꿈을 꿨기 때문인 걸까. 왠지 모르게 지독하게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몸을 돌려 나가려는 에녹의 옷자락을 나도 모르게 붙잡아 버렸다.
“백작……?”
그가 필요 이상으로 놀라며 돌아보는 모습에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요. 바쁘지 않다면…….”
왠지 그가 무슨 오해를 했는지 알 것 같아 얼굴이 달아올랐다. 에녹도 자신의 오해를 알아차렸는지, 조금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피하며 침대 옆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이불을 들춰 내 몸 위에 덮어 주었다. 그제야 나는 내 몸이 아직도 간헐적으로 떨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물끄러미 에녹을 바라보았다.
“전하.”
불안한 마음 때문일까, 그에게 모든 걸 털어놓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단 한명이라도 진짜 나를 알아준다면, 조금이라도 덜 외롭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였다.
“전하, 사실 저는…….”
그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것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차분히 바라보는 에녹의 눈빛에 어느덧 마음이 놓여 술술 털어놓고만 싶었다.
“에린 스필렛이 아니에요.”
그렇게 던져 놓고 에녹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에녹은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다 다시 잠잠해진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저는, 그러니까. 그 결혼식 날 에린 스필렛에게 빙의했어요. 무슨 말이냐면…… 원래 제 이름은 혜린이었는데…….”
말을 할수록 혼란스러웠다. 왜냐하면 이 말이 맞는 말인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꿈속에서의 나는 이미 에린 스필렛 그 자체였다. 그리고 에린의 기억까지도 모두 떠올리고 말았다. 그 기억은 타자화되지 않고 정말로 오롯한 내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그럼 지금 나는 누구인 거지?
“아…….”
내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려는데, 에녹의 따뜻한 손이 한쪽 손을 잡아 주었다. 그는 나지막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당신이 잠들어 있는 사이에, 크리스티나 신녀님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나는 묵묵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신녀의 서품식은 일반적인 신관의 서품식과 달리 파편으로 흩어진 정신의 조각들을 제자리로 맞추기 위한 의식이라고 합니다.”
“파편으로 흩어진 정신이요?”
“백작, 백작은 방금 에린 스필렛이 아니라고 하셨죠.”
“네, 사실 잘 모르겠어요. 저는 분명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에요. 아니, 아니라고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방금 꿈을 꾸고 나니 에린의 기억들이 되살아나서…….”
말하다 보니 눌러 놨던 감정들이 다시 되살아났다. 울컥 쏟아지는 눈물에 스스로 어쩔 줄 몰라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갑자기.”
에녹은 내 눈가를 닦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
“나도 신학을 배우지 않아 잘은 모릅니다만, 신녀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의식이 파편화되어 다른 세계로 흩어진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방금 백작이 말했던,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는, 그 혜린이라는 사람도, 지금 여기 있는 에린 스필렛도 같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하나의 의식이 조각난 채로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았던 거죠.”
나는 그의 말을 멍하니 들으며 눈을 깜빡거렸다. 머리로는 명확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쩐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확실히 지금의 나는 혜린의 기억도 갖고 있었고, 에린의 기억도 갖고 있었다.
“사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리케포로스 초대 황제께서도 같은 일을 겪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특별한 힘을 얻었죠.”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거렸다. 설명을 듣다 보니 눈물이 멈춰 있었다.
“사실 조금은 그렇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결혼식 후, 백작께서 루퍼트를 전혀 생각하지 않으시길래…….”
말은 하던 에녹이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기억이 돌아왔다면…… 혹시, 다시 루퍼트를…….”
약간의 긴장과 함께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나는 잡고 있던 손의 위치를 바꿔 그의 손등을 덮어 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었다. 루퍼트에 대한 미련과 측은한 마음이 에린의 기억 속에 묻어났지만, 그것 때문에 흔들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 내 모습에 안심하는 에녹을 보니, 이런 내 선택이 옳은 듯했다. 이 시점에서 그를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침울해 보였던 에녹이 희미하게 웃으며 자신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이런, 못난 모습을 보였군요.”
“전하 얼굴로는 못나 보이는 것도 쉽지 않아요.”
즉답하자 에녹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귀엽게도, 이럴 때 보면 이 사람도 참 순진한 구석이 있다니까.
“이전 세계에 대한 기억과, 지금 에린의 기억이 갑자기 섞여서 혼란스러웠어요. 서품식이 이런 의식일 줄은 몰랐네요.”
“이제 어려운 일은 끝났으니 걱정 마세요.”
똑똑-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신관이 외쳤다.
“전하, 황태자 전하. 보좌관이라는 분께서…… 어엇, 이보세요!”
쾅쾅쾅!
“전하, 여기 계십니까?”
“이런.”
에녹은 혀를 차며 다가가 문을 열었다. 그러자 붉게 상기된 얼굴의 리암이 씩씩대며 한 발자국 안으로 들어왔다.
“전하! 대체 언제까지 기다리게 하실 겁니까, 대체 쌓인 업무가 얼마나 많은지 아십…… 으읍……!”
문이 열리자마자 폭풍처럼 쏟아지는 잔소리에 에녹이 리암의 입을 막아 버렸다. 그리고 뭐라 뭐라 중얼거리더니 그대로 리암을 문밖으로 밀어낸 다음 문을 닫았다.
에녹은 문에 기대 겸연쩍은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그에게 놀리듯이 물어보았다.
“전하, 바쁘신가 봐요. 그런데 여기서 몇 시간씩이나 계셨어요?”
그러자 에녹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다급하게 변명을 했다.
“리암이 괜히 호들갑 떠는 겁니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쾅, 쾅, 쾅-!
하지만 여전히 리암은 문을 두드리고 있었고, 나는 결국 일어나 에녹의 등을 떠밀어 줬다.
“아이참, 어서 가 보세요. 황태자 전하께서 나랏일에 소홀하시면 안 되죠.”
에녹은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듯한 눈으로 날 바라봤지만, 내가 봤을 때도 이 사람이 이렇게 오래 여기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는 한숨을 푹 쉬며 문을 다시 열었다.
“으악!”
문에 기댄 채로 두드리던 리암이 휘청거렸지만, 에녹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애틋하게 날 바라보았다.
“일주일 뒤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훈련 열심히 하고 있을게요.”
에녹은 짧게 볼키스를 한 후에 방에서 나갔다.
그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 방에 깊은 적막이 찾아왔다. 나는 터덜터덜 침대로 가서 앉은 후, 다리를 모아 세워 두 팔로 끌어안았다.
에녹의 다정함이 오늘따라 고맙고 미안한 날이었다. 그러니까, 루퍼트에 대한 기억의 잔상이 오늘로 끝나길, 빌고 또 빌었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아까 한 이야기를 되짚어 봤다. 그러니까 내 의식의 파편이 각각 혜린과 에린으로 살아왔고, 동시에 죽은 그날 에린의 몸에 한데 합쳐졌다는 거지. 그게 가능한 건가?
고민해 봤자 내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범주의 일이 아니었다.
나는 일단 고민을 관두고, 씻기 위해 욕실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