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아, 전하. 언제 오셨어요.”
내 말에 답도 없이, 에녹은 내 손에 들린 활을 가져가더니 다른 손으로 내 손을 만지작거렸다.
활줄을 잡아당긴 검지와 중지 위에는 아직 무르익지 않은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그의 미간에 가느다란 주름이 생겼다.
“훈련을 너무 무리하게 하시는 거 아닙니까.”
“아직도 멀었어요. 움직이는 걸 쏘는 법은 아직도 익히지 못했는걸요.”
전쟁 중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이제 똑바로 서서 고정된 과녁을 맞추는 건 비교적 쉽게 했지만, 나와 상대가 움직이는 상황에서 맞추는 건 여전히 어려웠다.
그러자 물끄러미 내 손을 보던 그가 갑자기 주머니에 있던 장갑을 꺼내더니 내 한쪽 손에 끼워 주었다.
“전하 것 아니에요?”
“시간이 남았으니 조금 도와드리죠.”
그래도 훈련을 말리지는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날 아낀답시고 과보호하면 오히려 귀찮을 것이다.
그는 묵묵히 나머지 손에도 장갑을 끼워 주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높은 나뭇가지 위에 있는 열매 하나를 그는 눈빛만으로 뚝 떨어뜨렸다. 그러니까 저건 마법이겠지, 정말 탐나는 기술이다.
에녹은 그 열매를 주워들더니 내게 보여 주었다. 사과보다 조금 더 큰 열매였다.
“움직일 테니 쏴 보세요.”
“네? 어떻게요?”
에녹이 열매를 갑자기 과녁 앞으로 집어 던졌다. 순식간에 날아간 열매는 평소에 쏘던 과녁 앞에 동동 떠 있었다.
“저건 그냥 과녁을 맞추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네요.”
멈춰 있는 것 같았던 열매는 곧 이리저리 불규칙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녹은 잠시간 그 열매에 시선을 두다 내게 다가왔다.
와우, 이제 저건 자동으로 움직이나 보다.
“마법을 이렇게 막 사용해도 돼요? 그냥 훈련인데.”
“당연히 안 되죠. 내 비가 될 사람이니 특별히 해 드리는 겁니다.”
그가 아무렇지 않게 꺼낸 말에 나는 헙, 하고 숨을 들이켰다. 정말, 이 사람은 훅 들어온다.
사실 이 연무장에는 훈련용 움직이는 과녁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일정한 방향과 속도로 움직여서, 어느 정도 적응되면 금방 익숙해지니 실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저런 훈련이 분명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은 했다. 그러나 막상 보니 엄두가 안 나서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데 등 뒤를 감싸는 온기와 함께 나 대신 활을 잡는 손길이 있었다. 에녹이 내 뒤에 와서 자세를 대신 잡아 주었다.
“어깨에 힘 빼고 나한테 맡겨 봐요. 눈으로는 놓치지 마시고요.”
그의 말대로 눈으로는 열매를 쳐다봤지만, 내 신경은 온통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귓가에 들리는 나지막한 숨소리라던가, 등에 맞닿은 단단하고 따뜻한 가슴이라던가, 활대를 겹쳐 잡고 있는 커다란 손이라던가 하는 것들로 말이다.
그러는 사이, 에녹은 내 손과 함께 활줄을 잡아당겼고 순식간에 화살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분명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었는데 화살이 날아가는 방향으로 열매가 나타나 그대로 꽂혀 버렸다.
“저거 열매를 조종한 거 아니에요? 어떻게 방향을 예측하는 거예요?”
내 당황스러운 목소리에 큭큭거리는 웃음소리가 가까이서 울려 퍼졌다.
나는 몸을 비틀어 품에서 벗어났다.
“다시, 다시 해 주세요.”
“그러죠.”
다른 열매로 다시 한 번 해 봤다. 에녹의 도움 없이 열매를 향해 화살을 날렸고, 너무 당연하게도 화살은 허공을 날아다니다 바닥에 떨어졌다. 열매는 약 올리듯이 공중제비를 했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건, 화살을 일일이 주우러 가지 않아도 되돌아 온다는 점이었다.
나는 고개를 휙 돌려 에녹을 봤다.
“다음엔 마법을 가르쳐 주세요.”
아무리 봐도 마법이 너무 사기적이다. 그러자 에녹이 눈을 깜빡거리다 다시 웃으면서 답했다.
“안 그래도 제가 백작을 내내 살펴봤지만…… 백작은 마법 재능이…….”
“진짜 해 보기 전엔 모르는 거잖아요.”
“알겠습니다. 일이 끝나면 가르쳐 드릴게요.”
에녹은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양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그 모습이 은근히 얄미웠지만, 빙글거리는 웃음이 예뻐서 나도 모르게 불끈 쥐었던 주먹을 내려놓았다.
오기가 생겨 계속해서 화살을 쏴 보았지만, 신관이 기도실로 돌아가야 한다며 데리러 올 때까지 결국 단 한 발도 못 맞췄다. 시무룩하게 들어가는 내 어깨를 에녹이 툭툭 두드려 줬다.
“그럼 힘내요.”
“그대로 가요?”
“내일 의식이 시작되기 전엔 올게요.”
아쉬움에 돌아봤지만, 그는 그렇게 인사 후에 떠나 버렸다. 정말 잠시 짬을 내서 신전에 왔던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하루 종일 마음이 들떠서, 오늘따라 기도에 집중이 안 됐다. 이런 내 모습이 조금은 적응이 안 되기도 했다.
다음 날, 일찍부터 일어나 목욕재계를 한 후 옷을 갈아입었다.
하얀 실크로 된 하늘하늘한 드레스 위에, 또 하얗고 얇은 긴 망토를 어깨에 둘렀다. 화장은 하지 않았고, 머리만 가지런히 빗어 넘겼다.
이곳은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 내 하녀인 제니나 리아도 들어올 수가 없었다. 크게 치장할 일은 없어 다행이었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크리스티나 신녀였다. 신전 안이라 그런지 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조금 창백해진 얼굴로 다가온 그녀는 싱긋 웃더니 아무것도 없는 가슴 근처에 브로치를 달아 주었다.
“하다가 쓰러질 수도 있어.”
“그렇게 힘든 일인가요?”
“글쎄,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정신이 조금.”
크리스티나는 머리 근처를 톡톡 두드리더니 내 손을 잡아 일으켰다.
“신녀 서품식은 되도록 같은 신녀가 주관하게 되어 있어. 어서 가자.”
나는 그녀를 따라 복도를 걸어가면서 궁금한 점을 물어봤다.
“얼마나 걸리나요?”
“글쎄, 사람마다 너무 달라서. 길게는 며칠이 걸릴 수도 있고. 반나절이면 끝날 수도 있고.”
내가 생각하는 서품식의 장면과는 많이 다른가 보다. 일정한 시간과 순서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었나.
신관들이 모여 있을 줄 알았던 성전 안에는 의외로 대신관과 에녹, 안토니오 신관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인 것이 누워 있었다. 바로 관이었다.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것을 보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이게…… 뭐죠?”
“여기 편히 누우시면 됩니다.”
대신관의 미소에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별로 안 편할 것 같은데요. 뱀파이어도 아니고.”
슬쩍 보니 에녹도 썩 기분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나도 이렇게 했어. 여기서 잠들었다 깨어나면 끝나는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요…….”
나는 에녹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관에 누웠다. 다행히 뚜껑은 덮지 않는 것 같았다. 그가 손을 잡은 채 옆에 앉아 주었다.
“깨어날 때까지 옆에 있겠습니다.”
“……얼마나 걸릴 줄 알고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그의 손을 꽉 잡았다. 대신관이 성수를 가져오고, 크리스티나 신녀가 손안에서 구슬 같은 것을 잘그락거리며 기도문을 외웠다.
내가 똘망똘망하게 눈을 뜨고 있자, 피식 웃더니 그녀가 손으로 눈을 감겨 주었다.
“위험한 일은 없겠죠.”
“그건…….”
에녹의 목소리가 들렸고, 신녀가 뭐라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점점 작아져 내용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슬슬 잠이 쏟아지고, 의식이 캄캄한 어둠 속으로 잠겨 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똑, 똑, 똑 물이 떨어지는 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눈을 번쩍 떠 보니, 나는 어둠 속에 갇혀 있었다. 어디까지가 바닥이고, 어디까지가 벽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고, 정신이 몽롱했다.
바닥을 더듬거리며 일어나 물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서서히 다가갔다. 가까운 줄 알았는데 걷다 보니 꽤 한참이었다. 그렇게 다다른 곳에는 연못이 있었다.
사방이 어두운 와중에 바닥에 고여 있는 물의 표면이 일렁거렸다. 그 안에서 뭔가 보이는 것 같아서,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물속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잘 보이지 않았지만, 뚫어져라 보다 보니 점점 윤곽이 뚜렷해졌다.
그리고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 그 안에는 이전에 살았던 세계가 그려지고 있었다. 조용한 와중에 먼 곳에서 외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혜린아, 혜린아, 정신 차려 봐……!’
혜린, 이제는 가물가물하기까지 한 이전의 내 이름. 내 방에 들어온 가족들이 내 몸을 붙잡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낯설고도 어색했다.
나는 이곳에 온 뒤, 일부러 이전 세계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를 꺼려했었다.
떠올려 봤자 이 세계에 적응하기 힘들어질 뿐만 아니라, 그 기억에 사로잡힌 날에는 외롭고 무서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면은 빠르게 전환되었다.
전 남자친구와 친구의 결혼 생활을 보여 주었다. 둘은 잠시 행복했지만, 점점 싸움이 잦아졌고, 싸울 때마다 내 이름을 들먹거렸다.
왠지 피식, 피식 웃음이 났다.
빠르게 넘어가는 장면들을 남 일 보듯이 보던 나는, 어느 한 장면이 등장하자 움찔거렸다.
“저건…….”
병원에 온갖 장치를 달고 누워 있는 내 모습이었다. 가족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하얀 천이 스르륵 올라와 얼굴까지 덮어 버렸다.
그 장면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연못으로 손을 뻗었다.
“……아.”
하지만 어느새 고인 물은 딱딱하게 얼어 있었다. 그리고 얼어붙은 표면 위로 나, 에린 스필렛이 비쳐 보였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분명히 난 혜린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에린이 정말 나 같고, 혜린이 타인처럼 느껴지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얼음 위로 손을 짚고 조심스럽게 나를 살펴보았다. 그 순간, 갑자기 얼음이 빠르게 녹아내렸다. 나는 무게중심이 쏠려 연못 안으로 풍덩 빠져 버렸다.
“아, 살려……!”
숨이 막혀 발버둥 치는 와중에, 내 손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손길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