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어떻게 그 이름을…….”
브리먼이 놀라 말끝을 흐리자, 발리노스가 루퍼트의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이놈의 머릿속에 강하게 잔상이 남아 있다.”
“몸의 기억이 남아 있는 겁니까?”
발리노스가 재밌다는 표정으로 수도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렇다. 흥미로운 일이야. 말해라, 에린 스필렛이 누구지?”
“그저 인간 여자입니다. 그 몸의 주인과 부부였으나 사이는 그다지 가깝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브리먼은 혹시나 마왕이 변덕을 부릴까 싶어 흥미를 차단시키려 했다.
마왕 발리노스는 그 말에 딱히 답하지 않았다. 이미 비릿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이미 그의 관심이 쏠렸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갈 곳이 있으니 준비해라.”
“말을 타고 가실 겁니까?”
브리먼이 그렇게 물은 건, 마왕 정도의 마력이라면 순간이동도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 다른 인간들을 움직이려면 제법 흉내는 내야 할 게 아니냐. 이번에는 호락호락 당하지 않을 것이다.”
“예, 준비하겠습니다.”
브리먼은 바로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자 지금까지 들어 보지 못했던 음산한 목소리가 숲속에 울려 퍼졌다.
[반드시 리케포로스의 핏줄과 그의 제국을 내 발밑 아래 무릎 꿇릴 것이다.]
그것은, 루퍼트의 목소리가 아닌 마왕의 진성이었다. 그 옛날 리케포로스 초대 황제에게 당했던 치욕을 그는 잊지 않고 있었다.
브리먼은 덜덜 떨리는 팔다리를 진정시키며 준비를 서둘렀다.
***
“정말, 괜찮겠습니까.”
에녹은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듯, 신전 앞에서 내내 움직이지 않았다.
애틋하다 말할 수도 있겠으나, 그러기를 벌써 한 시간째였다. 슬슬 다리가 아파 왔다.
“그럼요, 열심히 훈련하고 있을게요.”
나는 일단 신녀가 되는 최종 의식을 치르고 난 후, 신전에서 지내며 마왕전에 필요한 훈련을 하기로 했다.
에녹은 황태자로서의 입장과 나를 생각해 주는 입장 사이에서 아까부터 내내 갈팡질팡했다.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착잡하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지그시 나를 응시하는 것을 보며, 나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지켜 주실 거잖아요.”
황태자로서의 그는 희생을 줄이고, 전쟁을 안전하게 치르기 위해 나를 신녀로서 전쟁터에 데려가야 했다.
하지만 일생을 신녀로 살아야 하는 운명이야 황태자의 청혼으로 벗어날 수 있다 해도, 마왕과의 전쟁에서 닥칠 위협까지는 벗어날 수 없다.
사실 나로서는 그 전쟁의 진짜 모습이 어떤지 잘 모르기 때문에 고민이 덜했을지도 모른다.
에녹은 한숨과 함께 내 양손을 마주 잡더니, 이마 위에 살짝 입술을 갖다 댔다.
그러자 내 뒤에 마중 나와 있던 신관들이 헛기침을 하며 허공을 봤다.
“앗, 그……, 그…….”
갑자기 대놓고 하는 애정 공세에 나까지 정신을 못 차릴 것 같았다. 에녹이 비스듬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연인에게 이 정도도 하면 안 되는 겁니까?”
“연인……이라고요?”
“백작께서 내게 청혼하지 않으셨습니까. 설마 마음도 없는데 나를 놀리신 겁니까?”
흘겨보는 눈길에 찔끔하여 얼른 대답했다.
“아뇨, 절대 그런 건 아니고요.”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갑자기 달라질 줄이야. 나는 달아오르는 뺨을 느끼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아무튼, 이제 정말 가세요.”
“아쉽군요, 보는 눈이 많아서.”
에녹은 정말 아쉬워 보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우아하게 허리를 숙여 내 손등에 키스한 후에야 겨우 떠났다.
그렇게 에녹을 떠나보낸 후, 나는 잠시 한가해졌다. 신녀가 되는 최종 의식은 사흘 후에 치른다고 했다.
뭘 할까 생각하다가 마침 생각난 김에 활 연습을 하기로 했다.
“아까 그 혼돈의 활로 연습을 좀 해도 될까요?”
대신관에게 물으니 그는 다급히 손을 저었다.
“그 활은 한 발 한 발마다 신성력을 소모하기 때문에, 연습을 하시려거든 연습용 활을 드리겠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렇게 받은 나무 활을 가지고 나는 연무장으로 갔다. 평소에는 성기사들이 수련하는 장소라는데, 지금은 비어 있었다.
내 활 연습 조교는 마침 옆에 있던 데이먼이 해 주기로 했다. 황제를 알현하고 바로 오는 길이라,데이먼은 나보다 늦게 출발하여 에녹이 막 떠나기 전에 도착했다.
“레이디, 두 다리에 힘을 주시고요. 팔을 벌리고…….”
“이렇게요?”
“아뇨, 저한테 줘 보세요.”
데이먼이 활을 쥐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문득 사냥 대회 때가 생각이 났다. 그때도 그가 활 쏘는 법을 잠시 가르쳐 줬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는 아직 앳된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꽤 남자다운 태가 났다. 몇 달 사이에 확 바뀌는 걸 보니 새삼 신기했다.
물끄러미 보다 생각난 것을 물었다.
“그런데, 정말 왜 제 호위 기사 자리를 받아들이신 거예요?”
“지금 생각 중입니다.”
“네?”
데이먼은 활을 내려놓으며 가만히 내 얼굴을 응시했다. 이어지는 시선에 민망하여 나는 볼을 문질렀다.
“왜 그래요? 뭐 묻었어요?”
“아까…… 황태자 전하와…….”
말끝을 흐리는 데이먼을 빤히 쳐다보았다.
“데이먼?”
“하신 말씀이요.”
데이먼이 한숨을 쉬며, 자신의 얼굴을 벅벅 문지르더니 갑자기 과녁을 향해 활을 들어 올렸다.
핑- 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날아가 과녁 정중앙에 꽂혔다. 그는 그러고 나서야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아닙니다, 레이디. 제가 잠시 미쳤었나 봅니다.”
“네?”
데이먼은 혼자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걱정 마십시오! 레이디가 누굴 좋아하든, 어디 계시든, 설사 신녀가 되신다 해도 저는 무조건 레이디를 지킬 겁니다.”
나는 놀란 눈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그가 이러는 이유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혹시……?’
“데이먼, 일어나세요.”
“예, 레이디.”
그는 씩씩하게 일어났지만, 나는 조금 안타깝게 그를 올려다봤다.
“혹시…… 만약에, 이 일을 하기가 힘들어지셨다면…….”
“아뇨,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데이먼은 반복해서 부정하더니, 이내 허둥지둥 다시 활을 내게 건네주었다.
“자, 어서 자세를 잡으십시오. 마왕전까지는 꼭 쓸 수 있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가 주제를 피해 버리니 나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실제로 데이먼만한 호위 기사를 다시 구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잘 부탁드려요, 선생님.”
***
그렇게 나는 한동안 신전에서의 생활에 적응해 갔다. 오전 다섯 시에 일어나 목욕을 하고, 아침 식사 후에는 밖에 있는 연무장에서 체력 훈련을 하고 활 쏘는 법을 배웠다.
점심 식사 이후부터는 쭉 기도실에서 기도를 해야 했다.
원래 무신론자에 가까웠던 나는 정말 신이 존재한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무슨 기도를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시간만 보냈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이 세상에 마왕이 존재한다면 자연스럽게 신도 존재할 것이다. 그렇게 납득하며 없는 신앙심을 쥐어 짜내니, 자연스럽게 머릿속에서 내용이 떠올랐다.
때문에 주로 마왕으로부터 이 세계를 보호해 주십사 하는 구절을 속으로 반복해서 말했다. 내가 신에게 기도로 청할 건 정말로 그것뿐이었다.
속으로 어설프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 어설픈 신녀 생활로 인해 점점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신성력이 활성화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원래 신녀들은 이 과정에서 여신의 목소리를 듣기도 한다던데, 아직까지 나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잠들기 전에는 일부러 초청한 흑마법사의 마법을 받아내며 정화하는 연습을 했다.
그동안은 나도 모르는 사이 이루어지는 일들이라 인식하지 못했었는데, 집중해서 연습해 보니 이것도 생각보다 체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아침 훈련은 늘 데이먼과 함께했지만, 오늘은 데이먼이 자리를 비워 혼자 해야 했다.
편안하고 헐렁한 활동복을 입고 머리를 높게 치켜올렸다. 나가면서 창으로 언뜻 본 모습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자연스러운 모습도 이렇게 예쁠 수가 없다. 이런 내가 신녀로만 지내는 건 국가적인 손실이다.
드디어 내일 신녀가 되는 최종 의식, 서품식을 치르기로 했다. 이곳에 머문 지 정확히 이 주가 된 날이었다.
이제 제법 찬바람이 불어 오는 계절이었지만, 정오의 햇살은 따사로웠다.
나는 손으로 빛을 가리며 하늘을 보려다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확실히 몸 안의 신성력이 강해지자 더 명확해졌다.
동쪽 어딘가에서 일렁거리는 마기가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루퍼트가 정말…….’
걱정이 아예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내내 외면해 온 사람이지만, 그가 마지막으로 내게 보였던 진심이 단순한 집착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먹구름이 낀 동쪽 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잠시 이 소설의 마지막 내용을 떠올렸다.
루퍼트는 에린 스필렛이 자업자득으로 죽고 난 이후,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클로에에게 청혼을 한다. 그사이에 자잘한 사건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클로에가 위험에 처하고 루퍼트가 구해 주는 그런 전개였다.
둘의 굳건한 사랑에 서브 남주였던 에녹은 짝사랑하던 클로에를 깔끔히 포기한다. 그리고 루퍼트와 클로에는 에녹을 비롯한 많은 이들의 축복 속에서 행복하게 결혼식을 올리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후의 일들은 소설 속에서 외전으로도 나오지 않았다.
아주 만일, 지금 이 세계에서 원작의 내용대로 내가 죽고, 루퍼트와 클로에가 결혼했더라면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에녹은 무사히 황제가 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만약에, 아주 만약에 나와 에녹이 마왕을 막지 못한다면 이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책임감에 갑자기 초조해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가벼웠던 나무 활이 문득 너무 무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딜 그렇게 보고 계시는 겁니까.”
그렇게 멍하니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화들짝 놀라 옆을 돌아보니, 에녹이 기별도 없이 신전에 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