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92)화 (92/129)

92화

에녹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내게 향하자, 나도 모르게 움찔하며 걸음이 늦춰졌다. 그러자 내 뒤에 있던 대신관이 앞서 걷게 되었다.

그는 에녹의 손에 들린 것을 보더니 반색하며 말했다.

“전하, 그건 혼돈의 활이 아닙니까.”

“예.”

에녹은 짧게 대답하며 그 활을 내려다봤다. 은빛으로 뒤덮인 활대는 언뜻 봐도 귀해 보였다.

“이게 뭔가요?”

내 질문에도 에녹은 입을 굳게 다물었고, 대신관이 슬며시 눈치를 보며 답했다.

“혼돈의 활은 그 옛날 마왕을 잡을 때 썼던 활입니다.”

“아주 귀한 물건이군요.”

나는 그것을 잡아 보려 했지만, 에녹은 만지지도 말라는 듯 그 활을 뒤로 물려 성물의 관리인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허공에 뻗은 팔을 멋쩍게 다시 거뒀다. 그러고 나니 더욱더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대신관은 어색한 웃음과 함께 그 활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최초의 신녀께서 저 활을 사용했다고 들었습니다. 이후에는 신전 깊숙한 곳에 보관되어 있던 것이죠. 저 녀석은 마왕이 출현한 덕분에 이제야 빛을 다시 보게 되었군요.”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에녹은 그의 말에 단정적으로 답했다. 그러면서 내 얼굴을 빤히 봤다.

“백작께서는 신녀가 되지 않으실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시선 속에 나는 그의 갈망을 읽어냈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저 단정적인 말을 들으며 내 성격상 ‘그러마.’ 하고 뒤돌아섰을지도 모르겠다.

“휴, 대신관님.”

“네.”

“잠시 자리를 좀 비켜 주시겠어요. 황태자 전하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요.”

“그러시지요.”

대신관은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다른 일행들을 모두 통솔하여 문밖으로 나가 주었다.

텅- 하는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리고 나니, 커다랗고 서늘한 공간 안에 나와 에녹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후우.”

말을 꺼내기 전, 나는 다시 한 번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나로서도 조금 어려웠다.

그의 의사를 짐작한다고 해도, 솔직히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말을 함부로 추측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나 자신의 입장도 아직 명확하지 않았다. 그래도 대화는 필요했다.

“전하.”

소리가 공간 안에서 웅웅대며 울려 퍼졌다.

나는 그의 앞으로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가라앉은 눈동자가 얕게 떨리고 있었다.

“여쭤 보고 싶은 말이 있어요.”

“……하십시오.”

평소보다 조금 차가웠지만 내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진중했다.

“이미 신녀님께 들은 말이지만, 그래도 전하께서 다시 한 번 알려 주세요.”

에녹은 침묵하며 내 질문을 기다렸다. 막상 그를 눈앞에 두고 보니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차분해졌다.

밤하늘처럼 새카만 머리와 그 아래 은은하게 빛나는 녹빛 눈동자, 긴 속눈썹과, 굳게 다문 입술, 길게 쭉 뻗은 단단한 팔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진심 어린 눈빛도. 나는 뭘 고민했던 걸까? 이 사람이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도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갈팡질팡했던 마음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 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눈앞의 일들에 떠밀려 애써 외면했던 감정이 잔잔하게 밀려오고 있었다.

점점 두근대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제가 신녀가 되지 않으면, 그다음은 어떻게 되나요?”

“신관들과 함께 군대를 동원하여 마왕과 그의 군대를 공격할 겁니다.”

“그럼…… 이길 수 있나요?”

에녹은 담담한 시선으로 땅을 응시했다.

“힘든 싸움이 되겠죠, 하지만.”

잠시 뜸을 들이다 그는 힘겹게 말했다. 정말 그 말을 하기 싫은 것처럼.

“백작이 하기 싫다면 안 하셔도 됩니다. 마왕을 물리치는 건 국가의 일이고, 백작에게 강요할 일은 아닙니다. 백작에게는 그…… 화려한 싱글 라이프도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끝의 말이 묘하게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들렸다. 아니, 그렇게 들린 게 아니라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듣다 보니 픽 웃음이 나왔지만 간신히 참아냈다.

“그럼 루퍼트는 손도 써 보지 못하고 마왕으로 죽게 되는 거잖아요.”

“그를 위해 희생하실 생각입니까?”

에녹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조금 더 가라앉았다. 안 그래도 이렇게 오해하지 않을까 생각하긴 했다.

“잠시의 불편함 정도는 감수해야겠죠, 꼭 루퍼트 때문이라기보단. 그냥 상황이…… 안 나설 수가 없잖아요.”

나는 일부러 가벼운 한숨과 함께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에녹은 바로 알아듣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신녀의 삶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 답답함 때문인지 몰라도 역대 신녀들은 다들 오래 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를 그렇게 내버려 두실 건가요?”

에녹이 조금 멍청한 표정을 짓는 걸 보면서 나는 한쪽에 얌전히 놓여 있던 혼돈의 활을 집어 보았다. 겉보기엔 무거워 보였는데, 생각보다는 가벼웠다.

“전하. 마차에서 그 말은, 그냥, 해 본 말이에요.”

나는 발끝을 바닥에 톡톡 치며 슬쩍 그의 눈치를 봤다. 에녹이 그런 나를 한 번 쳐다보긴 했지만, 이 정도로 풀릴 리가 없었다.

“저…….”

나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그의 소맷깃을 잡아당겼다. 그는 물끄러미 잡힌 곳을 보다 내 눈을 마주 봤다.

“미안해요, 아까 그 화려한 싱글…… 그 말은. 신녀가 된다는 게 너무 싫어서.”

“하지만 잘생긴 남자들을 원하는 건 백작의 진심 아니었습니까.”

이렇게 질투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속이 간질거리면서도 조금 답답했다. 이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어쩜 이렇게 모를까.

“잘생긴 남자들이래봤자, 어디 황태자 전하만 하겠나요.”

나는 몸을 슬쩍 돌리며 그에게만 들릴 만큼의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등 뒤에서 들리는 호흡 소리가 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스필렛 백작.”

나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간헐적으로 떨려 왔다. 아무리 나라도 이런 대화는 조금 부끄러웠다.

나는 붉어지는 얼굴을 감추며, 비스듬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

어두운 지하실 안, 흐린 불빛만이 그의 얼굴 위에 일렁거렸다.

주변 사람들은 의식이 진행된 이후 내내 며칠간 그를 지켜보며 숨죽이고 있었다. 하지만 슬슬 지친 이들이 나왔다.

“사마엘의 노예야, 이거 실패한 거 같은데? 이렇게 오래 걸린다고?”

클로에의 얼굴을 한 니마스가 신경질적으로 묻자, 브리먼이 초조한 기색을 애써 감췄다.

“기록에 따르면 이전의 소환은 나흘이 걸렸다고 했어. 오늘이 사흘째이니 조금만 더…….”

니마스가 그 말에 뭐라 대꾸하려던 차에, 갑자기 벽에 달려 있던 램프의 불꽃이 곧 꺼질 듯이 흔들거렸다.

사방이 막힌 지하에서 찬 바람이 불었다. 그러자 흑마법사들은 소름 돋는 찬 기운 속에서 와들와들 떨기 시작했다.

“……왔다.”

그 순간 악마종 니마스가 제일 처음 입을 열었다. 그들은 숨을 죽인 채, 바닥에 누워 있는 루퍼트를 바라보았다.

루퍼트의 몸 안에서 검푸른 연기가 미세하게 흘러나왔다. 브리먼은 성취감에 들떠, 파들파들 떨리는 와중에도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잠시 후, 시체처럼 누워 있던 루퍼트의 눈이 번쩍 뜨였다. 동시에 사방에서 검은 폭풍이 몰아치고, 약한 흑마법사 몇몇은 그 바람에 휩쓸려 날아가다가 벽에 처박혀 그대로 절명하고 말았다.

브리먼과 니마스는 바람이 멈출 때까지 바짝 엎드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내 폭풍이 가라앉더니 루퍼트의 얼굴, 루퍼트의 몸, 루퍼트의 목소리 그대로, ‘그’가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의 유희로구나.”

마왕이 입을 열자, 그의 주위에서 몰아치던 기운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제야 니마스와 브리먼이 시선을 교환하더니 흘끔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둠과 악의 제왕, 발리노스 님께 이 미천한 노예가 인사드립니다.”

브리먼의 음색은 전보다 탁했다. 마왕을 소환하며 힘을 많이 쓴 까닭에 악마종 사마엘의 목소리가 전보다 짙게 배어 있었다.

“왕 중의 왕이시여, 이렇게 뵙게 되어 몸 둘 바를…….”

루퍼트의 신형이 엎드린 니마스를 지나쳐 그대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하지만 아까까지만 해도 당당하던 니마스도 그 앞에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실제로 니마스와 마왕 발리노스의 격은 너무도 까마득해서 마계에서는 서로 마주칠 일도 없는 존재였다.

브리먼이 잽싸게 일어나 헐벗은 루퍼트의 몸 위에 가운을 걸쳐 주었다.

그러면서 브리먼은 침을 꿀꺽 삼켰다. 가까이서 보니 마왕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언뜻 보면 생전의 루퍼트와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도리어 그의 강함을 입증해 주는 셈이었다.

하급 악마일수록 소환됐을 때 마기를 숨기지 못했고, 악마 본체의 잔상을 남기곤 했다.

그래서 니마스만 해도 클로에의 얼굴은 유지했지만, 눈동자는 새빨갛게 변해 있었고, 옷 아래 감춰 둔 피부는 검푸른 색을 띠고 있었다.

마왕은 뒤를 돌아보며 흘끔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순간 오싹했지만, 익숙한 얼굴이라 또한 겁에 질리진 않았다.

겉모습보다 마기에 더 반응하는 진짜 악마종 니마스보다, 지금은 오히려 브리먼 자신이 유리했다.

“시장하실 텐데, 밖으로 나가시지요. 음식을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머리를 조아리는 브리먼을 보며 발리노스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사마엘의 노예야, 이놈을 끌어들이려 꽤나 공을 들였구나.”

“과찬이십니다.”

발리노스는 앞서 계단을 걸어 나가며 지하실을 빠져나갔다.

브리먼은 숲속에 있는 별장에 아지트를 만들어 놓았다.

발리노스가 밖으로 나가자 청명한 아침 햇살이 그의 금발 머리와 푸른 눈동자, 다부진 어깨 위를 비춰 주었다. 오히려 루퍼트가 그 자신이었을 때보다도 훨씬 생기 있어 보였다.

‘과연, 겉으로 봐서는 마왕이 아니라 천사가 강림한 것 같군.’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브리먼은 그렇게 자신의 할 일을 하기 위해 돌아서려 했다.

“잠깐.”

루퍼트의 목소리를 한 발리노스가 그를 불러 세웠다. 말투까지 흡사하여, 브리먼은 내내 소름이 돋았다.

“말씀하십시오.”

“에린 스필렛이 누구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