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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91)화 (91/129)

91화

그런 놀라움이 익숙한 듯, 그녀는 나를 소파에 앉게 했다. 그리고 말없이 차를 준비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집 안을 잠시 관찰했다. 안은 여기저기 성물이 걸려 있다는 걸 빼고는 일반적인 가정집 같은 분위기였다.

차를 가져오는 크리스티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어떤 게 진짜 모습이냐는 거지?”

“네.”

크리스티나는 맞은편 소파에 앉아 나를 빤히 쳐다봤다. 분명히 젊은 여자의 얼굴이었지만, 보는 시선에서는 긴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당연히 밖의 모습이 진짜다. 나이 구십 넘게 먹고 이 모습이라면 정상이 아닌 거지.”

신녀는 한숨 쉬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름다웠다. 여자인 나조차 멍하니 보고 있을 만큼.

“왜 모습이 달라지는 건가요?”

“나도 잘은 모르지만, 신전의 건물 안에 들어오면 여신의 가호가 강해진다고 하더구나. 그나저나 너에게서는 특별한 힘이 느껴지는데, 신녀가 되고 싶어서 온 거냐?”

특별한 검증도 필요 없이 크리스티나는 단번에 나의 능력을 알아보았다.

“아니요, 신녀가 되고 싶진 않아요.”

크리스티나는 별다른 말 없이 나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신녀의 힘을 사용할 일이 생겼어요. 마왕이…….”

“네가 굳이 신녀가 되지 않아도, 마왕을 잡을 방법은 있다.”

“어떤 방법인가요?”

“콜록, 콜록. 신관과 무관이 함께 나가 성수를 몸에 뒤집어쓰고 마왕을 물리치는 거지. 성수와 축복이 있으면 어쨌거나 힘이 통하니까.”

크리스티나는 연신 잔기침을 하며 홀짝 차를 들이켰다. 겉은 젊었지만, 속은 노인인 것 같았다.

“물론 이 과정에서 양쪽의 희생은 불가피하다. 군대를 동원해야 하고, 마왕이 강림한 본체는 죽음을 맞이할 테지. 마왕을 상대한 군대도 괴멸될 거고.”

담담하게 말하는 그녀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피 흘리며 죽어 가는 루퍼트와 병사들을 떠올렸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신녀의 힘을 사용하면 뭔가 다른가요?”

“넌 정화의 능력을 갖고 태어났을 거다.”

신탁을 받은 신녀의 예상은 놀라웠다. 나는 용한 점쟁이 앞에 있는 기분이 되었지만, 크리스티나 신녀의 표정은 담담했다.

“마왕이 강림하면 으레 함께 나타나곤 했었으니까, 콜록, 콜록.”

“신녀님, 괜찮으세요?”

그녀는 괜찮다는 표시로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정화의 힘이 담긴 무기는 강림한 신체의 손상을 최소화하고 악을 정화할 수 있다. 그 옛날 리케포로스 황제와 최초의 신녀가 함께 마왕을 물리쳤던 방법이다.”

나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내가 신녀가 되면 루퍼트를 살릴 수도 있다. 이게 내가 이 세계에 온 이유였을까?

“하지만 겨우 그런 것으로 신녀가 되기에는 모자라지 않겠니. 이 삶은 결코 녹록지 않아.”

기침을 하며 붉어진 눈동자에는 회한이 가득 담겨 있었다.

“어린 날 배고픔을 참지 못해 찾아온 걸 지금까지 후회하고 있다. 평범한 삶은 꿈도 꿀 수 없지. 나도 그 녀석만 아니었더라면…….”

동의했다. 더군다나 나는 지금 이혼하려는 망나니 남편이 마왕이 됐다. 마왕이 된 게 내 탓도 아니고, 그를 위해 이 삶을 희생하는 건 말도 안 된다. 하지만 혹시나 싶어 말을 꺼냈다.

“신녀의 의무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한 가지 있다고 들었어요.”

크리스티나는 미간을 미미하게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하나 있지만 그건 내 의지대로 되는 일은 아니다.”

“그게 뭔가요?”

“그 옛날 마왕을 물리쳤던 건 대마법사의 일행과 여신의 가호를 받은 신녀였다. 그 둘은 마왕을 퇴치한 후, 결혼을 했다.”

“신녀와 초대 황제가 결혼을 했다고요?”

처음 들어 보는 이야기였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그녀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었다. 하지만 간간이 터져 나오는 기침 때문에 계속 말이 끊어졌다.

“물론…… 콜록, 그런 일은 단 한 번뿐이었어. 어쨌거나 단 한 번이지만, 그건 역사적인 사실이다, 콜록, 콜록.”

나는 그녀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리고 에녹이 마차에서 그토록 말하기를 머뭇거렸던 이유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신녀님, 힘들어 보이세요.”

나는 그녀의 곁에 앉았다. 희고 가느다란 그녀의 손 위로 내 손을 겹쳐 잡았다. 그러자 무언가 흘러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가팔랐던 크리스티나의 호흡이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나는 나의 운명을 알고 있어. 나는 얼마 남지 않았지. 그래도 덕분에 조금은 편해졌구나.”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녀의 모습은 조금도 슬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후련해 보였다.

그렇게 고요한 눈으로 그녀가 나를 보았고, 나는 머뭇거리며 마지막 확신을 위해 입을 열었다.

“리케포로스 황실의 핏줄과 결혼을 하면 신녀의 운명을 벗어날 수 있는 건가요?”

내 질문에 그녀의 동공이 잠시 흔들리는가 싶더니 눈가가 은은하게 휘어졌다.

“그래, 둘은 같은 격을 지녔으니까 그 정도는 돼야 여신이 놓아줄 거다. 하지만 너는 지금 마왕이 된 녀석을 사랑하지 않았더냐. 어찌나 시끄러운지 여기까지 들려오더구나. 지금의 황태자는…….”

“신녀님.”

신전은 아무래도 바깥세상의 소식에 늦은 모양이다. 나는 그녀를 보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사실 속내는 아주 복잡했다.

‘……에녹과 결혼을 해야 한다니.’

***

“신녀와 대신관은 동급이다. 그러니 저놈의 말에 휘둘릴 필요 없다.”

다시 노파가 된 크리스티나 신녀가 후원으로 나와 대신관을 가리키며 말했다. 대신관은 곤란한 얼굴이었다.

“이야기는 나누셨습니까, 이분이 정말 신녀님입니까.”

“네 놈의 눈은 장식이더냐? 그만큼 신성력을 쌓아 놓고 남에게 그것을 물어?”

눈으로 보기에는 대신관도 나이가 지긋해 보였다.

크리스티나 신녀는 다른 사람에게보다도 대신관에게 유독 쌀쌀맞은 느낌이었다.

“어찌 제가 신녀님께 비하겠습니까. 바깥 공기가 찹니다. 이제 그만 들어가서 좀 쉬시지요. 약을 지어 올리겠습니다.”

“대체 언제까지 이 노인네를 부려 먹으려는 건지…….”

신녀는 툴툴거리다 흘끔 후원의 텃밭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허리가 아파서 따지도 못하겠군. 네놈 필요한 만큼 가져가든지.”

그렇게 대신관을 일별한 후, 신녀는 콜록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대신관이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녀가 들어간 곳을 바라보았다.

“백작, 안에서 신녀님의 모습을 뵈었겠군요.”

“네, 뵈었어요.”

“여전히 그분은…….”

그 시선 속에서 나는 희미한 열기와 그리움을 볼 수 있었다.

“정말 아름다우셨어요.”

그 말에 대신관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리고 부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러니 선대 황제 폐하께서도 한눈에 반해 청혼하신 거겠죠.”

“네?”

나는 그의 말에 눈을 깜빡였다. 아까 안에서 크리스티나 신녀는 황실과 인연이 없다는 듯이 말했다.

“신녀님이 거절하셨지만요.”

그리고 크리스티나 신녀는 이 신녀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했다. 그런데 왜, 그녀는 선대 황제의 손을 잡지 않은 거지? 혹시 황후가 되고 싶지 않았던 걸까?

그때 안토니오 신관이 텃밭에서 키운 열매들을 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까 내가 맛보았던 열매였다.

“저건 뭔가요?”

“제가 젊을 때부터 불안증과 불면증이 심했습니다. 저건 진정 수면 효과가 있는 열매인데, 여신의 열매라 하여 신녀님만이 재배할 수 있는 식물입니다.”

대신관이 열매가 맺힌 식물들을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만하셔도 괜찮은 것을…… 몸도 안 좋으신데.”

그를 보며 나는 한 가지 가설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 신녀가 이곳에 남은 까닭은 혹시, 이 사람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그 때문에 확실하게 느꼈던 건, 역시 나는 신녀로서 살아갈 수 없을 것이란 사실이었다. 이곳에는 나를 일생 동안 붙잡아 놓을 무언가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신녀가 되지 않으면, 엄청난 희생이 뒤따른다고 한다. 나는 일단은 침묵하며 대신관의 뒤를 따라갔다.

당연하게도 나는 남은 신녀의 검증 절차를 간단히 통과했다.

안토니오 신관의 진술과 함께 마물의 피를 눈앞에서 정화해 보였다.

그러자 대신관을 제외한 주위의 신관들이 하나같이 내게 무릎을 꿇었고, 대신관은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새로운 신녀님을 뵙습니다.”

대신관이 성물로 내 앞에 성수를 뿌리며 짧게 기도를 하자, 갑자기 몸 안에 무언가가 넘실거렸다.

“느껴지십니까. 그게 당신에게 잠재되어 있는 신성력입니다.”

“정말로 내가…….”

나에게 그런 힘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외부에서 온 내가 정말 신녀일 줄은 몰랐다.

그리고 놀라웠던 건, 에녹의 말이 아예 틀린 건 아니라는 점이었다. 신성력이 움직이자 함께 경건한 마음이 용솟음쳤다.

여신 앞에서 절로 머리를 숙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딱 거기까지였다.

‘그래도 여기서 평생 살고 싶지 않아. 열 시간씩 기도하고 싶지도 않고. 하지만…… 에녹과 결혼이라니.’

생각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이게 어디 혼자 생각만으로 될 일이던가.

대신관이 나를 신녀로서 인정하는 자리, 나는 그들의 인사를 받으면서도 눈으로 에녹을 찾았다. 그는 아까 사라진 이후부터 통 보이지 않았다.

“저, 대신관님. 황태자 전하는…….”

“전하께서는 성물을 보러 가셨습니다. 그곳으로 가 보시겠습니까.”

“아, 제가 가도 되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이제 이곳이 신녀님의 집이니까요.”

“아직, 아직은 아니에요.”

나의 반박을 대신관은 지적하지 않았다.

신녀로서의 자질은 분명히 있었지만, 그 힘을 진짜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의식을 거쳐야 한다고 했다.

그 전까지 이 신성력은 간헐적으로 발휘될 뿐, 마왕을 죽이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의식을 거치면 정말로 내 운명은 신녀로서 고정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직까지는 나에게 도망칠 기회가 있었다.

신관의 안내에 따라 신전의 복도를 거닐면서 생각했다.

‘신녀가 되고 싶진 않아.’

그런데 내가 왜 그 밉상 루퍼트를 구해야 하는가, 에 대한 생각.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었지만, 그것을 선뜻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신전 지하에 있는 커다란 문이 열렸고, 그곳에 에녹이 있었다.

“전하.”

내 부름에 에녹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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