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대신관은 나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말씀대로 정말 성물이나 성수 없이 정화의 능력을 행하신다면…….”
그는 말끝을 흐리더니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결과를 보고 말씀드리죠.”
“예, 알겠습니다.”
나는 순순히 그의 뜻에 따랐고, 에녹이 그런 나를 보더니 다급히 황제를 불렀다.
“폐하, 저도.”
“미리 약속된 일이니 함께 가거라.”
우리는 그 길로 대신관의 뒤를 따랐다. 다행히 에녹과 내가 한 마차에 탔고, 대신관은 자신이 타고 온 신전의 마차를 타고 가게 되었다.
나는 타자마자 다급히 그에게 물었다.
“전하, 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알고 계시는 거죠?”
“백작, 말씀드리지요. 신녀는 신전에 귀속되는 존재입니다. 특히나 정화의 능력을 가진 신녀라면 신전에서 놓치지 않으려고 할 겁니다.”
“네, 저번에 그렇게 말씀하셨죠. 하지만 벗어나는 방법이 있다면서요.”
아까 방에서 에녹과 거기까지 이야기하고는 불려가는 바람에 그 방법에 대해 듣지 못했다.
“……있긴 하지만.”
술술 알려 줄 것 같던 에녹이 갑자기 답답하게 굴었다. 신전에 도착하기 전엔 이야기를 마쳐야 하는데, 갑자기 왜 그러는 거지?
초조한 기색으로 그를 보니, 어쩐지 에녹의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전하?”
“그…….”
에녹이 갑자기 붉어진 자신의 얼굴과 목덜미를 손으로 문질렀다. 답답한 마음에 한 번 더 재촉하자, 그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결혼으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신녀는 결혼을 못 하는 거 아닌가요? 그렇게 따지면 저는 지금 결혼한 상태인걸요. 물론 이혼 소송 중이지만요.”
“일반적인 결혼으로는 안 됩니다.”
“일반적이지 않은 결혼은 뭔데요? 하지만 전 이제 또 결혼할 생각이 없는데…….”
이제 막 이혼하려 하는데, 또 결혼이라니. 솔직히 별로, 아니 전혀 내키지 않았다.
내가 눈을 깜빡거리며 에녹을 보았다. 에녹은 손가락으로 마차의 창문 위를 툭툭 두드리며 내 눈을 피했다.
“지금 루퍼트의 몸에 마왕이 들어가 있는 상황에서 대신관이 백작을 신녀로서 인정한다면…… 소송 없이도 이혼은 성립될 겁니다. 아니, 그전에 했던 결혼이 무효가 되겠죠.”
에녹은 손바닥으로 턱을 괸 채 조금은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고개는 밖을 보고 있으면서도, 시선은 한 번씩 나를 보았다.
“……그럼 잘된 거 아닌가요? 아, 아닌가.”
그렇게 이혼은 성립되지만, 신녀로서의 삶을 강요받겠지.
“신녀는 어떤 일을 하나요? 어떻게 살게 되죠?”
“제가 아는 바에 의하면,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신전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습니다. 하루 열 시간 이상을 기도로 보내며……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헉, 안 돼. 에녹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나는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전하 도와주세요. 전 그렇게 못 살아요.”
참고로 난 여기 오기 전에도 무교였고, 지금도 신앙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런 생활은 아마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백작은 방금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왜인지 몰라도 에녹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그의 말에 나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말 그 일반적이지 않다는 ‘결혼’ 뿐이에요? 벗어나는 방법이? 따르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건데요, 도망간다든지…….”
“듣기로는 여신의 신전에서 신녀로서 점지되면, 충만한 신앙심으로 인해 도망갈 마음이 들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망간다면…….”
나는 다음 말을 기다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여신의 명을 거역한 죄로 얼마 가지 않아 절명하게 된다는군요. 물론 그 전에 신전에서 잡아 가두겠지만요.”
“그건 완전히 죄인 취급하는 거잖아요. 무슨 신녀가 그래요.”
“애초에 도망간 신녀가 없었습니다. 신전 안에서 신녀의 삶은 풍요롭고 안락하다고 합니다. 하루 열 시간 동안 하는 기도도 어차피 그들이 마음에서 우러나 하는 것이고…… 물론, 그게 다 진실은 아니겠지만.”
에녹은 태연하게 말하다 피식 웃었다. 듣고 보니 이 사람이 나보고 신녀가 되라 설득하는 건지, 그러지 않게 도와주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아무튼 신앙심이 솟구쳐서 그 생활을 오히려 기쁘게 받아들인다는 건가? 그럼 괜찮은…… 괜찮을 리가.
“아아, 안 돼. 그럼 내가 계획했던 화려한 싱글 라이프는…….”
내 혼잣말을 들은 에녹이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화려한 싱글 라이프? 예를 들면?”
에녹의 말이 갑자기 짧아졌다.
“그야, 잘생긴 남자들과 연애하려고……!”
나는 나도 모르게 본심을 뱉어 버렸다. 이 세계는 미혼자보다 기혼자의 연애가 자유로웠다. 하지만 기혼자보다 더 거리낌 없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것은 기혼이었던 사람들.
“잘생긴 남자……들?”
에녹이 내 말을 따라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아차 싶었다.
에녹은 어쨌든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데, 이런 말은 좀 상처가 되지 않을까?
내 예상은 적중했다.
에녹은 내가 그 말을 하자마자, 아예 나를 일별한 후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저기, 전하. 그러니까…… 제 말은.”
내가 그를 달래 보려 시도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신녀의 운명에서 벗어날 방법도 알려 주지 않았다.
그리고 마차에서 내릴 때 심지어 이런 말도 했다.
“여신의 축복 안에서 평안하시길, 예비 신녀님.”
안 돼, 그것만은.
***
에녹은 마차에서 내리는 나를 잡아 준 후에, 혼자 앞서 걸어가 버렸다. 성큼성큼 걷는 걸음이 얼마나 빠른지, 내가 뛰어야 겨우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전하……!”
그렇게 뛰어가 그를 잡으려는데, 뒤쪽에서 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은 정숙을 요하는 장소입니다. 소리를 낮추고 몸가짐을 가지런히 하시지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신관들이 마중 나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대신관이 가까이 오자 허리를 숙였다.
에녹은 이미 혼자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점점 마음이 불안해졌다.
“이쪽으로 따라오시죠.”
대신관은 내게 시선을 한 번 둔 후 앞서 걸었다. 걷는 방향은 에녹과 달랐다.
나는 대신관 뒤를 따라 걸으며 신전의 내부를 둘러보았다. 엄청나게 높은 천장과, 그 천장을 받치고 있는 새하얀 기둥. 천장 곳곳에는 둥근 홀이 있었고 그곳에서 새하얀 빛이 쏟아졌다.
“저, 어디로…….”
“먼저 크리스티나 신녀님을 뵈러 갈 겁니다, 그 후에 신녀님과 함께 검증을 시작하는 거지요.”
대신관은 내 질문에 성실히 답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의 어투가 낮게 가라앉았다.
“크리스티나 신녀님은 올해로 아흔 아홉 살이 되십니다. 아주 오랜 세월을 이 신전 안에서 보내셨지요.”
그의 말투에는 어떤 경이로움과 자랑스러움이 묻어나왔다. 하지만 나는 반대로 그 말에 등골이 오싹했다. 어쩌면 내 미래…… 안 되지, 안 돼.
이 세계까지 와서 그렇게 살 순 없어. 마음을 다잡으며 따라가다 보니, 신전의 후문 같은 곳으로 가고 있었다. 신전 뒤쪽으로 후원이 있었고, 그 후원을 지나 보니 작은 오솔길이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건가요? 신녀님을 뵈러 간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맞습니다.”
“하지만 신녀님은 신전을 벗어날 수 없다고 들었는데요.”
앞서 걷던 대신관이 멈춰 서더니 내 뒤를 바라보았다. 나도 동시에 뒤를 보았고, 거대한 크기의 새하얀 건물이 우뚝 솟아 있었다.
대신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신전이라는 건 단지 건물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신관과 신녀가 머무는 곳이라면 어디든 신전이 될 수 있지요.”
“아……? 그럼 어디든.”
“이 숲속에서라면 말이죠.”
역시 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 한다. 아무래도 신전 뒤에 있는 이 숲까지도 신전의 영역인가 보다.
오솔길을 따라 쭉 걸어가 보니, 아담한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을 지키고 있던 신관 하나가 묵례를 했다. 나도 안면이 있는 신관이었고, 그와 눈인사를 했다.
“좀 어떠신가.”
대신관의 질문에 안토니오 신관이 씁쓸한 웃음과 함께 집의 뒤쪽을 가리켰다.
그쪽으로 가보니 자그마한 체구의 노파가 텃밭에 물을 주고 있었다. 물통을 드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지만, 그녀의 표정만큼은 편안했다.
“크리스티나 신녀님.”
안토니오 신관이 먼저 나서 그녀를 불렀다. 그러자 크리스티나 신녀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내 병은 내가 알아서 한다고 하지 않았나. 언제까지 사람 귀찮게…….”
신녀는 홱 돌아보다 뜻밖의 인물들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대신관을 향해 인상을 찌푸렸다.
“네놈은 또 무슨 일이야.”
괜히 왔나,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나까지 왠지 주눅이 들었다. 언뜻 상상했던 신녀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마치 어느 시골 동네에 사는 걸걸한 할머니의 모습이랄까.
“신녀님, 이분을 한번 봐 주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대신관은 그런 그녀의 태도가 익숙한 듯 웃음 지으며 뒤에 있던 나를 밀어 보였다.
나는 당황했지만, 어쨌든 예법에 맞게 인사하려 했다.
“안녕하세요, 크리스티나 신녀님. 저는…….”
“인사는 됐다.”
크리스티나 신녀는 어떤 열매 같은 것을 주섬주섬 따더니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뭔가 말하기도 전에 빨간 열매를 입에 쏙 넣어 주었다. 달콤한 맛이 입 안에 가득 퍼졌다. 긴장했던 어깨에 스르륵 힘이 풀렸다.
“어떠냐?”
“달아요, 맛있고.”
“그렇지? 누구 입으로 들어가기엔 아까운 열매지.”
신녀는 그렇게 말하며 내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잡은 손은 노인의 손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곱고 부드러웠다. 대신관이 따라오려 하자 그녀는 눈을 부라리며 그의 출입을 막았다.
“어딜!”
그렇게 들어가자마자 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내 손을 잡고 앞서 들어간 크리스티나 신녀가 돌아보자, 노파였던 그녀의 모습은 새카만 머리의 젊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