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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88)화 (88/129)

88화

‘결국 소송으로 가야 하는 건가.’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쓰다듬으며, 황태자 보좌관인 리암에게 소개받은 변호사를 마주 보고 앉았다.

한쪽 팔에 붕대를 칭칭 감은 데이먼도 내 뒤에 있었다. 괜찮다고 했지만 그는 구태여 따라나섰다.

“스티븐스 자작님.”

“어서 오세요, 스필렛 백작님.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제 이야기를요?”

론 스티븐스 자작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내가 작성해 온 서류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솔직히 좀 민망했다.

합의 단계와 달리 소송 단계에서는 이혼을 원하는 이유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놔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사교계에 불필요한 잡음과 소문이 퍼지는 건 감내해야만 했다.

“하긴, 유명했겠죠.”

싫다는 남자를 억지로 끌어다 결혼한 에린이나, 그런 결혼 후에도 클로에를 애인으로 끼고 다니는 루퍼트나,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기 딱 좋은 소재였다.

“그래도 진짜 이혼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보통은 생각만 하지,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귀부인은 별로 없거든요.”

“그렇군요.”

이 세계에서 불륜은 통상적으로 이혼의 이유로 치지 않았다. 너무 빈번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사랑으로 맺어진 부부가 아닌 경우가 많았고, 귀족들의 이혼은 작위며 재산 관계, 갖가지 추문에 얽힐 위험 때문에 그냥 참고 살거나 맞바람을 피우는 것으로 해소했다.

물론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그렇다고 해서 불륜을 바람직하다 여기는 건 결코 아니었다. 그것도 정도라는 게 있다.

“으음, 연인을 집 안으로 데리고 왔다. 이건 사유가 될 수 있겠네요.”

각자 애인을 끼고 아침밥 먹는 집은 서로가 그러기로 합의한 경우였고, 이렇게 일방적인 불륜의 경우라면 애인을 집 안에 데리고 오는 건 명백히 실례이긴 했다.

“둘 사이에 아이는 있던가요?”

“둘이라면.”

“아, 클리포드 공작과 앤드론 백작 영애 사이에 말입니다.”

“아뇨, 없는 거로 아는데요.”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래도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스티븐스 자작의 의견이었다.

“외도만으로 부족하다고요?”

“사랑보다는 신앙이 우선이니까요. 대신관 앞에서 혼인 서약하지 않으셨습니까.”

신 앞에서 서약해 놓고 불륜을 한 게 오히려 큰 죄가 아닌가?

그것도 외도 자체만으로는 사유가 안 되고, 동거를 넘어서 사생아쯤은 있어야 부족하나마 사유가 된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다른 사유는 없습니까?”

결국 귀족들의 이해관계, 일반적으로 이혼하는 이유들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것들은 보통 정치, 경제적인 이유였다.

이것도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된다. 그럼 정치, 경제적인 이유가 신앙보다 우선이고, 사랑은 신앙보다 후순위고?

내 견해가 어찌 되었든 간에 이 세계가 그렇다는데 어쩌겠는가. 나는 손끝을 만지작거리다, 한숨을 쉬다 고민 끝에 다시 털어놓았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소송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비밀로 해 주세요.”

“의뢰인의 일은 절대 발설하지 않습니다. 걱정 마세요.”

리암이 자신 있게 소개한 사람이었으니, 나도 믿기로 했다. 설사 그가 발설한다고 해도, 시기의 문제일 뿐 결국은 퍼질 이야기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이혼 합의서에 서명을 받기 위해 갔던 날, 그에게 목이 졸렸던 일, 그리고 마차에서 그가 했던 이야기를 말해 주었다.

내 말에는 그때 곁에 있었던 데이먼이 증언을 덧붙여 줬다.

“정치적인 입장이 서로 달라졌어요.”

“정말입니까? 클리포드 공작이? 아, 너무 흥분했군요. 실례합니다.”

스티븐스 자작은 전통적인 황태자 지지 가문인 클리포드 공작이 브리먼 황자를 지지할 수도 있다는 발언을 한 것에 대해 놀라움을 표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수첩에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황태자 전하는 이 일을 아십니까?”

“아마도…….”

“그럼 이혼이 문제가 아니겠군요, 제국이 흔들릴 수도 있는 일이에요.”

“그래서 보안 유지를 부탁드린 거예요. 뭔가 확실해질 때까지는.”

스티븐스는 고개를 연신 끄덕거렸다.

나는 그에게 말하면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루퍼트의 모습을 떠올렸다. 불안정하고, 두려워 보였던 모습.

이혼하려는 상대에 대해 떠올리는 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지만, 그 모습을 보고 나면 누구나 걱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괜찮은 걸까.’

나는 괜스레 창문 밖을 바라보다, 오싹해지는 기분을 느껴 양쪽 팔을 쓰다듬었다.

***

에녹은 두 주먹을 꽉 쥔 채, 알현실 상석에 앉은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에녹이 제출한 마법 거울을 살펴보는 중이었다. 굳게 다문 그의 입술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틀림없구나. 이것을 가져온 건?”

“제 직속 기사단 수하인 테리언 자작입니다.”

황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거울 속을 몇 번이나 들여다봤다.

“하나는 브리먼이 틀림없구나.”

황제는 그 즉시 황실기사단장을 호출하여, 황자궁으로 달려갈 것을 지시했다. 가서 브리먼이 있으면 잡아 오고, 없더라도 궁을 뒤지라고 명령했다.

“황자궁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말라 했거늘, 그 녀석이 궁을 벗어났다는 보고는 듣지 못했는데.”

“아마 황자궁에 있는 사람들도 세뇌당했거나, 그렇지 않다면 흑마법으로 눈속임을 썼을 겁니다.”

황제가 혀를 차며 중얼거리자 에녹이 그의 말에 대답하면서, 브리먼이 흑마법에 연루되었다는 증거품들을 하나하나 꺼내 놓았다.

그 와중에 에녹의 표정은 착잡해 보였다. 황제는 짐작한다는 듯이 에녹을 바라보았다.

“이 거울에 비친 거로 봐서는 루퍼트도 이미 상당 기간 동안 오염에 노출된 모양이구나.”

“아마도, 그럴 겁니다.”

“루퍼트를 이대로 버릴 셈이냐?”

“…….”

황제의 질문에 에녹은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황제는 목소리를 더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추궁하는 것이 아니다. 루퍼트는 네가 황제가 되었을 때 골라 쓸 신하이니, 네 판단에 따라 행동하면 된다.”

“폐하, 저는…….”

그때였다. 황자궁에 갔었던 기사단장과 수하들이 도착했다.

“폐하! 황자궁에 다녀왔습니다.”

문이 열리고 황제가 보낸 기사단장이 도착했다. 기사단장의 손에는 다량의 부적과 헝겊으로 만들어진 인형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는 그것들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게 뭐지?”

“황자궁에서 나온 물건입니다.”

황제와 황태자가 동시에 바닥에 있는 물건으로 다가가 살펴보았다.

“황자궁 소속의 궁인들에게 물어보니, 그들은 황자가 궁을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아예 모르고 있었습니다. 몇몇은 바로 오늘 아침에도 봤다고 했습니다.”

“환영술입니다.”

에녹이 헝겊 인형을 집어 들었다. 인형 속을 파헤치자 그 안에도 부적이 들어 있었다.

황제의 얼굴이 흑빛으로 변하며 착잡하게 굳어 갔다.

“제국의 황자가 흑마법에 손을 대다니…….”

황제는 안타까운 말투로 중얼거리면서도 한 번씩 이상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브리먼 황자는 출생부터 조금 의심스러웠다.

황제는 일평생 후궁도 없이 메리벨 황후만을 바라본 사람이었다.

황후를 맞이하고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순행 길에서 술에 취해 일어나 보니 자신의 품 안에 다른 여인이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열 달 후, 그 여인은 황제의 핏줄이라며 웬 아기를 품에 안고 찾아왔다.

황제와 같은 검은 머리와 녹빛 눈동자를 갖고 있었고, 황제도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결국 아들로 맞이했다.

하지만 아이만 황후의 양자로 들였을 뿐, 그 여인을 후궁으로 들이지는 않았다.

아기는 처음에는 전혀 마법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하지만 에녹이 태어나고 뛰어난 재능을 보일 무렵부터 조금씩 마법 능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럼 그게 흑마법이었던 건가.”

제국 황손 중 한 대에 한 명만 나타나는 마법 능력이 두 명에게서 나타났을 때, 제국은 발칵 뒤집어졌다.

그때부터 물밑에서만 나뉘어 있던 귀족 세력이 갈라지면서 국론이 분열됐다.

그러던 중, 밖에서 시종 하나가 급하게 달려왔다.

“폐하!”

“무슨 일이냐.”

“신전에서 급하게 전갈이 왔습니다. 마, 마왕이 강림했다고 합니다!”

황제와 에녹의 눈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비상 회의를, 아니, 아니지.”

마왕이 강림한 게 사실이라면, 일반적으로 군사를 보내 전쟁을 치를 일이 아니었다.

“먼저 대신관을 들라고 해라.”

시종이 다시 뛰어나간 후, 황제는 에녹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마음은 정했느냐.”

잠시 침묵하던 에녹이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느리게 감았다 뜨더니 입을 열었다.

“예, 정했습니다.”

***

몇 시간 후, 대신관이 황제 앞에 도착했다.

법으로는 대신관과 황제가 동급이라 명해 놨지만, 실제 서열은 황제 아래 있었다.

애초에 여러 신관 중 대신관을 임명하는 것부터가 황제의 권한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황제가 자신이 임명한 대신관을 신하 대하듯이 명령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폐하, 부르셨습니까.”

“마왕이 강림했다는 게 사실인가.”

황제는 서두를 자르고 본론부터 말했다.

“그렇습니다, 크리스티나 신녀님께서 신탁을 받으셨습니다.”

“신탁이라.”

“예, 하지만 신탁을 전달해 주시고는 기력이 다해 곧 쓰러지셨습니다.”

황제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크리스티나 신녀님도 이제 연세가 많으시지. 그래서 대신관, 마왕전에 대해 아는 바가 있는가?”

“책에서 본 적 있습니다.”

“책이라…… 하긴, 우리 세대에 누가 그것을 경험했겠는가.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자네는 태연한 것 같군.”

그러자 대신관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역사에 기록된 마왕 강림은 딱 두 번입니다. 한번은 제국이 세워지기도 전 머나먼 옛날이었고, 그다음은 제국이 탄생한 그 시점에 있었죠.”

“제국이 탄생한 것 자체가 마왕 때문이었지. 그를 상대하기 위해 흩어졌던 세력을 모으고…….”

“초대 리케포로스 황제께서 나타나 무찌르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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