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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87)화 (87/129)

87화

“헉, 헉, 허억…….”

루퍼트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기분에 쉴 새 없이 달렸다. 그러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폐가 터질 것 같은 기분에 아무 나무를 잡고 숨을 골랐다.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루퍼트는 자신의 손을 펼쳐 혐오스럽게 바라보았다.

“내가, 에린을…….”

결국 이혼하겠다는 그녀에게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이성을 잃었다. 아마 그때 조금만 더 힘을 줬다면, 그녀의 가녀린 목은 툭 부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더 미칠 것 같은 건 그 순간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는 것이다.

주먹 쥔 손으로 세게 나무 기둥을 쳤다. 하지만 아무리 쳐 봐도 이 더러운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루퍼트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주위를 살폈다. 달리다 보니 어느새 숲속 깊은 곳까지 들어와 있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길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걸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에린은 이혼에 대한 결심이 확고했다. 마지막으로 에녹을 미끼로 걸어 봤지만, 그녀는 잠시 흔들리는가 싶더니 그래도 넘어가지 않았다.

차라리 흔들리는 모습이라도 보이지 않았으면, 그렇게 화 나지 않았을 텐데.

곱씹어 보다, 자조적인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서 이제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가.’

브리먼 황자는 자신에게 피의 속박을 풀어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결심이 굳어지면 오라고 한 장소가 있었다. 수도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해변이었다.

“멘네시아 해변 20구역…….”

건장한 기사의 걸음이라면 걸어서 가도 하루면 갈 거리였다. 루퍼트는 해를 보며 방향을 가늠해본 뒤, 그쪽으로 몸을 틀었다.

‘속박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렇게 걷다 보니 제대로 된 숲길이 나왔다. 어느덧 꽤 시간이 흘렀는지, 뉘엿뉘엿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루퍼트는 끊임없이 생각하며 걷다, 문득 가던 길을 우뚝 멈췄다.

지금의 루퍼트는 피의 속박 때문에 에녹을 배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떠나서, 정말 자신은 에녹에게 반기를 들고 싶은가?

루퍼트는 그에게 오래전부터 열등감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에린과 얽히고 나서는 질투심까지 더해 더더욱 그가 밉고 싫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가 황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루퍼트도 나름 기사로서, 기사의 신념을 배우고 살아왔다. 에녹 개인에 대한 충성심은 차치하고서라도, 칼릭스 제국에 대한 충성심까지 없진 않았다.

에녹은 칼릭스 제국의 황태자로서, 그리고 차기 황제로서 손색이 없었다.

루퍼트는 길가에 서서 어느 쪽으로도 가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점점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에 열기가 끓어올랐다.

‘안 돼, 또.’

이성을 잃기 전 증상이었다. 루퍼트는 호흡을 고르며 감정을 가다듬으려 했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루퍼트가 바라보는 방향의 길 끝에서 사람 두 명이 걸어 나왔다. 흐릿한 시야로 바라보니 점점 익숙한 얼굴이 가까워졌다.

“클로에…….”

한 명은 클로에였고, 나머지 한 명은 브리먼 황자였다. 어떻게 이들이 여기서 나타난 걸까?

“머저리 같은 놈, 화가 치밀었다면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어야지. 거기서 망설이다니.”

그 말을 내뱉은 건 클로에였다.

루퍼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아는 클로에는 절대로 저런 언사를 내뱉을 인물이 아니었다.

“안타깝게 됐어. 그럼 마법석 광산을 좀 더 쉽게 얻을 수 있었을 텐데.”

브리먼 황자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고, 클로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쉽지만 더 시간을 끌 순 없어. 그 황태자 애송이가 눈치챘으니 본격적으로 방해할 거라고.”

클로에는 아무렇지 않게 브리먼 황자에게 반말을 하며, 손으로 루퍼트를 가리켰다.

“사마엘의 노예야, 이제 제물을 거둬들이자.”

“클로에,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가만히 듣고 있던 루퍼트가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걸어갔다. 본능적으로 허리춤에서 검을 찾았지만, 아까 떨어트리고 와서 갖고 있지 않았다.

클로에는 루퍼트의 질문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고, 대신 브리먼 황자가 나서서 루퍼트 앞에 섰다.

“어떤가, 생각해 봤는가?”

“뭘 말입니까.”

브리먼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루퍼트의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웃음 지었다.

“내게 힘이 되어 달라 제안한 일 말일세. 그럼 자네의 속박을 풀어 준다 했었지.”

푸른 눈동자가 정처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걱정 말게, 자네만 도와주면 돼. 그럼 무조건 우리가 승리할 걸세.”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럼 조금 어렵게 승리하게 되겠지.”

“……그렇게, 승리를 자신합니까?”

루퍼트는 미간을 찌푸리며 브리먼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루퍼트는 사실 간신히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들끓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눈앞의 이들을 죽이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앞에서 브리먼이 손을 휘휘 저어 보였다.

“그렇다네. 후후, 자네 많이 힘들어 보이는군.”

“무슨…… 말을.”

그때 팔짱 낀 채 뒤에서 서 있던 클로에가 유유히 걸어와 루퍼트의 팔 위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 보았다.

“시간 낭비 그만하지. 그나저나 아주 튼튼한 몸이야. 체력도 좋고, 기운도 정순하고. 그래서 그렇게 오랜 시간 애먹은 거겠지만, 그런 만큼 마왕의 제물로는 아주 손색이 없어.”

“……대체 무슨 말이냐니까, 클로에!”

루퍼트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클로에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러자 클로에가 싱긋 미소 짓더니 그가 잡은 손목을 털어 버렸다.

그 간단한 동작에 루퍼트의 몸이 휘청거렸다. 클로에의 가녀린 팔에서 나온 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클로에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양손으로 루퍼트의 어깨를 잡아 내리눌렀다. 그 힘에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 루퍼트의 무릎이 털썩 땅에 닿았다.

“데려가서 시작하자.”

“무리가 될 수도 있어. 아직 완전하게 세뇌되지는 않았거든.”

“상관없어, 절반만이라도. 마왕 발리노스를 소환한다면 인간들 따위는 상대도 되지 않을 테니까. 자, 사마엘의 노예야. 이제 갈 준비를 해.”

브리먼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품 안에서 서둘러 부적을 꺼냈다.

“마……왕……?”

루퍼트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고 벗어나려 했지만, 클로에의 손아귀 힘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브리먼이 손안의 부적을 태우며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자 그들이 서 있는 땅 주위로 검은 문양의 마법진이 그려졌다. 그 마법진에서 일렁거리는 검은 안개가 솟아올랐다.

안개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세 사람을 감싸고 돌며 미친 듯이 회전했다.

그리고 곧 안개가 걷히자, 그들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숲 안쪽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검은 복면인이 화들짝 놀라며, 거울처럼 생긴 도구를 살펴보았다. 낮에 황태자가 건네준 물건이었다.

그 거울의 표면은 마법석으로 되어 있었고, 거울에 비친 장면을 다시 거울 위에 그려내는 마법이 새겨져 있었다.

아주 유용한 마법 도구였지만 값이 아주 비쌌고, 세 번 정도 사용하면 그 수명을 다했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일에서만 사용되곤 했다.

복면인은 거울을 조심스럽게 품에 넣어 갈무리하고는 황궁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저 잡스러운 흑마법사들의 장난이라 여겼었는데…… 마왕 소환이라니. 게다가 그 여자는 분명히…….”

웬만한 일에는 도가 튼 그였지만, 지금 본 장면은 모골이 송연할 지경이었다.

***

한동안 기절해 있던 루퍼트가 서서히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그는 바닥에 누운 채로 간신히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어두운 건물 안, 희미한 불빛 몇 개만이 주위를 밝혀 주었다.

그리고 주변을 본 순간, 루퍼트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힘이 그를 바닥으로 짓누르고 있어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검은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 그를 중심으로 원을 그린 채 서 있었다.

그러던 중, 그들 중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클로에의 목소리였다.

“깨어났구나, 인간아. 네가 동의했다면 덜 고통스러웠겠지만, 우리를 원망하지 마렴. 그래도 네 연인이 너를 꽤 잘 인도하여 여기까지 왔구나.”

“무슨…… 무슨 헛소리야, 클로에?”

“그래, 이 아이의 이름이 클로에였지. 루퍼트라고 했나? 네 연인은 나 니바스의 노예였단다.”

그때 브리먼 황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사방이 어두워 어느 방향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니바스, 괜히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닥쳐! 네가 아무리 사마엘 님의 노예라도 그래 봐야 인간이야. 진짜 악마종인 나에게 명령을 하려 들어?”

“악마……라고?”

루퍼트는 누운 채로 중얼거렸고, 지금 오고 가는 대화를 유추해 봤다. 니바스라는 악마는 속칭 ‘환각과 유혹’의 악마로 알려져 있었다.

“흑마법이었나?”

“이제야 알다니, 내내 마물의 피를 마셔 놓고도 눈치 채지 못했구나. 하긴 내 노예가 워낙 차를 잘 끓이긴 했지. 그것밖에 잘하는 게 없기도 했지만.”

니바스가 신이 나서 중얼거리는 동안, 루퍼트를 중심으로 그려진 둥근 마법진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마법진의 빛은 흔히 보던 것과 달리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으……윽.”

그와 동시에 어떤 이물질이 머릿속을 차지하려 하는 것이 똑똑히 느껴졌다.

루퍼트는 점점 밀려드는 엄청난 두통을 고스란히 감내하면서도,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하지만 이미 몸이 마물의 피로 오염되어 있어, 그 무언가는 아주 손쉽게 빠른 속도로 루퍼트를 잠식시켰다.

루퍼트가 안간힘을 쓰고 있는 사이, 클로에의 목소리가 마치 노랫말처럼 흘러 들어왔다.

그리고는 그녀가 다가와 허리를 숙여 루퍼트의 뺨을 쓰다듬었다.

“인간아, 걱정하지 마. 너는 노예 따위가 되는 게 아니니까. 우리들의 왕, 왕 중의 왕, 마왕 발리노스 님 그 자체가 될 테니까. 저항하면 할수록 괴로워질 거야.”

점점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리고 이내, 루퍼트는 깊은 암흑 속에 갇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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