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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85)화 (85/129)

85화

“왜 오라고 한 거예요? 할 이야기가 뭐예요?”

루퍼트가 내게 다가오려 하자, 데이먼이 검집에 꽂힌 검을 그대로 들어 그의 앞을 막아 세웠다. 그러자 루퍼트의 눈빛에 불꽃이 튀었다.

“넌 그때…….”

루퍼트는 그제야 데이먼을 알아봤다. 사냥 대회 때도 루퍼트와 함께 있을 때 데이먼이 말을 걸었었다.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위험하다 판단한 나는 데이먼을 말렸다.

“데이먼, 괜찮아요. 놔두세요.”

“레이디, 조심하세요.”

데이먼은 검집을 거두고 한 걸음 비켜섰다. 루퍼트가 살기 어린 눈빛으로 그를 보는가 싶더니, 한숨을 쉬며 날 보았다.

“호위 기사까지 대동하고 온 거야? 그저 이야기만 하자고 했더니.”

“……이제 늘 함께 다닐 뿐이에요.”

루퍼트는 휘휘 주위를 둘러보더니 내 마차를 가리켰다.

“이야기 좀 하지.”

“그래요.”

타운하우스 안으로 들어가자고 하지 않으니 차라리 다행이었다.

마차에 타기 전, 데이먼이 다시 루퍼트 앞을 가로막았다.

“검은 놓고 타시죠, 클리포드 공작.”

“로젠 백작, 저번에 봤을 땐 애송이였던 것 같은데. 꽤 건방져졌구나.”

“저는 레이디의 안전만을 책임질 뿐입니다.”

루퍼트는 못마땅한 기색이었지만, 어쨌든 검을 풀어 신경질적으로 데이먼에게 건네주었다.

비교적 그가 고분고분하여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루퍼트가 나를 에스코트하고 싶어했지만, 나는 굳이 데이먼을 찾아 그의 손을 잡고 올라갔다.

루퍼트와 내가 마주 보고 앉았고, 데이먼은 일부러 마차의 문을 열어 놓은 채 조금 떨어진 곳에 섰다.

“이제 말해요.”

“이 문은 꼭 열어 놔야 하나?”

“……네, 그게 저도 마음이 편할 것 같네요.”

그러자 루퍼트가 한숨을 푹 쉬더니 갑자기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 모습이 괴로워 보여 의아했다.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요새…… 종종 머리가 아파. 특히 흥분하면.”

왜 그런 거지? 조금 걱정이 되긴 했지만 굳이 티 내진 않았다. 그러다 루퍼트가 아주 조금이라도 희망을 가지면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왜 그렇게 이혼을 서두르는 거지? 어차피 우리 계약 기간은 1년이었고, 그 기간만 채우면 40억 골드는 물론이고 나머지 40억 골드까지 갚아 줄 텐데.”

다행히 루퍼트가 먼저 말을 꺼냈다.

“돈이 생겼는데, 굳이 결혼 생활을 유지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렇게…… 싫었나?”

상처받은 목소리였다. 나는 일부러 그의 얼굴을 보지 않은 채 차갑게 대답했다.

“그래요.”

“……그랬군.”

자조적인 어투로 중얼거리는 그를 흘끔 보며,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작은 위로를 건넸다.

“어차피 우리 결혼은 계약 관계였고, 당신을 더 탓하고 싶진 않아요. 우린 깔끔하게 끝내고 각자 잘살면 돼요.”

어쨌든 이 자리에서 합의하기 위해서는 그가 딴마음 먹지 않도록 잘 달래야 했다. 나는 말투에 신경 쓰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클로에는…… 지금 어디 있나요?”

클로에가 흑마법사라고 알기 전에는, 루퍼트가 그녀와 결혼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것을 권할 수는 없었다.

“클로……에?”

고개 숙이고 있던 루퍼트는 갑자기 번쩍 들어 나를 보더니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그래요, 클로에. 당신도 모르나요?”

“클로에는…… 윽.”

다시 루퍼트가 머리를 감싸며 괴로워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니 단순한 두통이 아닌 것 같았다.

“루퍼트, 루퍼트.”

나는 그의 어깨를 잡고 가볍게 흔들었고, 그는 심호흡을 하며 다시 제정신을 찾았다.

“역시 클로에가 문제였던 거지.”

“네?”

갑자기 루퍼트는 벌떡 일어나더니, 마차 아래로 내려갔다. 나는 그가 뭘 하나 멀뚱히 지켜봤다.

그러자, 루퍼트가 나를 보며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루퍼트, 뭐 하는 거예요?”

저쪽에 있던 데이먼도 조금 놀란 기색으로 루퍼트를 보는 것 같았다.

루퍼트의 푸른 눈동자가 애절하게 나를 향했다.

“제발…… 날 용서해 줄 수 없겠어?”

“무슨 말이에요?”

“클로에를 내보낼게. 아니, 당신이 싫다면 이제 만나지 않을게. 그러니 제발…… 이혼만은 하지 말자.”

나는 순간 당황스러워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나오는 이상 나로서는 최대한 냉정을 유지해야 했다.

“그만 일어나요, 루퍼트. 이런다고 달라질 거 없어요.”

“에린, 에린 스필렛.”

루퍼트는 무릎으로 기어와 마차 입구에 매달리다시피 하며 나에게 사정했다.

“네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내가 멍청하게도 내 마음을 너무 늦게 깨달았어. 너도 이렇게 헤어지면 후회할 거야. 에린, 날 사랑했잖아, 나를 봐.”

나는 그의 말대로 루퍼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강직한 푸른 눈가엔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

그 눈물을 보니 이혼 합의서를 보낸 날의 회한이 떠올랐다. 우리의 첫만남이 달랐더라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루퍼트가 비록 에린에게는 나쁜 남편이었지만, 내가 이혼을 결심한 건 단지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근본적으로 나는 루퍼트를 사랑하지 않았다. 단 한순간도. 아무리 상황이 바뀌고 그와 잘 지내 봐야, 좋은 친구 정도였을 것이다.

정말 에린이었다면, 클로에를 버린다고 말하는 루퍼트에게 정말 많이 흔들렸겠지.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나는 그녀가 아닌데.

“그만해요. 약속대로 당신을 만나러 왔으니, 합의서에 서명해 주세요.”

루퍼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시간을 더 끌면 안 되겠단 생각에 그를 재촉했다.

“제가 보낸 합의서는 어디 있나요? 집 안에 있나요?”

그가 입술을 잘근 깨물며 고개를 끄덕이자, 데이먼이 슬쩍 끼어들었다.

“제가 가져오겠습니다.”

“거기.”

하지만 루퍼트의 묵직한 음성이 그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가만히 있어, 한 발자국만 움직이면 죽여 버릴 테니까.”

데이먼에게 말하는 어투는 가차없었다. 음산하기까지 한 목소리에 이 사람이 방금 나에게 애절하게 매달린 사람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루퍼트.”

내 부름에 답이 없던 루퍼트는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만일 이대로 이혼한다면, 황태자는 무사하지 못할 거야.”

“……무슨, 무슨 말이에요?”

그러자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나를 보는 눈빛에는 간절함이 묻어 나왔지만, 그 뒤에 득실거리는 집착과 분노가 함께 보였다. 그것을 보니 순간 섬뜩했다.

“결혼을 유지한다면 그대로 에녹 드웰 리케포로스의 강력한 지지자가 되어 주겠어. 하지만 반대로 이혼한다면, 나는 그 반대로 행동하겠지.”

“지금…… 반역을 하겠다는 거예요?”

“반역은 황제를 거역할 때 하는 말이야. 지금 에녹은 황제가 아닌 황태자일 뿐이지. 언제든지 폐위될 수 있는.”

“루퍼트……!”

내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자 루퍼트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자신의 말이 먹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실제로 에녹에 관한 이야기는 충격이었다. 막연히 짐작했던 걸 그가 이렇게 직접 말을 꺼낼 줄은 몰랐다.

“어때? 당신은 황태자와 아주 친분이 두터운 거로 아는데. 그를 배신할 거야? 날 잃으면 그 잘나신 황태자라도 아주 타격이 클 텐데.”

“매달리다 안 되니 협박을 하는군요.”

“그건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당신을 잃는 것보다는 내가 비열해지는 게 나으니까.”

잇새에 힘이 들어갔다. 잠시나마 저 사람을 동정했던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확실히 에녹이 위험해질 수 있다고 하니 흔들리기는 했다.

‘미안해요, 전하.’

“그래요, 하지만 황태자 전하가 위험해진다고 해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내 결심은 변하지 않아요. 그러니 루퍼트, 서명해 줘요.”

나는 지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고, 루퍼트는 마치 최종 사형 판결을 받은 죄인처럼 나를 올려다봤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루퍼트가 서서히 일어났다. 나는 그가 드디어 포기하는 줄 알았다.

그렇게 한숨 돌리려는 순간, 갑자기 그가 마차 안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더니 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널 잃느니, 차라리…….”

“루, 루퍼…… 윽……!”

순간 엄청난 압력에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나는 미친 듯이 파닥거렸고, 루퍼트는 이미 눈빛부터가 제정신이 아니었다.

데이먼과 기사들이 달려와 그를 떼어내려 했다. 하지만 좁은 공간이라 여럿이 달려들 수가 없었고, 데이먼은 루퍼트의 힘을 당해 내지 못했다.

데이먼이 검을 뽑아 들어 루퍼트를 베려는 순간, 루퍼트는 뒤로 물러나며 데이먼의 멱살을 잡아 바닥에 패대기쳤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뺏은 검도 들려 있었다.

“윽.”

데이먼이 피 흐르는 팔을 부여잡으며 주저앉았다.

“콜록, 콜록……!”

나는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다음도 문제였다.

루퍼트는 주저앉은 데이먼을 죽일 듯이 발로 찼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는 웃고 있었다. 그 표정이 악마처럼 보여 소름이 돋았다.

“제정신이…… 아니야.”

루퍼트의 엄청난 기세에 황실 기사들은 섣불리 공격하지 못했다. 잘못하다가는 데이먼을 찔러 죽일 것 같았다.

나는 바로 마차에서 뛰어내려 루퍼트를 등 뒤에서 끌어안았다.

“루퍼트, 제발, 그만해요!”

루퍼트는 나를 떼어내려고 거칠게 몸을 흔들었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리고 이내 그가 잠잠해졌다.

“루퍼트?”

나는 팔에 힘을 서서히 풀어냈고, 루퍼트는 힘없이 비틀거리며 검을 땅바닥에 떨어트렸다.

나는 빙 돌아 그의 앞으로 갔다. 그리고 기사들에게 눈짓하여 데이먼을 한쪽으로 옮기게 했다.

루퍼트의 푸른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리며 혼란스러움을 그대로 드러냈다.

“윽, 내, 내가…….”

그의 의지가 아니었던 건가? 혹시 흑마법의 영향이 나타난 걸까?

나는 그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순간, 루퍼트는 몸을 확 뒤로 빼더니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의 눈가가 온통 빨개져 있었다. 마주친 눈동자에서 두려움이 읽혔다.

“루……퍼트.”

그는 대답도 없이 그 길로 어디론가 달아나 버렸다. 나는 그가 사라진 방향을 황망하게 바라보았다. 불길한 느낌에 가슴이 쿵쿵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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