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매끄럽게 호선을 그리는 입술이 눈앞에서 달싹거렸다. 나는 그 장면을 나도 모르게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꾸만 그때 그 상황이 생각이 났다.
“……백작? 듣고 계십니까?”
에녹이 내 눈앞으로 휘휘 손을 내저었다.
“아, 네! 네, 듣, 듣고 있어요……!”
나는 화들짝 놀라 눈을 깜빡거리며 다시 그의 말에 집중하려 애썼다.
그날, 키스한 그날 이후 단둘이 마주한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자꾸 그날 그때로 감각이 되돌아갔다.
“괜찮습니까? 얼굴이 빨갛습니다, 어디 아프신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제가 신전에 가야 된다는 거죠?”
“다행히 시간은 좀 벌었습니다. 당장은 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바쁜 일을 처리하고 갈 시간은 충분합니다.”
그가 하는 말을 듣다가 곰곰이 생각했다.
“바쁜 일…… 이혼 말이죠.”
에녹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루퍼트가 이제 우편물을 받았을 텐데, 아직 아무 소식이 없다.
말이 없는 모습이 걱정됐는지 에녹이 재차 물었다.
“신녀로 살게 될까 걱정하시는 거라면…….”
“아, 그렇죠. 그것도 문제죠.”
간신히 이혼으로 자유를 찾았는데, 신전의 신녀가 되어 버린다면 그것도 문제다. 하지만 왠지 지금 당장은 와 닿지 않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별생각 없이 꺼낸 질문에 에녹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네, 어떻게든 되겠죠. 백작이 신녀로 살 일은 없을 겁니다.”
똑똑똑-
지금은 내 방 안이었다. 에녹과 한참 이야기하는 와중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조심스러우면서도 둔탁한 소리가 꽤나 힘이 센 사람 같았다.
“누구지?”
나는 누군지 모르겠는데, 에녹은 누군가를 예상한 듯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자 반가운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 호위 기사를 자청했던 데이먼 로젠 백작이었다.
“데이먼!”
“레이디, 절 반겨 주시는군요.”
데이먼이 눈웃음을 치며 다가오자, 에녹이 벌떡 일어나더니 한 다섯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를 잡아 세웠다.
“황태자 전하?”
“오늘부터 백작의 호위를 맡을 데이먼 로젠 백작입니다.”
“네? 아, 알아요……. 아무튼 잘 부탁해요.”
굳이 아는 사실을 저렇게 일어나서까지 다시 소개하는 게 이상했지만, 나도 그에게 악수를 청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에녹이 갑자기 데이먼의 앞을 가로막았다.
“호위 기사는 문밖에서 대기하면 되네. 어디 나갈 때나 동행해 주고.”
“저도 호위 기사가 뭘 하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레이디와 방 안에 함께 있으면 더 잘 호위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데이먼은 해맑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렸고, 에녹의 표정은 더욱 무섭게 굳었다. 그는 손으로 문밖을 가리켰다.
“할 이야기가 남아 있으니 나가 있게.”
엄한 분위기였지만 데이먼은 특유의 밝은 표정으로 웃으며, 내 앞에서 우아하게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레이디, 그럼 이제부터 안전은 제게 맡기십시오. 언제나 가까운 곳에 있겠습니다.”
“고마워요, 데이먼.”
에녹은 아예 대놓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밖으로 나서는 데이먼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풋, 전하.”
나는 에녹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그러자 에녹이 멋쩍은 표정으로 얼굴을 붉혔다.
“……티 났습니까?”
“네, 엄청요. 그럴 거면 호위 기사를 청할 때 거절하지 그러셨어요?”
그러자 에녹이 작게 헛기침을 하더니, 내 양 어깨를 살짝 잡아 소파 위에 앉혔다. 그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필요하니 어쩔 수 없지요. 항상 같이 있어 드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까요.”
“그럼…….”
그의 말에 대답하기 위해,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니 또다시 얼굴이 가까워져 있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피해 버렸고, 에녹은 허리 숙인 그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차.’
너무 대놓고 피했나. 꼭 싫어서 피했다기보단, 그냥 데이먼도 밖에 있고, 그날 그건 비록 내가 먼저 했지만 조금 사고와 가까운 것이고, 아직은 좀.
이런저런 생각들로 심란한 사이, 에녹은 다시 아무렇지 않게 물러나 앉았다. 아니,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었다.
할 말이 있다더니 말도 하지 않았고, 나가지도 않았으며, 어색한 분위기 그대로 입을 꾹 다문 채 앉아 있는 것이었다.
방 안의 공기가 왠지 훅 더워졌다.
분명한 건, 이 어색하고 불편한 상황이 어쩐지 그다지 싫지만은 않았다.
나는 손부채질을 하며 괜히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
그리고 얼마 후, 루퍼트로부터 답신이 왔다.
나는 그 봉투 속에 그의 서명이 들어간 이혼 합의서가 있길 바랐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봉투 안에는 짤막한 편지 한 장만이 들어 있었다.
「물어볼 게 있어.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만나 주면 합의해 줄게. 나는 오늘 저녁까지 타운하우스에 있어, 기다릴게. - 루퍼트 클리포드」
갑자기 머리가 아파 왔다. 나는 이마를 짚으며 의자에 기대앉았다.
‘한 번만 더 만나 주면 합의해 준다고? 굳이?’
그럼 반대로 만나지 않으면 합의하지 않겠다는 건가. 합의하지 않으면…… 으아, 두통이야.
정말 지루하고 기나긴 소송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그건 정말 최악이었다.
나는 책상에 놓여 있는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편지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확실히 루퍼트의 필체였고, 인장도 찍혀 있었다.
다행히 짤막한 내용에는 혼자 오라는 말은 없었다.
나는 편지를 들고 황태자 집무실로 갔다. 하지만 에녹은 바쁜지 자리에 없었다.
“어떻게 하지…… 오늘 저녁까지라는데.”
나는 편지지 모서리를 입에 물고 잠시 고민하다가, 내 뒤를 졸졸 따라오던 데이먼과 눈이 마주쳤다.
“아.”
나와 눈이 마주친 데이먼이 먼저 말을 건넸다.
“레이디, 갈 곳이 있으신가요?”
“음…… 네, 클리포드 가의 타운하우스에 갈 일이 생겨서요.”
“그런데 뭘 고민하시는 겁니까?”
“위험할까 봐요.”
데이먼의 눈가에 얼핏 웃음이 서렸다.
“준비하시죠, 밖에 마차를 준비해 놓겠습니다.”
확실히 전에 봤을 때 보다 믿음직한 모습이긴 했다.
하긴, 잠시만 다녀오면 되는데 굳이 에녹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생각해 보니 그렇다, 내가 무엇 때문에 호위 기사를 고용했는데.
둘이 만나게 한다면 그것 역시 나름대로 위험하다. 같이 간다면 루퍼트는 분명히 에녹 때문에 내가 이혼을 청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데이먼이 나가는 걸 보면서 나는 리아를 불렀다. 화려하지 않게, 최대한 간소하고 단정하게 치장을 한 후 그가 준비한 마차 위에 올랐다.
데이먼은 준비성이 철저했다. 내가 위험할까 봐 걱정했기 때문인지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지 않고, 나름 황실 기사단에도 연락을 넣어 인원을 보충했다.
데이먼을 포함해 총 네 명의 기사들이 마차를 호위하며 출발했다. 그것을 보니 조금 더 마음이 놓였다.
출발하기 직전까지도 사실은 조금 고민이었다. 혹시 함정은 아닐까? 클로에도 같이 있을까?
아마 클로에는 나를 죽이고 싶을 것이다.
연적이기도 하지만 마법석 광산을 차지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차례 확인한 결과, 나한테는 그녀의 흑마법도, 세뇌도 통하지 않는다.
나를 납치하던 날 클로에와 브리먼 황자가 함께 있었다면 클로에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루퍼트도 그곳으로 향하던 것을 봤기 때문에, 그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 이 정도 방비는 당연한 것이다. 나는 마차 뒤쪽을 흘끔 봤다.
데이먼도 실력 있는 기사인데다가 나름 방비를 했다고 하니, 흑마법에 그리 쉽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흑마법에 노출된 사람이 쓰는 물리력이었다.
세뇌당한 사람이 주먹이라도 휘두른다면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물론 그 걱정 때문에 데이먼을 데려가는 것이다.
리아에게도 미리 말해 두어 에녹이 돌아오는 대로 내 행선지를 전해 달라고 했다.
‘침착하자, 살던 곳이잖아. 아무리 그래도 루퍼트가 설마 여자를 때리……진 않겠지.’
겉에서 분위기를 보고 영 아니다 싶으면 다시 돌아오기로 했다. 납치 사건이 있은 후 나름 조심스러워졌기 때문이다.
아마 이혼 관련한 일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혼은 이 세계에 온 다음부터 나의 최대 숙원이었다. 최대한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루퍼트가 굳이 만나자고 하는 이유가 뭘까.
뒤늦게 샘솟은 애정을 확인하고자 하는 귀찮은 이유는 아니길 빈다. 조금 더 현실적인 방향으로 생각을 바꿔 보았다.
‘그래, 쪽지.’
나는 이혼 합의서와 함께 40억 골드 수표, 그리고 클로에가 흑마법사라는 쪽지를 보냈다.
그 쪽지의 내용에 대해 물어보려는 걸까? 그럴 가능성도 있다. 나를 믿고 더 자세히 물어볼 수도 있고, 믿을 수 없어서 반박할 수도 있다.
차라리 그런 거라면 마음이 편할지도 모르겠다.
눈을 감고 고민하는 동안, 마차는 익숙한 길로 들어서서 마침내 타운하우스 앞에 섰다.
내가 내려서 살펴보기도 전에 데이먼을 비롯한 기사들이 주위를 둘러보며 안전한지 살펴보았다.
그런 후에 마차의 문을 열어 주었다. 데이먼의 에스코트를 받아 타운하우스의 정문 앞에 섰다.
“응?”
건물은 내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안의 분위기가 달랐다.
어딘가 정돈되지 않은 정원이 주는 스산한 기운도 그렇거니와, 무엇보다도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클리포드 공작의 타운하우스에는 보통 십수 명의 사람들이 근무했고, 굳이 보지 않아도 그들의 흔적이 느껴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지금 마치 유령의 집이 된 것처럼 적막하기만 했다.
“조금 이상하군요.”
데이먼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나는 더 확신했다.
“돌아가야겠어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진 않다. 비록 기나긴 이혼 소송을 치르더라도, 이 집에 들어가기는 싫었다. 이건 본능이 알리는 경고였다.
그렇게 돌아서려는데, 집 안에서 저벅저벅 걸어 나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루퍼트가 홀로 나오고 있었다.
그를 자세히 살펴봤지만 이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다.
“와 줬네, 고마워.”
가까이서 본 루퍼트는 씁쓸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데이먼이 슬쩍 나와 그 사이의 거리를 벌렸고, 루퍼트는 담담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