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83)화 (83/129)

83화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어어, 아우님. 어서 오시게, 안 그래도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 부르려던 참이네.”

브리먼 황자는 웃으며 자신을 맞이했고, 황제는 심각한 표정으로 에녹을 바라보고 있었다.

게다가 황자 옆에는 브리먼 황자를 지지하는 존바텐 백작도 있었다.

에녹이 굳은 표정으로 브리먼을 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에녹, 스필렛 백작과 요새 가깝게 지낸다고 들었다.”

에린의 이야기에 에녹의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태연한 표정 그대로 황제에게 공손히 고개 숙였다.

“마법석 광산 개발 사업을 함께 진행하고 있습니다, 폐하. 스필렛 백작께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브리먼이 그 여자에게서 아주 중요한 점을 발견했다고 하는구나.”

에녹은 순간 브리먼을 얼려 죽일 것 같은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금방 표정을 바꿨다.

“형님, 무엇을 발견하셨습니까.”

“아우님이 오해할까 봐 미리 말해 두지. 나는 황제 폐하께 그녀를 강제로 잠시 가둬 둔 일에 대해 용서를 빌었네.”

“……납치, 강제 구금을 인정하셨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네, 그 점은 내가 깊이 반성하며 책임지지.”

“귀족에 대한 구금죄를 어떻게 책임지겠다는 겁니까.”

에녹이 브리먼에게 날 선 반응을 보이자, 황제가 손을 휘저으며 그를 진정시켰다.

“에녹,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예, 폐하.”

“브리먼, 네가 에녹에게 설명해 보거라.”

브리먼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에녹을 바라보았다. 에녹을 보는 그의 얼굴은 흥분한 동생을 달랜다는 듯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나는 사냥 대회 때부터 생각했었네. 스필렛 백작은 마법석 광산을 제일 처음 발견했고 거기서 마물을 맞닥뜨렸네.”

“그게 어쨌다는 겁니까?”

에녹은 브리먼 황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무슨 개소리를 하나 지켜보겠다는 듯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눈이 마주친 브리먼은 잠시 입술을 일그러뜨리는가 싶더니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상하지 않은가? 마물과 맞닥뜨리고서도 멀쩡한 것이.”

“내가 직접 구하러 갔는데 뭐가 이상합니까.”

“그 순간이 얼마나 짧은가? 아무리 아우님이 빨리 갔다고 해도 보통 사람이라면 마물과 마주한 순간 피를 빨려 죽어 버렸을 걸세.”

“그래서,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뭡니까.”

그러자 브리먼 황자의 옆에 있던 존바텐 백작이 대신해서 나섰다.

“황태자 전하께서도 이미 아시겠지만, 마물이 공격하지 않는 인간은 딱 두 부류가 있지요. 하나는 본인이 그 마물을 소환한 흑마법사인 경우.”

“존바텐 백작, 어디서 입을 함부로 놀리는 거지? 죽고 싶은가? 지금 스필렛 백작이 마물을 소환하고 자작극을 벌였다는 건가?”

에녹의 분노에 찔끔하는 존바텐 백작의 앞을 브리먼이 막아섰다.

“워워, 진정하게. 아우님, 백작은 그저 경우의 수를 말한 걸세.”

“또, 또 하나는…….”

존바텐 백작은 그 뒤의 말을 잇지 못했다. 비록 황자를 지지하고 있지만, 에녹이 무서운 존재라는 건 그 역시 잘 알았다.

저 에녹 드웰 리케포로스 황태자는 마음만 먹으면 정말로 단번에 자신을 죽일 수도 있었다. 지금처럼 황제 앞만 아니라면 말이다.

그 때문에 역설적으로, 조금 더 유하고 약한 황자를 지지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또 대마법사 출신의 황태자가 황제가 되면, 자신과 같은 귀족은 황실의 수족이 되어 기도 펴지 못하고 살게 될 것이다.

존바텐 백작은 그렇게 두려움 속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온몸이 떨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존바텐 백작을 브리먼 황자가 흘끗 바라보더니 대신 입을 열었다.

“또 하나는 스필렛 백작이 여신의 가호를 받은 존재인 경우겠지. 즉, 신녀라는 걸세.”

브리먼의 말에 에녹은 표정을 굳히며 한 발 물러서 입을 딱 다물었다. 우려했던 사태였다. 에린의 특별한 능력이 밝혀진다면, 절대 지금처럼 편히 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형님께서는.”

에녹은 황제의 보좌관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하더니, 다가온 보좌관에게 자신이 가져온 서류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마물의 피가 담긴 병을 바닥에 툭 던져 놓았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병 안에는 검붉은 액체가 꿈틀거렸는데, 그 모습이 꼭 어디론가 기어가려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짓을 하신 겁니까.”

“그건 뭐냐, 에녹.”

황제는 에녹이 올린 서류를 받아보면서 흘끔 병쪽을 바라보았다.

“스필렛 백작이 감금되었던 곳을 조사했더니 이런 게 나왔습니다. 그 주변에 흑마법을 썼다는 정황들도 포착해서 보고서에 정리해 두었습니다.”

“저런, 아우님. 내가 그래서 미리 폐하께 아뢴 걸세. 스필렛 백작을 시험하기 위해 마물의 피를 사용했다고.”

“……시험이라고요. 만일 스필렛 백작이 흑마법사나 신녀가 아니라 보통 사람이었다면 형님의 말대로 그 자리에서 죽었겠군요.”

“하나 그래서 결국 죽지 않았으니, 스필렛 백작은 검증을 받아야 해.”

브리먼 황자는 황제 쪽을 향해 허리를 한 번 숙였다.

“폐하, 비록 제가 무리한 수를 쓴 건 사실이오나 스필렛 백작에 대해서는 조사하셔야 합니다. 그녀는 마법석 광산의 소유주입니다. 만일 그녀가 흑마법사라면, 그녀의 손에 그런 엄청난 게 들어가게 둘 순 없는 일입니다.”

“브리먼 황자, 자신이 한 짓을 덮으려고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려는 모양이군.”

“아우님의 오해는 유감일세. 스필렛 백작에게는 따로 나의 무례를 사과할 걸세.”

황제는 설전이 오가는 동안 몇 장 안 되는 보고서를 팔랑거리다 손을 들었다. 그 손짓을 보고 에녹과 브리먼 모두 입을 다물었다.

“브리먼, 일단 귀족을 그렇게 함부로 잡아 가둔 건 큰 죄다. 그 과정에서 마물의 피를 쓰고 흑마법사를 데려다 쓴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잘못이지.”

“인정합니다. 마음이 급하여 제가 무리한 수를 썼습니다.”

제국은 원칙적으로 흑마법을 금지했지만, 이미 흑마법사가 된 이들에게는 자수를 권하고, 암암리에 그들을 운용했다.

이들은 명령에 의해서만 흑마법을 제한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비교적 악마에 대한 오염도가 심각하지 않았다.

브리먼 황자는 그들 중 둘을 데려갔다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브리먼의 말이 사실인지는 검증해 볼 필요가 있다. 흑마법사든, 신녀든 정체가 뭔지는 밝혀야겠지.”

“폐하, 스필렛 백작은…….”

“에녹, 이건 국법이다. 황제라도 국법은 따라야 한다. 하물며 황태자인 네가 어기겠다는 것이냐.”

그동안 에녹에게는 비교적 관대하던 황제가 엄한 목소리로 그를 꾸짖었다. 에녹은 이를 아득 깨물면서도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그런 에녹을 황제가 딱하다는 듯 혀를 차며 보다, 다시 브리먼에게 시선을 돌렸다. 브리먼을 두둔하면서도, 황제의 눈빛은 의외로 차가웠다.

“브리먼, 네 말뜻은 잘 알아들었다. 하지만 너의 경솔한 행동을 그냥 묵과할 수는 없는 일이지. 죄를 반성하는 의미로 한동안 황자궁에서 자숙하라. 내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누구도 만나지 말고, 밖으로 나오지도 말거라. 알겠느냐?”

그러자 존바텐 백작이 다급하게 그를 비호하고 나섰다.

“폐하, 황자 전하께 가혹하신 처사입니다. 오로지 제국을 위한 마음으로……!”

“존바텐 백작, 나서지 말게. 나는 폐하의 명을 따를 것일세.”

브리먼 황자는 담담한 표정으로 황제 앞에 고개를 숙인 후 뒤돌아 나섰다. 존바텐 백작은 야속하다는 듯 황제를 봤지만, 결국 황자의 뒤를 따라 나갔다.

에녹은 살기 어린 눈빛으로 나가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황제의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쟤는 내 아들이 맞는 걸까?”

에녹이 무슨 말이냐는 듯이 쳐다보자 황제가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을 휘저어 그를 불렀다.

“에녹.”

“…….”

“화가 난 게로구나. 네가 좋아하는 여자를 건드려서 말이다.”

“……아버지.”

에녹은 황제의 직설적인 말에 흠칫하면서도 부정하진 않았다.

“오냐, 나는 네 아비지. 너는 나를 닮았으면서도 나보다 훨씬 신중하여 일이 복잡해졌구나.”

“무슨 말씀입니까.”

“스필렛 백작이 진작 황태자비 신분이었다면, 감히 누가 저런 의심을 품고 달려들겠느냐.”

황제의 입술 끝에 웃음이 걸렸다. 에녹의 웃음과 닮아 있었다.

“나는 황태자 시절, 네 어미를 맞아들일 때 그녀의 주변은 살피지도 않고 일단 청혼부터 했단다. 아무도 건드리지 말라는 의미에서 말이지.”

황태자의 청혼은 명령과 다를 바가 없었다.

명목상 거절할 수는 있었지만, 차기 황후가 된다는 영광을 걷어찰 만큼 간 큰 가문은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께서는 아버지를 오히려 무척이나 싫어하셨다고.”

황후는 원래 황태자의 호위 기사였다. 걸출한 실력의 여기사로 일찍부터 황실 기사단에 발탁되었다.

“그래, 애인이 있는 여자를 내가 명령으로 내 옆에 묶어 뒀거든. 아니, 그건 꼭 내 잘못만은 아니란다. 내 호위 기사 둘이 몰래 사귀고 있을 줄은 누가 알았겠느냐.”

에녹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황제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스필렛 백작이 안타깝게라도 흑마법사라면 어쩔 수 없지만, 신녀라면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너도 알고 있을 테지만.”

“흑마법사는…… 아닙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황제는 의외로 간단하게 에녹의 말을 믿어 주었지만, 이어지는 말은 단호했다.

“하지만 신전의 검증은 받아야 한다. 아주 복잡해지겠구나. 게다가 지금 그녀는 클리포드 공작 부인이 아니냐.” 

에녹은 황제를 바라보며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아버지…… 폐하,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황제는 흥미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소싯적에는 정말 사고를 많이 쳤던 황제였다. 무슨 일이든 그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스필렛 백작이 신전에 갈 때 동행하게 해 주십시오.”

“그렇다면 만약 검증을 거부하고 도주한다면, 그 일까지 책임질 수 있겠느냐?”

“물론입니다.”

황제의 질문에 에녹은 주저 없이 답했고, 황제는 그를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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