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늦은 시각, 루퍼트는 타운하우스의 집무실에 있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클리포드 공작령의 업무 서류들이 한가득이었다. 그래서 늦게까지 붙잡고 앉아 있었지만, 신경이 다른 곳에 쏠려 있어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다.
‘대체 언제까지 성에 있으려는 거야.’
루퍼트는 자신이 공작령에 묶여 있을 때, 에린이 타운하우스에 돌아와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와 보니 그녀는 집에 없었다.
마법석 광산 개발 사업의 일로 황궁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줄 알았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에린을 붙잡아 오고 싶었지만, 현실의 일들이 발목을 잡았다.
게다가 용기가 나질 않았다. 에린이 클리포드 공작성을 떠난 날, 그날의 일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때도 차마 그녀를 잡지 못했었다.
에린의 비난 섞인 눈초리와 차가운 태도를 맞닥뜨리는 게 무서웠다. 그래도 그나마 갖고 있는 희망이라곤, 에린과 자신이 아직 부부라는 점이었다. 비록 일 년의 시한부 결혼이라 해도 그 사실이 그에게는 위안이 되었다.
“하아.”
루퍼트는 자꾸만 떠오르는 에린의 생각에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흔들어 애써 떨쳐냈다. 그리고 다시 서류에 집중하려 했다.
똑똑-
“루퍼트, 나예요.”
밖에서 가녀린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클로에였다. 바닷가 별장에서 헤어진 직후, 클로에는 루퍼트를 뒤따라서 타운하우스로 왔다.
루퍼트는 따라온 그녀를 딱히 반기지도, 보내지도 않고 내버려뒀다. 클로에를 신경 쓸 겨를이 없기도 했고, 어차피 에린도 없어 누군가 집안을 관리할 사람이 필요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만일 에린이 돌아와 불쾌한 기색을 내비친다면, 루퍼트는 이번에는 주저 없이 클로에를 내보낼 거라고 결심했다.
‘클로에는 내게 바라는 게 없으니, 이해할 테지.’
“들어와.”
클로에는 쟁반에 찻잔을 받쳐 들고 들어왔다. 루퍼트가 평소 즐겨 마시는 씁쓰름한 차 냄새가 났다.
“루퍼트, 너무 무리하는 것 같아요. 좀 쉬어 가면서 해요.”
클로에가 그의 책상 위에 찻잔을 놓아 주었고, 루퍼트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였다. 그녀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 버리기엔 아직 감정이 남아 있었다. 에린이 적극적으로 나서 주면 모를까.
루퍼트는 다정한 목소리로 답했다.
“고마워, 아직 일이 남아서. 먼저 가서 쉬어.”
찻잔을 손에 쥐고 입으로 가져다 댔다. 찻물이 평소보다 진한 느낌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클로에는 루퍼트의 곁에 서서 말없이 지켜보다가, 찻잔에 찻물이 반쯤 남았을 때 갑자기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러지 말고요, 루퍼트.”
클로에가 은근한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이자, 루퍼트는 클로에의 팔을 잡아 그녀를 떼어내려 했다. 분명히 이때는 그녀가 조금 귀찮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치는 순간 알 수 없는 충동에 휩싸였다. 클로에와 마주할 때면 자주 느끼는 감정이었다.
“……루퍼트, 방으로 가요.”
귓가와 뺨을 부비며 속살거리는 목소리에 루퍼트는 그녀의 팔을 잡던 손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났다.
클로에의 몸에서 나는 끈적하고 매혹적인 향이 루퍼트의 감각을 점점 더 잠식해 갔다.
“가자.”
루퍼트는 결국 본능에 이끌려 클로에의 팔목을 잡아끌었다. 그는 자신의 의지로 그녀를 데려간다고 생각했다. 클로에는 뒤따라가며 소리 없이 웃을 뿐이었다.
***
다음 날, 루퍼트는 잠에서 깨어나 주위를 둘러봤다. 클로에는 벌써 일어났는지 옆에 없었다.
꽤 오래 잔 것 같으면서도 아직도 정신이 몽롱했다. 한쪽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늘 최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그였기에, 이런 몸의 증상은 오랜만이었다.
‘요새 수련을 좀 게을리 하긴 했지.’
일정 경지에 오른 다음부터는 수련을 하지 않았다. 가끔 대련을 하긴 했지만 그것도 상대가 되는 건 에녹 정도였다. 하지만 에녹과 사이가 소원해진 요즘엔 그것조차 하지 않았다.
루퍼트는 한참을 게으름 피운 후에야 일어나 앉았다. 물을 마시기 위해 협탁으로 손을 뻗다가, 그는 자신에게 온 것 같은 우편물 하나를 발견했다. 클로에가 가져다 놓은 것 같았다.
루퍼트는 그것을 집어 들어 살펴보았다. 마법으로 봉인되어 있어 아직 발신인도 표시되지 않았다. 하지만 봉투 겉면이 꽤 구겨진 것이, 누군가 먼저 열려고 시도한 것 같았다. 아마도 클로에가 아닐까.
루퍼트는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의 마법석을 봉투 겉면 봉인구에 갖다 댔다. 그리고 봉투 겉면에 떠오르는 발신인을 보자마자 심장이 쿵쿵거렸다.
‘에린 스필렛.’
그녀가 보낸 편지였다. 왜, 왜 편지를 보냈지? 직접 오지 않고? 혹 에린은 돌아오고 싶어하는데 황태자가 보내 주지 않아서 구원 요청을 하려는 건 아닐까?
자신이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상상을 이어가며 루퍼트는 침착하게 봉투를 열었다.
안에 들어 있는 종이는 꽤 두툼했다. 접혀 있는 종이를 펴서 글씨를 읽는 순간, 루퍼트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이혼……합의서?”
이혼 합의서라는 글자가 크게 적힌 종이와 함께, 봉투 안에는 수표도 들어 있었다. 정확히 40억 골드였다. 그것은 이혼에 대한 에린의 의지를 명확히 보여 주고 있었다.
이혼이란 글자에서 오는 충격 덕분에, 루퍼트는 종이 사이에서 팔랑팔랑 떨어지는 쪽지를 발견하지 못했다.
곧 방문이 열리고, 클로에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루퍼트?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이혼……이혼이라니……! 에린이 나에게 이혼 합의서를 보냈어.”
루퍼트는 흥분에 휩싸여 크게 소리 지르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클로에가 다가와 그의 가슴팍을 눌러 진정시켰다.
“어머나, 세상에. 이혼이라니, 안 되죠.”
“당연히 안 되지, 지금 당장 성으로 가야겠어.”
루퍼트는 다시 일어나려 했지만 클로에의 손에 가로막혔다. 어떻게 된 일인지 가녀린 클로에가 누르는 힘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몸에 점점 힘이 빠졌다.
“진정해요, 루퍼트. 그렇게 쫓아간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잖아요?”
클로에가 그의 곁에 앉아 몸을 숙이더니 즐겁다는 듯이 속삭였다.
“자아, 한숨 더 자요. 내가 다 해결해 줄게요.”
“클로……에?”
루퍼트는 클로에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머릿속이 복잡해서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에게서 자라는 말을 듣자마자 정말로 졸음이 쏟아졌다.
“에린을 만나게 해 줄게요, 걱정 말아요. 당신은 지금 이혼하면 안 돼요.”
“…….”
루퍼트는 뭔가 말하기 위해 입을 벙긋거리다, 결국 스르륵 잠이 들고 말았다. 클로에는 완전히 그가 잠든 것을 확인한 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바닥에 떨어진 쪽지를 발견하고 집어 들었다.
「클로에는 흑마법사예요.」
그 쪽지를 본 클로에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가더니, 손안에 있던 종이가 순식간에 재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그러고는 홀로 팔짱을 낀 채 잠든 루퍼트를 내려다보았다.
“멍청한 년, 이런 남자 때문에 흑마법에 손을 대다니. 하긴, 덕분에 내가 이 몸을 차지하게 됐지만. 어디 한번 제대로 놀아 볼까?”
클로에는, 아니 클로에의 몸을 차지한 것은 깔깔깔 웃으며 문밖으로 사라졌다.
***
에녹은 앞에 서 있는 테리언 자작에게 보고서를 건네주었다. 테리언 자작은 몇 장짜리 보고서를 대강 훑어보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황제 폐하께서 판단하실 일이지만, 확신하진 못해도 의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증거들이죠.”
에녹은 다시 그 서류들을 챙기며, 그곳에서 찾은 마물의 피도 함께 챙겼다.
“그래서 지금 폐하께 갈 생각이다.”
“벌써 가십니까? 괜찮겠습니까? 좀 더 증거를 모으는 것이…….”
테리언 자작이 조금은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물론 이 정도 증거라면 황제를 설득할 순 있었다. 하지만 이 일의 중심엔 브리먼 황자가 있었다.
에녹이 아무리 정통성 있는 황위 계승자라고는 하지만, 브리먼 황자도 마법을 쓰는 황자로서 나름대로 대우를 받았다.
테리언은 혹시나 에녹이 의도한 바와 달리 정적을 제거하려 한다는 오명을 쓰진 않을지 걱정이 됐다.
“어쩔 수 없어. 브리먼 황자는 이제 내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거야. 그리고 대응책을 마련하겠지.”
에녹은 마물의 피가 꿈틀대는 작은 병을 손에 쥔 채로 중얼거렸다.
“조심하십시오, 그들이 보복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자 에녹이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차게 빛냈다.
“싸움을 걸어오면 오히려 환영이야.”
“흑마법은 때때로 좀 까다로우니까요.”
에녹은 그 말에는 동의하는 듯 끄덕거리며 물건들을 챙겨 밖으로 나섰다.
그는 복도를 걸어가며 조금 전 황후의 시종이 찾아와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렇게 좋았으면 진작 차지해야지 왜 남 줬다 뺏냐고 물으십니다.’
황후가 그녀가 신은 구두를 본 모양이었다. 예상대로 격렬하게 반대하진 않았다. 황가의 반려자는 스스로 정한다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랬으면 오죽 좋았겠어, 하지만 그때 그녀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는걸.”
그렇게 홀로 중얼거리며 황제가 있는 궁으로 향했다.
그런데 황제의 알현실 앞으로 가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문 앞에는 브리먼 황자의 보좌관이 있었는데, 언제 봐도 기분 나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어릴 땐 그 이유를 몰랐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저자도 흑마법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에녹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안에 형님이 계시는가?”
“예, 황태자 전하. 폐하를 알현하고 계십니다.”
목 안에서부터 으르렁대는 짐승의 울음 같은 것이 들렸지만, 그 와중에 태도는 공손했다. 이 보좌관은 절대로 황제 앞까지는 가지 않았다. 정체를 들킬까 봐서였다.
그 목소리를 들은 에녹이 문 안으로 들어가며 지나가듯 말했다.
“울프가 제법 사람 행세를 잘하는구나.”
보좌관이 멈칫하는 걸 곁눈질로 보면서 에녹은 알현실 안으로 완전히 들어섰다.
그렇게 문이 닫히고, 에녹은 자신이 한발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