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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81)화 (81/129)

81화

에린이 루퍼트에게 이 구두를 달라고 졸랐고, 에녹이 루퍼트에게 줘서 에린의 손에 들어간 건가?

“그래서 왜 왔다고?”

구두 이야기로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메리벨 황후의 물음에 나는 다시 여기 온 목적을 상기했다.

“황후 폐하께서 황궁 내 물품 계약을 담당하고 계시다고 들었어요.”

황후의 자세가 아주 편해 보였기 때문에, 나 역시 최대한 경직되지 않은 말투를 유지하려고 했다.

“맞아, 귀찮은 일이지. 그런데 왜?”

“제가 추천해 드릴 상단이 있어 뵙자고 요청 드렸습니다.”

황후는 내가 신고 있는 구두와 얼굴을 번갈아 봤다.

“황궁의 물품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야. 하나하나가 다 엄청난 고가의 사치품이며 예술품들이지.”

“예, 알고 있어요.”

“더군다나 물건에 뭐가 섞여 들어올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확실하게 보장된 곳이 아니면 계약할 수 없어.”

“제가 보증하는 상단입니다.”

메리벨 황후는 다리를 꼬고 앉아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비웃는 느낌은 아니었다.

“스필렛 백작이 보증하는 상단이라. 그래서 어디지?”

“……빌리 고든이 운영하는 상단입니다. 황후 폐하께서도 들어 보셨을 거예요.”

“아, 그 평민 주제에 엄청난 갑부라는 놈을 말하는 거구나.”

“네, 그 사람이에요.”

황후는 테이블을 톡톡 치며 여전히 웃음 띤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질문은 날카로웠다.

“아직 너와 나 사이의 신뢰도 없는데, 나더러 널 믿고 그 사람과 계약을 하라는 거니? 내가 왜? 황궁의 물품 공급은 여태껏 귀족이 주인인 상단하고만 해 왔어. 물론 거기에는 정치적인 목적도 있지. 그런데 굳이 바꿀 필요가 있을까?”

질문은 날카로웠지만, 다행히 미리 예상했던 범주 안에 있었다. 나는 소리 없이 심호흡을 하며 침착하게 그녀를 마주봤다.

“다소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일단 제 제안은 상단주와의 만남 그 자체입니다. 당연히 제가 감히 황후 폐하께 계약 그 자체에 대해 관여할 수는 없겠죠.”

“그럼?”

“다만 추천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정도는 괜찮을까요?”

“말해 봐.”

황후는 곁에 있던 시녀에게 손을 까딱했다. 그러자 그 시녀는 익숙하게 앞에 놓인 물컵에 차가운 물을 가득 따라 주었다.

지금 나도 따뜻한 차보다 시원한 물을 마시고 싶은데, 차마 초면에 달란 말은 못 하고 시선만 둘 뿐이었다.

“황후 폐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지금까지는 귀족 소유의 상단이 납품을 담당했었죠. 하지만 그거 아시나요? 저 멀리 바다 건너에서 오는 물품의 대다수가 1차적으로는 빌리 고든의 배에서 내려진다는 사실을요.”

“그게 어떻다는 거지?”

“귀족들이 황궁에 들여오는 물품 중 상당수가 외국에서 들여온 물건들이죠. 그들도 그 물건을 구하려면 어차피 빌리 고든에게 살 수밖에 없어요.”

날 바라보는 메리벨 황후의 표정이 진지하게 바뀌었다. 내 말에 집중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과정에서 당연히 값이 오를 겁니다. 상단끼리의 수수료도 그렇거니와, 운송 과정도 훨씬 복잡해지죠.”

“계속해 봐.”

“빌리 고든이 단지 평민이라는 이유로 그와 계약하지 않으신다면, 황궁은 신분 때문에 늘 비싼 값으로 물건을 사들이는 꼴이 됩니다. 황궁의 재산은 백성들의 세금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지출을 줄일 방법이 있다면 그를 고려해 보심이 합당한 줄로 생각됩니다.”

“건방지구나, 에린 스필렛. 지금 나를 가르치는 것이냐?”

황후의 목소리에 얼핏 노기가 서렸다. 순간 아차 싶었다. 너무 나갔나? 하지만 흘끔 바라본 메리벨의 표정은 오히려 흡족해 보였다.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저는 그저 제안을 드린 것일 뿐, 결정 권한은 오로지 황후 폐하께 있습니다.”

나는 앉은 채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래, 황실의 이익은 차차 생각하기로 하고, 또 다른 이유도 있을 거 같은데.”

“네, 당연히 있습니다.”

황후는 계속 말하라는 듯 한 차례 턱짓했다.

“빌리 고든은 제가 보증하는 상단이면서 동시에 이번 마법석 광산 사업의 투자자입니다. 투자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신용도는 이미 검증되었다고 보셔도 됩니다. 작위가 무조건 신용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황후 폐하.”

“하지만, 에린 스필렛. 황실의 계약에는 정치적인 목적도 있다고 했어. 나는 황태자의 우군이 될 귀족 상단들과 주로 계약을 맺고 있는데. 그들을 내치면서 발생할 에녹의 정치적인 손실은 어떻게 감당하라는 거지?”

“내칠 필요는 없습니다. 기존 계약을 유지한 상태에서 경쟁을 시키면 되니까요. 그럼 그들은 더 싸게, 더 좋은 물건을 들여오려고 노력하겠죠. 그리고…….”

나는 따뜻한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적절히 식은 온기가 흥분하지 않도록 나를 자제시켰다.

“제가 마법석 광산 사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때쯤이면 제 입지도 달라져 있을 겁니다. 저는 그 누구보다 황태자 전하의 강력한 우군이 되어 드릴 수 있을 겁니다.”

황후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지금까지 했던 어떤 말보다, 이 말이 그녀의 마음을 움직인 것 같았다.

물론 지금 한 말은 진심이었다. 나를 여태까지 도와 준 황태자였다. 내가 이 나라에서 계속 살 생각이라면 그가 황제가 되도록 도와 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클리포드 공작가는 원래부터 황태자의 지지 가문이었지. 하지만 최근엔, 조금 다른 소문이 들려오던데……. 그리고 넌, 루퍼트 클리포드의 부인이잖니. 그런 네 말을 믿을 수 있을까?”

“저는 곧…… 그 사람과 이혼할 겁니다.”

그러자 여태까지 소파에 편히 등을 기대고 있던 황후가 펄쩍 뛰며 몸을 일으켰다.

“이혼? 이혼한다고?”

왜 저렇게 놀라는 거지? 여태 여유 있던 모습과는 영 딴판이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었다.

“네, 이미 이혼 합의서를 루퍼트에게 보냈어요.”

“아…… 세상에, 그래, 그랬구나.”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고, 황후는 조금 상기된 얼굴로 나를 보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란다. 구두를 보고 혹시나 했는데, 정말 네가 이혼한다니.”

“구두랑…… 상관이 있나요?”

“물론 크게 상관은 없을 수도 있지. 그런데 에린, 넌…… 에녹을 어떻게 생각하지? 솔직하게 말해 보렴.”

황후의 모순된 말이 의아했지만, 그녀가 이어서 하는 질문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 황태자 전하께는 언제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게 다야?”

“네? 또 다른 게 있어야 하나요?”

나는 질문의 진위를 파악하는 척 눈을 깜빡거렸다. 물론 다른 감정도 있지만 여기서 언급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 그렇구나.”

황후는 허탈한 듯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어 빤히 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그럼……, 빌리 고든을 만나는 일은…….”

“생각해 보마.”

황후는 이제까지의 행동과 어울리지 않게 근엄한 표정과 말투로 내게 대답했다. 완전히 긍정적인 대답은 아니었지만, 단호한 태도를 보니 이쯤 해야 할 것 같았다.

“네,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그럼 이제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간다고?”

그렇게 일어나는데, 황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모습이 천진난만하여 어처구니없게도 그녀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네, 뭔가 더 하실 말씀이라도……?”

멍한 얼굴로 날 보던 황후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니야, 가 봐.”

“그럼, 이만.”

깍듯하게 무릎을 굽혀 마지막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에린 스필렛.”

날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황후가 소파 헤드에 팔을 걸친 채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예, 폐하.”

“전에는 그리 눈에 띄지 않아 몰랐는데, 오늘 보니 아주 예쁘구나.”

뜻밖의 칭찬에 얼굴이 조금 붉어진 채로, 나는 그녀에게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왔다.

“후아…….”

알현실의 문이 닫히자마자 크게 숨을 내쉬었다.

“긴장돼서 혼났네.”

나는 도망치듯이 황후궁을 빠져나왔다.

마차에 올라타면서는 조금 웃음이 나왔다. 내 예상과는 많이 다른 황후였지만, 그래도 멋진 사람이었던 것 같다.

황제가 무리하면서 그녀와의 국혼을 추진했다고 들었는데, 그렇게까지 한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

에린이 나간 후, 그녀가 마신 찻잔을 정리하던 에밀리는 슬쩍 메리벨 황후를 봤다.

“왜, 할 말 있어?”

“……어차피 수락하셨을 거면서 왜 생각해 보겠다고 하셨어요?”

“어차피 수락할 거라니, 왜 그렇게 단정 짓는 거야?”

메리벨은 어깨 위에 걸치고 있던 견장 달린 제복을 소파 위에 벗어 놓았다.

“에린 스필렛이 마음에 드셨잖아요. 또…… 주장에 일리도 있고요.”

“마음엔 들었지, 똑똑하고 눈치 빠르고. 하지만 괘씸하잖아.”

에밀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황후를 보았다. 황후는 창가로 다가가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그 구두는 어릴 적에 에녹이 자기 신부 될 사람에게 주겠다면서 가져간 거야.”

“아, 그런데…… 스필렛 백작은 클리포드 공작과의 결혼식에서 그걸 신었잖아요.”

“그러니까, 에녹이 그 결혼식에서 그걸 괜히 신겼겠어? 그 영악한 놈이.”

에밀리는 찻잔을 트롤리 위로 치운 후 메리벨 곁으로 다가갔다.

“루퍼트 님과 친하니까 그냥 선물로 드렸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럴 리가 없어. 그리고 구두 굽도 부러졌다잖아. 그 구두를 만든 사람은 선대 황제야. 아무나 부러뜨리거나 고칠 수가 없다고.”

“그럼…….”

“그게 가능한 건 꼭 그 핏줄뿐이야. 그러니 에녹이 직접 부러뜨리고 고쳐서 돌려준 거지.”

“왜 그랬을까요?”

메리벨 황후는 몸을 돌려 에밀리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내 아들놈이지만 속이 시커먼걸. 나라고 알겠니?”

“그럼 스필렛 백작에게 단호하셨던 건…….”

“내 아들만 짝사랑하는 거 같아서.”

그 말을 끝으로 메리벨은 알현실을 나가 버렸다. 남아 있던 에밀리는 그런 그녀가 익숙한 듯 조용히 마저 안을 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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