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헉!’
반짝 눈을 떠 보니 침대 위였다. 나는 누운 그대로 눈을 깜빡거리다 이불을 뒤집어썼다.
‘미쳤어, 정말.’
와인 한 잔에 기억이 날아갈 리 없다. 술김이라 핑계 대기에는 당시에 너무 멀쩡했다. 정말 충동적으로, 하지만 전적으로 내 의지로 한 일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침대 위에 앉았다 누웠다를 반복했다.
‘키스를 해 버리다니.’
다시 털썩 누워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내가 먼저 입술을 맞대자마자, 에녹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 허리를 감아 안으며 입술을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 이어진 진한 입맞춤.
“어우……야.”
기억을 더듬어보니 정말 어찌나 과감했는지, 절로 아우성이 흘러나왔다.
그때 키스가 끝나고 에녹은 방으로 데려다주며 내게 말했다.
‘당신이 먼저 덮쳤으니 책임지세요.’
짓궂게 말하고 돌아서는 그를 보며, 아무 말도 못 하고 들어와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하아…….”
긴 한숨과 함께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결국 다시 일어나 앉았다. 지금 게으름 피울 시간이 없었다.
오늘이 바로 황후를 알현하러 가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클리포드 소공작 부인이 아닌, 스필렛 백작으로 알현을 요청해서 혹시나 안 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승인되었다.
침대에 달린 종을 울리자 리아가 문 안으로 들어왔다.
“마담 플라다에 다녀왔어?”
“네, 아침 일찍 다녀왔어요. 이미 완성해 놨더라고요.”
리아가 손뼉을 치자 황궁에 소속된 하녀 둘이 행거를 끌고 들어왔다. 그곳에는 드레스 세 벌이 걸려 있었다.
“으으음.”
그걸 보니 고민이 시작되었다.
나는 플라다에게 우아하고 화려하지만 정숙한 분위기로 만들어 달라는, 어찌 보면 모순적이고 황당한 주문을 했었다.
황궁의 외궁보다 내궁으로 갈수록 장식도 화려했고 복장도 화려했다. 내궁은 황족들이 거주했고, 그들을 곁에서 보좌하는 이들도 대부분 귀족이었다.
당연히 복장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이걸로 하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드레스를 골랐다. 넓게 주름이 겹겹이 잡힌 코발트색 드레스였다.
천 자체로 만들어 낸 프릴과 주름 장식이 화려하면서도, 따로 레이스를 덧대지 않아 파티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진 않았다.
“플라다는 역시 천재라니까.”
입어 보니 더욱 마음에 들었다. 나야 뭘 입어도 예쁘겠지만, 그래도 플라다의 옷을 입으면 훨씬 빛이 난다.
내가 옷을 고르자, 리아가 그에 맞춰 발 빠르게 머리 장식을 골라 주었다. 푸른색과 보라색이 섞인 보석 꽃을 로즈핑크빛 머리에 꽂자 화사하면서도 아름다웠다.
나는 거울 속의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치장이 마무리되는 동안 머릿속으로 황후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말할지 생각했다. 왠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황제 앞에 설 때보다 더 긴장되는 것 같았다.
외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에녹이 고쳐 준 구두를 신었다. 웨딩 슈즈를 이런 자리에 신고 가도 되는지는 몰라도, 에녹이 괜한 것을 가르쳐 줄 리 없으니까.
에녹을 떠올리니 어제의 키스가 떠올라 다시 뺨이 홧홧해졌다.
“백작님, 정말 아름다워요. 황후 폐하께서도 아마 칭찬하실 거예요.”
“칭찬받으러 가는 자리가 아니야. 일이 잘 풀려야 할 텐데.”
리아는 허리춤의 리본을 단단히 묶어 주며 말했다.
“잘 될 거예요.”
일부러인지 모르겠지만, 드레스의 치마 앞부분을 살짝 올려 묶어서 걸을 때 슬쩍 구두가 보일 것 같았다.
“고마워, 이제 가자.”
방문을 나서 외궁 복도를 지나는 동안, 황태자 집무실의 보조 사무관 레논 캠벨과 밀라 버튼 자작 영애를 마주쳤다.
“우와, 백작님! 그렇게 입으시니까 정말 우아하고 아름다워요.”
레논 캠벨은 순수하게 감탄을 내뱉으며 내 주위를 빙글 한 번 돌아보았다. 하지만 밀라 버튼 영애의 눈빛은 전보다 한층 더 냉랭해졌다.
나를 보며 마지못해 고개만 까딱하더니 레논 캠벨의 뒷덜미를 잡고 끌고 갔다.
“바빠 죽겠는데, 뭘 꾸물거리는 거야? 드레스 처음 봐? 평민인 거 티 내니?”
“아니, 밀라! 잠깐, 천천히 가!”
나는 슬쩍 뒤돌아서 그들을 보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가면서 뒤에 있던 리아에게 소곤소곤 물었다.
“밀라 버튼 영애는 날 싫어하는 것 같아.”
“질투하는 거예요, 황태자 전하를 뺏길까 봐요. 원래 이곳에 온 이유도…….”
“아……?”
납득할 만한 이유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동시에 유치하지만 은근한 우월감에 목 안쪽이 간지러웠다.
그렇게 황궁 외궁을 나서 보니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황후 폐하께서 보내셨습니다.”
시종이 문을 열어 주며 말했고, 나는 그에게 감사 인사를 한 후 올라탔다. 다행이다 싶었다. 저번에는 편한 신발을 신고 에녹과 함께 걸어갔지만, 지금은 구두가 높아서 거기까지 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차는 금세 내궁의 정원을 지나 아름다운 성 앞에 섰다. 사방이 장미 덩굴로 뒤덮인 하얀 성은 황후의 확실한 취향을 알게 해 줬다.
‘예전에 에녹이 자기 어머니가 특이하다고 했던 것 같은데.’
어젯밤 에녹에게 다시 물으니, 별 설명도 없이 그냥 괜찮을 거라고만 하고 나를 방으로 들여보냈다.
“자세히 좀 말해 주지.”
툴툴거리는 동안 마차 문이 열렸다. 나는 내궁 소속 기사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려왔다.
문 앞에는 황후의 시녀로 보이는 사람이 나를 마중 나와 있었다.
“스필렛 백작님이시죠. 저는 황후 폐하의 시녀로 있는 에밀리 겔만이라고 해요.”
“마중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린 스필렛입니다.”
나는 눈웃음으로 화답하고는 에밀리 겔만에 대한 정보를 빨리 떠올렸다. 투자자를 모집할 때 봤던 서류들이 도움이 됐다.
겔만 자작가가 보석상을 운영한다고 해서 한번 더 유심히 봤던 게 도움이 됐다.
‘보석상이라.’
그렇다면 내 사업과 관련이 아주 없진 않다. 황후를 만나는 데 그녀의 도움이 있다면 더 수월할 것이다. 도움을 이끌어 낼 순 없을까?
“실제로 만나고 보니 생각과 많이 다르시네요.”
“무슨 뜻이죠?”
에밀리와 나란히 걷던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에밀리는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루퍼트 클리포드 공작과 어떻게든 결혼한 걸 보고, 열정적인 분일 거라 생각했어요.”
에밀리는 열정적이라고 에둘러 말했지만 실은 사랑에 미쳐 목매는 여자라는 말을 돌려 한 게 아닐까.
내가 오기 전 에린이 그랬던 건 사실이니 별로 할 말은 없었다.
“실제로 보니 달라 보이나요?”
“훨씬 차분해 보이시네요. 그리고 클로에 영애도 아직 무사하다면서요. 저 같으면 아마 진작 파묻었을 텐데.”
에밀리는 무시무시한 말을 농담처럼 호호호 웃으며 말하고는 조금 더 앞서 걸었다.
‘클로에를 싫어하는 건가?’
“어차피 이혼할 건데 굳이 신경 쓸 필요 있나요.”
그러자 에밀리는 놀란 눈을 하며 뒤돌아봤다. 그러다 다시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잘 생각하셨어요. 이쪽이에요.”
길게 이야기한 건 아니지만, 에밀리는 냉정하면서도 화끈한 성격인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고맙습니다.”
“너무 격식을 차리지 마세요.”
에밀리는 들어가기 직전 나에게 소곤소곤 말했다. 격식을 차리지 말라고? 황후 앞인데?
어리둥절한 것도 잠시, 들어가자마자 에밀리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메리벨 황후는 일단 드레스를 입고 있지 않았다.
시녀들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지만, 황후는 황제처럼 제복을 입고 있었고, 그것도 제대로 입은 게 아니라 셔츠 위에 걸쳐 입은 형태였다.
“어, 왔네?”
황후는 알현실 의자 아래 바닥에서 기지개를 펴다, 내가 들어오는 걸 보고는 놀란 눈으로 알현실 의자에 가서 앉았다.
분명 메리벨 황후를 처음 본 건 아니었다. 다만 무도회에서 화려하게 치장한 모습만 스치듯이 봤을 뿐이었다. 그때는 내가 생각했던 ‘황후’라는 이미지에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때보다도 지금이 훨씬 젊어 보였다. 에녹 나이의 아들이 있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에녹이 특이하다고 했던 말의 의미를 이제 알 것 같았다.
일단 인사는 제대로 해야겠지.
“칼리스 제국의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그러자 메리벨이 손을 저어 보였다.
“난 이런저런 이야기 돌려 말하는 거 딱 질색이야. 에린 스필렛 백작이랬나. 에린이라고 불러도 되겠지?”
당황스러웠지만 말 그대로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성격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도 경직된 자세를 풀고 웃음 지었다.
“네, 그럼요.”
그러자 메리벨 황후가 일어나더니 소파에 자리를 권했다.
“거기 편한 곳에 앉으렴.”
그녀는 내가 앉은 맞은편에 앉더니, 냉수가 든 컵을 집어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에밀리는 내 앞에 차를 내왔다.
“그럼 바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아, 그래. 어…….”
시원스럽게 대답하던 황후의 시선이 내 무릎 아래로 향했다. 구두를 보고 있었다.
“그 구두 어디서 났지?”
“결혼식 때 남편에게 받은 구두예요. 그런데 굽이 부러져서 황태자 전하께서 고쳐 주셨어요.”
내 말을 듣던 황후의 표정이 묘해졌다.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던 황후는 헛웃음을 짓다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나 참, 누가 지 애비 아들 아니랄까 봐.”
“네?”
“그 구두는 내 거야. 내가 황제 폐하와 결혼할 때 신은 구두지.”
“그…….”
난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달싹거렸다. 황후의 구두가 어떻게 에린에게까지 흘러 온 거지?
“그 구두는 단순히 예쁜 구두가 아니야. 마법이 걸려 있어. 어느 발에 신든 저절로 사이즈가 맞춰지거든. 그런데 그런 구두의 굽이 부러졌다니,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부러질 수가 없는데…….”
“아, 황후 폐하 거라면 돌려드릴게요.”
나는 그 자리에서 구두를 벗으려 했다. 그러자 황후가 바로 말렸다.
“아니야, 어차피 그 후에 에녹에게 준 거니까. 그런데 그걸 루퍼트의 신부에게 주다니,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