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79)화 (79/129)

79화

잠시 후 문밖을 나서자 돌아오는 리아가 보였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얼른 다가와 고개를 조아렸다.

“다녀왔어?”

“네, 확실하게 우편국에 접수했습니다.”

“고마워, 수고했어.”

나는 방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또렷한 어조에 나는 개운해지다가도 이내 초조해졌다.

“이걸로 끝이어야 할 텐데.”

루퍼트가 합의서 내용을 받아들이고 사인을 하면 그걸로 끝이다. 봉투 안에는 그에게 보내는 짤막한 메시지도 있었다.

‘……클로에의 정체를 모를 수도 있으니까.’

그걸 믿고 말고는 루퍼트에게 맡기기로 했다.

이혼 합의서를 보낸 지금에서야, 나는 그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해 봤다.

루퍼트 클리포드 공작, 이 소설 속 세계의 남자 주인공.

이 세계로 떨어지자마자 맞닥뜨린 결혼식에서 나는 혼란스러웠고, 또 무서웠다.

그와의 첫 만남이 결혼식이 아니었더라면, 나에게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어쩌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원만한 사이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문득 정말 혼자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낯선 세계에 똑 떨어졌던 그 기분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와, 나는 양손으로 내 어깨와 팔을 쓰다듬었다.

‘그렇다고 해서 후회하는 건 절대 아니야.’

생각을 떨치고 방으로 들어가려던 나는 다음 할 일을 떠올리며 발길을 돌렸다.

가지고 있던 80억 골드에서 무려 40억이 쓰여졌다. 나머지 40억도 빚을 갚는 데 쓰일 것이다.

언제까지 황궁에서 살 수도 없는 일이고, 새로 집을 구하려면 돈이 더 필요했다.

‘빌리 고든이 요청한 일을 해야겠어.’

나는 에녹에게 황후에 대해 조금 더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에 집무실로 발길을 돌렸다.

그렇게 집무실 문을 열었지만 책상에 얼굴을 박고 있는 사람들만 있을 뿐 에녹은 보이지 않았다.

보좌관 리암만이 고개를 슬쩍 들어 나와 눈을 마주쳤다.

“전하는요?”

“오늘은 아직 오지 않으셨습니다.”

“……안 왔다고요? 아까 왔었는데?”

그럼 구두만 주고 가 버렸단 말인가?

“전하는 원래 외궁 쪽 집무실에선 잘 안 나오십니다. 최근에 유독 많이 나오신 거죠. 그나저나 이제 인부들을 뽑을 건데 한번 좀 보시겠습니까?”

“아…… 그래요.”

광산 채굴 작업이 곧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리암이 건네준 서류를 뒤적거리고 몇 가지 질문들에 대답을 하던 중이었다.

나는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일의 진행 속도가 너무 빠르다. 빠른 건 좋지만 그걸 넘어 이미 다 내정되어 있다는 듯이 빌리 고든의 준비 하에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가만, 내정자……?’

하지만 빌리 고든은 내가 뽑은 사람이었다. 그 많고 많은 서류 중에 몇 명, 물론 그조차도 추려 놓은 게 있었지만 내가 직접 뽑았고, 그 후 면접도 직접 보고 뽑았다.

그렇게 넘어가려 했지만, 찜찜한 기분은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잠자리에 들 무렵까지 이어지는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에녹에게 직접 더 확실하게 물어봐야겠어.’

더군다나 내일 황후께 알현하겠다는 요청을 넣어놓았다. 승낙 통보가 오진 않았지만, 어쨌든 내일이 오기 전에 한 번쯤 에녹을 보는 게 좋을 것이다.

나는 리아를 깨우지 않고 혼자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사실 에녹이 어디 있는지는 나도 몰랐다. 다만 잠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밤 산책 겸, 그를 만나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만일 그가 내궁에 있는 황태자궁에 있다면 보기는 어렵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나서는데, 복도 저편 닫힌 집무실 문 안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누가 야근이라도 하나?’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문을 열었다. 집무실 안쪽은 조용했다. 마법 램프가 아닌 일반 램프가 은은한 불빛으로 방 안을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황태자의 자리에 그가 앉아 있었다. 다행이다 싶어 나는 조심스레 다가가 입을 열었다.

“전…….”

나는 그를 부르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는 의자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고요한 적막 속에 규칙적인 숨소리가 바람처럼 스며들었다.

‘잠들었나.’

나는 발소리를 죽이며 가까이 다가갔다.

얼마나 피곤했는지 내가 들어온 것도 모르나 보다. 주위에 호위는 없는 건가? 위험하지 않나?

평소에는 목 끝까지 잠겨 있는 단정한 정복을 입고 있었는데, 지금은 겉옷을 벗어 놓고 셔츠의 윗 단추도 풀려 있었다.

그가 앉아 있는 의자 옆에 다가갔을 때까지도 에녹은 깨어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드러난 쇄골과 비스듬히 꺾인 목선을 타고 올라가다가, 얌전히 다물린 입술에 머물렀다.

그리고 곧게 뻗은 코와 길게 뻗은 속눈썹, 반듯한 이마와 흐트러진 앞머리까지. 나는 여기 온 목적도 잊고 잠든 에녹을 감상하고 있었다.

새삼스럽지만 정말 빼어난 미남이다. 그리고 내 타입이지. 문득 궁금해졌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나에게 잘해 주는 걸까.

앞머리 몇 가닥이 눈꺼풀 위를 가리고 있어 불편할 것 같았다. 내버려 둬도 괜찮을 것 같긴 하지만 뭔가 신경 쓰였다.

‘살짝, 아주 살짝.’

조심스럽게 머리카락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손끝이 막 닿은 찰나, 에녹이 번쩍 눈을 뜨더니 내 손목을 거칠게 낚아챘다.

“아!”

그 순간 그가 앉은 의자 쪽으로 몸이 기울었다. 간신히 팔로 의자 팔걸이를 잡아 버티며 놀란 눈을 뜨자 코앞에 그의 얼굴이 있었다.

“그…….”

에녹은 눈을 뜨긴 했지만 아직 피곤한 듯 나른한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거렸다.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스필렛 백작.”

그의 잠긴 목소리가 숨결과 함께 귓불을 간지럽혔다. 이곳이 어두운 편인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빨개진 내 모습을 그대로 들켰을 테니까.

“저…… 물어볼 게 있어서.”

말을 꺼내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아주 조금만 더 가까워도 닿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입술 위로 부드러운 감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

그리고 에녹은 나를 조금 밀어내더니 그대로 일어나 버렸다. 그는 입술 끝을 올려 미세하게 호선을 그리며 대답했다.

“그랬군요.”

나는 아무렇지 않은 그의 태도를 보고 내 착각인가 싶어 머쓱해졌다. 하지만 분명 닿았는데……?

뒤돌아선 에녹을 보며 나는 손으로 목덜미를 슥슥 문질렀다.

“아, 음.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그러자 그가 시선만 뒤로 흘끔 던졌다.

“물어보실 것이 있다면서요.”

“아, 그래요.”

뭘 물어보러 왔더라? 방금 일로 머릿속이 하얘져서 다시 정리해서 말하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에녹은 그런 나를 재촉하지 않고 느긋하게 바라보더니 찬장에서 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한잔하시겠습니까?”

나는 물끄러미 그것을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와인 잔을 꺼내 아주 조금 따라서 건네주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책상 끝에 기대듯이 한참서 있다 결국 입을 열었다.

“전하, 빌리 고든은…….”

“백작이 빠른 시일 내에 이혼하길 바랐습니다.”

내 말이 시작되기도 전에 에녹이 먼저 선수를 쳤다. 내가 빌리 고든이 처음부터 내정되었다고 생각한 것을, 그가 인정한 셈이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리아와의 일을 들켰을 때만큼 미안해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잡아먹을 듯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녹의 그런 눈빛은 처음이라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피하지 않고 그를 마주 보았다.

“당신도 원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죠, 하지만 그랬다면 그런 일련의 절차를 거칠 필요가 있었을까요?”

“직접 확인하지 않았으면 믿었겠습니까?”

“그야 전하가 추천해 준다면…….”

말을 하던 나는 내 이면 계약을 떠올렸다. 결국 한숨을 쉬며 인정했다.

“그래요, 전하께서 하시는 일엔 늘 이유가 있죠. 저는 늘 늦게 깨닫고요.”

내가 쉽게 인정해 버리자 에녹의 표정이 조금 풀어지는 듯했다. 나도 정말 그에게 따지고 싶어서 온 건 아니었다.

“작정하고 속이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백작에게 솔직하게 말 못 할 일들은 종종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절대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으니…….”

“그래요.”

그가 그렇다는데 더는 취조하고 싶진 않았다. 그나저나 와인의 취기가 올라오는 걸까, 대화와 어울리지 않게 녹녹한 분위기가 나로 하여금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이혼 합의서를 보낸 오늘, 조금은 긴장이 풀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조금은 외롭고 무서웠다. 나는 왜, 무엇 때문에 이 세계에 왔을까.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루퍼트에게…… 오늘 이혼 합의서를 보냈어요.”

단지 그랬다는 것일 뿐, 어차피 그도 알고 있을 내용이라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침묵을 오해했는지, 에녹이 차가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후회하십니까?”

나는 눈을 한번 치켜뜨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아직 다 끝난 게 아닐 겁니다.”

내 앞에 서 있던 에녹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다시 거리가 가까워졌다. 나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이어 말했다.

“맞아요, 아직 과정이 조금 남아 있죠.”

그가 합의한다면 그에 따른 약간의 절차가 남아있었고, 합의에 불복한다면 지루한 소송 과정이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최종 통보를 했다. 후련하고도 허전했다. 왜? 목표를 잃어버렸기 때문일까?

“더 기다리려고 했는데, 이런 백작의 모습을 보니 참기가 힘들군요.”

에녹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슬그머니 내 한쪽 손을 잡았다. 어쩐지 기분 나쁘다는 말투였는데, 잡은 손끝에는 열기가 담겨 있었다.

“이런 순간에 내 앞에서 루퍼트를 떠올리지 마세요.”

마신 와인은 겨우 한 잔, 아주 독한 와인이었나 보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이런 행동을 했을 리가 없다.

“그리고 말 나온 김에, 백작. 이혼 절차가 끝나면 나와…….”

이어지는 그의 말을 더 듣고 싶으면서도 듣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와 함께하는 미래는 절대로 평범하지 않을 테니까, 내게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내 입술을 그의 입술 위에 겹쳐 막아 버렸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