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나는 애써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며, 테이블에 놓인 봉투를 리아에게 건네주었다.
“이것을 우편국으로 갖다 줘. 즉시, 아무하고도 이야기하지 말고 바로 가야 돼.”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뒤돌아서는 리아에게 말했다.
“무너진 신뢰를 다시 쌓는 데는 시간이 걸릴 거야.”
내 말을 들은 리아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나는 그녀에게 이어서 말했다.
“그 시간을 견디는 건 네 몫이야, 리아.”
리아는 말없이 몸을 돌려 내게 무릎을 굽히고는, 다시 문밖으로 나섰다. 우편국은 황궁의 외궁에 있었고, 지금 내가 위치한 건물 바로 아래층이었다.
그녀를 보낸 직후, 나도 에녹과 만나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거의 바로 뒤따라 나갔다.
모퉁이를 돌아 나가 보니 복도 저편에서 에녹이 오고 있었고, 리아가 이쪽에서 가고 있었다.
나는 모퉁이 벽 뒤에 숨어 조용히 그들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았다.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에녹은 리아의 손에 든 우편을 흘끗 보는 듯했다. 리아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에게 살짝 묵례하고는 그대로 가던 길을 걸어갔다.
“……후.”
순간 내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는 새삼스럽게 놀랐다. 내가 왜 긴장한 거지?
그러던 중에 에녹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의 눈가가 호선을 그리는 걸 보고는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엿본 걸 들킨 것 같다.
그리고 그의 웃는 얼굴을 보는 순간, 마음에 벽을 두를 시간이 충분치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낭패였다.
“백작, 나와 계셨습니까.”
“네, 이제 오시나 봐요. 오늘은 꽤 늦으셨네요.”
“성 밖에 볼일이 있어 이제 왔습니다. 백작께서는 어디 가시는 길입니까?”
“저는.”
손가락 하나를 펴서 슬그머니 에녹의 가슴 쪽을 가리켰다.
“뵈러 왔어요.”
그러자 에녹이 앞서 걸으며 집무실 옆에 있는 회의실로 안내했다. 지금은 회의가 없어 텅 비어 있는 공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에녹의 한 손에 꽤 커다란 종이 가방이 들려 있었다. 그 안에는 네모난 상자가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날 거기 루퍼트가 오는 걸 봤어요.”
“그러셨군요.”
그는 그것을 회의실 책상 위에 놓더니, 내가 앉을 의자를 빼 주었다. 에녹의 평온한 목소리에 흘끔 그를 보았다.
“놀라지 않으세요?”
“그곳에 클로에 양이 있었을 테니,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아, 맞아요. 클로에도 있었어요. 그럼 루퍼트도 제가 납치됐다는 걸 알고 온 걸까요?”
내가 그 의자에 앉자, 에녹이 그 바로 옆자리 의자를 비스듬히 빼서 마주 보고 앉았다.
“글쎄요.”
그는 루퍼트의 화제가 불편하다는 듯 간단히 대답하며 넘겨 버렸다. 하긴, 이혼하면 이제 곧 남남이다. 루퍼트가 알든 말든 그게 나한테 중요한 건 아니지.
하지만 에녹에겐 중요할 수도 있는 일이다. 왜 이렇게 심드렁하지?
그렇게 빤히 그를 보고 있자니, 방금 전 방에서 리아에게 들은 내용이 생각났다. 무릎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나는 의자를 아주 조금 뒤로 물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겨우 그 정도를 물어보려고 감시를 시켰다는 게 이상하기만 했다. 에녹의 유려한 손가락이 테이블 위롤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나는 홀린 듯이 그것을 보며 물었다.
“제게 설명해 주신다고 하셨죠.”
내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에녹의 손가락이 뚝 하고 멈춰 버렸다. 나는 손에서 시선을 떼고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잠시 시간을 버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곧, 그의 진중한 목소리가 조용한 회의실 안에 울려 퍼졌다.
“백작, 나는 황태자이고, 황제가 될 사람입니다.”
“그렇겠죠.”
“이번 대에 두 명이 마법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역대 황실에 유례없는 일이죠. 다행히 내가 태어나자마자 능력을 보여 황태자가 되었지만, 앞으로 어찌 될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이야기는 소설에서 보기도 했고, 이곳으로 와서 보고 들은 상황으로 알고 있는 얘기였다.
나는 에녹이 그것에 대해 조금 경계하는 수준이라고만 생각했지,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왜냐하면 내가 본 에녹은 정말 완벽한 황태자였기 때문이었다. 그에 반해 잠깐 봤지만, 브리먼은 너무 모자라지 않는가. 그래서 아까 루퍼트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 태연한 게 아니었나?
“누가 봐도 전하께서 황태자에 어울리는걸요. 마법 능력만으로 그 자리를 넘볼 수 있을까요?”
“고맙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도리어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에녹은 씁쓸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나는 여전히 자리에 앉아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황태자는 황제 다음가는 제국의 상징입니다. 운신의 폭이 좁지요. 내 생각과 다른 말을 해야 할 때도 많습니다. 또한, 곁에 있는 사람들조차.”
에녹이 뒤를 돌아보았다. 눈을 마주친 찰나의 순간, 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마음과 달리 쓸모를 생각해서 두게 됩니다. 정말 원하는 사람조차도 예외가 없지요.”
하지만 그것은 잠시였다. 그는 다시 부드럽게 웃으며 나를 보았다. 놀라운 표정 변화였다.
“귀족들은 그런 나에게서 완벽한 황태자를 보지만, 그 때문에 거리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친밀감을 심어 주기 위해 몸을 낮출 수도 없습니다. 내 말을 이해하겠습니까?”
나는 일어나 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그래서, 제가 브리먼 황자 편일까 걱정해서 감시를 붙이셨다는 이야기죠?”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또 혹시나 스필렛 백작 본인의 의도가 아니더라도 흑마법에 노출되거나 세뇌가 되면 다른 행동을 보일 수도 있으니까요.”
나는 그의 설명을 들으며 더욱 의문이 생겼다.
“그건,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런데 왜 물어봤다는 게 하나같이…….”
내가 말끝을 흐리자 에녹의 눈동자가 갈 길을 잃고 방황하기 시작했다.
“제가 아침을 뭘 먹는지가 흑마법과 관계가 있나요? 기상 시간은요? 제가 아침잠이 많은 편이긴 하죠. 좋아하는 색은 핑크색, 파랑색이에요.”
좋은 말론 관심 있는 여자에 대한 질문이었고 나쁜 말로는 좀 스토커 같지 않은가.
그래도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보는 건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저를 믿게 되셨는데요?”
“곁에서 지켜보면서, 또, 사냥 대회 때 동굴에서 쓰러진 백작을 보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붉은 얼굴이었지만 곧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잔잔하게 물결치는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내 얼굴에도 은근한 열기가 올라왔다.
“알겠어요, 그럼 전하. 이제 더 숨기는 건 없나요?”
얇고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는 모습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해가 지는 가운데 붉은 노을에 비친 에녹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검게 빛나는 머리가 붉은빛을 반사하며 반짝거렸다. 그것이 신기해서 하마터면 그에게 손을 뻗을 뻔했다.
“있습니다.”
그의 대답에 다행히 이성을 차렸다. 나는 한숨을 쉬며 물었다.
“후, 또 뭔가요?”
에녹은 테이블로 걸어가더니 아까 가져온 종이 봉투 속에서 상자를 꺼내 들었다.
그는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상자 뚜껑을 열어 보였다. 그 안에는 구두 한 켤레가 들어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멀뚱멀뚱 구두를 보다 에녹의 얼굴을 보았다.
나를 보는 그의 표정이 조금 의아하다는 모습이었다.
“알아보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언뜻 보면 단조롭지만 정말 예쁘고 아름다운 구두였다.
“흠, 흠. 그러니까…… 이 구두를 왜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에둘러 질문을 했다. 그리고 곁눈질로 다시 구두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음, 그러니까 겉보기에는 웨딩 슈즈 같기도 하고. 아, 웨딩 슈즈!
“아, 그거……!”
“장인에게 수리를 맡겼는데 이제야 찾아왔네요.”
내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에녹이 내 앞에 무릎을 꿇더니 구두 한 짝을 내 발아래 내밀었다.
“전하, 잠시만요.”
“신어 보세요, 괜찮은지.”
나는 그의 요청에 얼떨결에 발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가 손수 신발을 들어 신겨 주었다. 그래도 이 남자는 황태자인데, 이렇게 황송하기까지 한 상황에 주춤거리면서도 나는 그 구두를 빤히 보았다.
“결혼식 때 신었던 구두네요. 굽이 망가졌었죠.”
나는 꽤 한참 만에야 알아본 그 구두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굽에 무게를 실어 바닥에 툭툭 내리쳐 봤다.
“튼튼하네요, 잘 고친 것 같은데요?”
“다행이군요.”
그러자 에녹이 구두를 다시 벗겨서 상자에 넣고는 원래 신발을 신겨 주었다.
“당신이 루퍼트에게 이 구두가 갖고 싶다고 며칠 내내 졸랐다고 들었습니다.”
“제가요? 아, 음. 네, 그, 그랬죠.”
에린이 그랬었다고? 나는 그럼 그렇게 졸라서 받아낸 구두를 못 알아본 거고? 억울했다, 이건 소설에서 나오지 않는 내용이어서 미처 알지 못했다.
알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그 구두의 행방에 대해서도 전혀 궁금해하지 않았다.
에녹은 상자를 닫고 여전히 몸을 낮춘 채였다. 그 상태에서 그가 낮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백작께서는, 없으십니까?”
“뭐가요?”
에녹이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봤다. 검은색 앞머리가 사르륵 흘러 내려가자 녹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내게 말하지 않은 것, 없습니까?”
미세하게 휘어진 그의 눈가에 나는 도리어 뜨끔하여 말문이 막혔다.
입술을 달싹거리다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그런 거.”
그에게 말하지 않은 거라면, 가장 큰 게 있었다. 바로 내가 에린이 아니라는 사실. 그건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외의 것이라면 일부러 숨기는 건 없었다.
에녹은 내 말에 수긍하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더 이상의 추궁 없이 바닥에서 일어났다.
“황후 폐하를 뵐 때 그 구두를 신으세요. 도움이 될 겁니다.”
“…….”
내가 뭔가 생각하며 그에게 묻기도 전에, 에녹은 내게 눈인사를 하고는 회의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 모습이 어쩐지 어제의 나를 보는 것 같아 당황스러웠다.
“어쩐지 분위기가…….”
나는 얼어붙은 채 그가 나간 문밖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에녹이 서운해한다? 어째서?
‘혹시 들킨 건 아니겠지?’
만약 외부 세계에서 왔다는 사실을 들키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 아니, 저 사람은, 또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런 생각들로 혼란스러워 한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