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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74)화 (74/129)

74화

“에린 스필렛, 너는 지금 즉시 돌아가는 대로 남편 루퍼트에게 마법석 광산을 넘긴다는 유서를 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자결하라.”

똑같은 얘기를 벌써 세 번째 반복해서 듣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곧 이들이 풍기는 냄새가 공작성에서 맡아본 적 있는 그 탄 냄새라는 걸 알아챘다.

‘흑마법.’

이들은 흑마법사였다. 아까 들었듯이 나에게 세뇌 마법을 걸고 있는 것 같았다.

이들이 확실히 흑마법사라는 가정하에, 그것이 들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나에게 특별한 정화의 능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대로 세뇌가 되지 않는다면 이들은 날 어떻게 할까. 나에게 마법을 걸고 있는 왕이란 자가 짜증스러운 투로 중얼거렸다.

“뭐야, 왜 아무 반응이 없어?”

“왕이시여,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냥 죽이십시오. 그렇게 해도 마법석 동굴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자의 말에 나는 놀라 딸꾹질이 나올 뻔했다. 죽인다고?

“지금 죽여 버리면 그 사후 처리가 복잡해진다. 지금은 궁에 있으니 없어진 걸 알면 황태자가 곧 사람을 풀 거야.”

“하지만 왕의 기력이 괜히 낭비될까 두려워…….”

짜악-

별안간 갑자기 살갗을 울리는 소리가 창고 안에 울려 퍼졌다. 그 왕이란 사람이 아까 말한 여자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

“나를 뭐로 보고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거지?”

“죄송……합니다.”

원래도 별로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그러는 바람에 창고 안의 공기가 더 얼어붙었다.

아무튼 둘의 대화로 유추해 볼 때 나는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 그러니 생각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해보지. 정 안 된다면 다른 방법을 찾을 수밖에.”

다시 머리 위로 손이 올라갔다. 기분 나쁜 감각이 찌르듯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며 얕은 두통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어김없이 나에게 마법석 광산을 넘긴다는 유서를 쓰고 자결하라는 명령을 했다. 어쩔 수 없지, 조금 어울려 주는 수밖에.

“……네.”

나는 일부러 게슴츠레 눈을 뜬 채 힘없이 대답했다. 이렇게 하는 게 맞을까?

“엇, 성공한 것 같습니다.”

맞나 보다. 내게 대사를 외운 사람이 기쁘게 소리쳤다. 그러자 왕이란 사람도 손을 내리며 훅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좋아. 조금 까다롭긴 했지만 그래도 성공해서 다행이군.”

“역시 전하는 대단하십니다.”

“역시 악마들의 왕 사마엘의 권속다우십니다!”

사마엘은 또 뭐야. 일단 이름만 기억해 둔 채 나는 초점 없는 눈동자를 최대한 유지하면서 조금 더 주위를 살펴보았다.

왕은 허리를 숙여 나를 정면으로 보며 말했다.

“말해 보아라, 너에게 무엇을 시켰는지.”

익숙한 목소리. 어둠 속에서 녹빛 눈동자가 슬며시 드러났다가 곧 자취를 감췄다.

“……마법석 광산……을 루퍼트에게 넘기고…… 자결하라고…….”

정신이 빠진 듯한 목소리로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했다. 이 정도로 속을까 싶어 속으로 겁을 먹었는데, 왕이 씩 웃으며 허리를 폈다.

“됐군.”

정말? 이 정도로 확인 끝이야? 뭐가 이렇게 어설프지, 이 사람들.

“세뇌는 성공한 것 같지만 유지되는지 봐야겠습니다. 조금 더 가둬 두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지.”

한 명이 거들먹거리며 문밖으로 나갔고, 나머지들도 따라 나갔다. 따로 안에서 감시하는 사람은 없는 건가?

그래도 그들이 나가서 더 이상 연기할 필요는 없어서 다행이었다.

“후우…….”

재갈도 풀렸고, 눈도 보였다. 그런데 아까까지만 해도 한쪽에 누워 있던 리아가 보이지 않았다.

“리……아?”

툭.

그런데 갑자기, 두 손목을 결박하고 있던 밧줄이 끊어지면서 손이 자유로워졌다. 휙 돌아보니 리아가 단검 하나를 손에 든 채 서 있었다.

“리아!”

“쉿, 마님.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아, 그래. 하지만 곧 들어와서 날 풀어 줄 것 같은데. 가만히 있는 게 낫지 않을까?”

리아는 작은 창문 아래 의자를 끌어다 놓으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지금은 멀쩡하시지만, 아마 저들은 확실히 하기 위해서 곧 약물을 가져와서 삼키라고 할 겁니다. 그건 몸을 서서히 죽어 가게 만드는 건데, 세뇌 마법과 함께 사용하곤 하죠.”

“어…… 리아, 넌 어떻게 그런 걸 아는 거야?”

“……나중에, 말씀 드리겠습니다.”

리아는 의자 위에 올라가 창문을 열고 아래를 살펴보더니 나에게 올라가라는 듯 손짓했다.

“많이 높지는 않네요, 밑에서 잡아 드릴 테니 저곳으로 나가세요.”

내가 아는 리아와 사뭇 다른 모습에 당황스러웠지만, 일단은 그녀 말대로 이곳을 빠져나가기로 했다.

창문은 작은 편이었지만, 여자 하나가 간신히 나갈 정도는 됐다. 의자 위에 발을 딛고 일어나, 창틀을 잡고 몸을 들이밀었다.

“리, 리아……! 아래가 바다인데?”

이건 해안선 끝에 있는 건물인 것 같다.

“네! 뛰어내리세요!”

리아는 공중에 뜬 내 발을 잡고 위로 힘껏 올려줬다.

“리아, 넌 어쩌려고!”

“전 혼자도 나갈 수 있어요!”

완전히 창틀 위에 올라섰을 때, 나는 숨을 꼴깍 삼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저 언덕 너머로 말을 타고 달려오는 사람이 보였다.

나는 그가 누군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루퍼트?”

그를 보는 순간 아까 본 그림들이 선명해졌다. 그 들어봤음직한 여자 목소리는 바로 클로에였구나.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망설임 없이 바닷속으로 몸을 던졌다.

루퍼트는 이 일에 관계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나. 하긴, 관계가 없을 리가.

첨벙-

차가운 바닷물이 몸에 닿는 충격에 정신을 잃을 것 같았지만 어떻게든 헤엄쳐서 수면 위로 올라왔다.

“하아, 하아, 리아……!”

돌아보니 가까운 곳에 해변이 있었다.

이어서 리아가 뛰어내리는 것을 보고는 나는 해변 쪽으로 필사적으로 헤엄쳤다. 수영을 할 줄 아는지 모르는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어떻게든 허우적대며 앞으로 갔다.

그리고 해변에 거의 다 다다랐을 때, 눈앞이 새카매지는 걸 느꼈다. 약해빠진 에린의 몸으로 바다에서 헤엄을 쳤으니 힘이 빠진 것이다.

이를 악물고 기어가다가 어느 정도에 이르러서는 철퍼덕 그 자리에 엎드렸다. 그리고 잠시 의식을 잃고 말았다.

***

클로에와 브리먼 황자는 해안가에 있는 별장 일 층 테라스에 앉아 유유자적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말에서 내리는 루퍼트를 바라보면서 클로에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루퍼트! 여기예요!”

브리먼도 싱긋 웃으며 그에게 눈인사를 했다.

“오랜만이네, 루퍼트.”

“안녕하십니까, 황자 전하.”

루퍼트는 가볍게 그에게 인사하고는 클로에를 보며 말했다.

“수도로 먼저 간다더니, 여기 있었어? 왜 이곳으로 나를 불렀지?”

클로에가 일어나 그에게 팔짱을 끼며 애교 있는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보고 싶어서 불렀죠, 루퍼트. 우리 사이에.”

“……처리할 일이 많아.”

루퍼트는 은근히 팔을 빼내며, 황자를 흘끔 쳐다봤다. 그러자 브리먼이 옆에 있던 의자를 빼며 자리를 권했다.

“내가 불렀네, 루퍼트. 이쪽으로 일단 앉게.”

브리먼의 사람 좋은 미소에 루퍼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자네 아버지 클리포드 공작의 일은 애석하게 됐네. 그래도 이제 자네가 무사히 공작이 되었군, 축하할 일이야.”

“…….”

루퍼트는 뭔가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지만, 입을 꾹 다문 채였다. 클로에가 그의 찻잔에 찻물을 따라 주었다. 짙은 빛깔의 액체가 고소한 향을 풍겼다. 클로에가 루퍼트에게 자주 만들어 준 차였다.

루퍼트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 그 장면을 브리먼과 클로에가 빤히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으면 하십시오.”

“아, 그래.”

브리먼 황자는 헛기침을 하다가 뜬금없는 말을 했다.

“우리가 종종 만난 지도 꽤 되었군.”

브리먼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 가며 루퍼트를 종종 불러내곤 했다. 간단하게 신변잡기를 이야기하기도 했고, 전략 전술에 관한 것을 묻거나, 귀족들의 동향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러다 문득 황태자 에녹에 대한 열등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처음에는 왜 이러나 했지만, 브리먼 황자가 에녹에 대한 반감을 드러낼 때마다 묘하게 동정심과 동질감이 들었다. 그래서 그의 초대에 응해 주었다. 물론 클로에의 요청이 있어서이기도 했다.

브리먼 황자가 이렇게 부르는 까닭을 루퍼트라고 해서 아예 짐작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자신은 어쨌거나 클리포드 가문의 후계자였고, 클리포드 가문은 대표적인 황태자의 지지 가문이었다.

그런 자신을 상대로 어쩌려는 건지 조금은 의문이었다.

말이 없는 루퍼트를 대신하여 클로에가 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브리먼 황자님은 위기에 빠진 절 구해 주셨죠. 제 생명의 은인과 다름없어요.”

“……그건 들어서 알고 있어.”

단순히 클로에와 자신과의 관계를 내세워서 끌어들일 계획이라면, 실망스러울 것 같았다.

솔직히 선대 클리포드 공작이 죽은 마당에, 루퍼트라고 해서 딴생각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명분과 방법이 없다면 거절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저들과 함께 몰락의 길을 걷고 말 것이다.

게다가 에린 스필렛도 마음에 걸렸다. 스필렛 가문은 클리포드 가문과 함께 전통적인 황태자 지지 가문이다.

그녀와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은 지금, 황태자를 배신한 걸 알게 된다면 에린은 어떤 반응일까. 자신을 비난하진 않을까.

지금 루퍼트로서는 제일 마음에 걸리는 대목이었다. 에린과 가깝게 지내는 에녹이 죽일 듯이 밉다가도, 에린의 비난과 외면이 한편으론 무서웠다.

루퍼트의 반응이 영 미적지근하자, 브리먼 황자는 결국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돌려 말하지 않겠네, 루퍼트 클리포드 공작. 나를 좀 도와주셨으면 하네.”

그리고 황자는 은근하게 그의 팔을 잡으며 친분을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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