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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73)화 (73/129)

73화

데이먼은 입을 딱 다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다시 대답했다.

“그,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시고 조금 곤궁하긴 하지만, 돈이 부족하진 않습니다.”

“그렇군. 그럼 거절하는 것으로 알겠네.”

에녹은 거절당했는데도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가 약간의 오해를 했다는 걸 알았지만 굳이 정정해 주지 않았다.

그렇게 가볍게 거절당하고 일어서려는데, 데이먼이 아주 중요한 질문을 했다.

“상대가 누굽니까?”

“…….”

에녹이 느리게 다시 앉았다.

“제가 아는 사람인 겁니까?”

“……아마도.”

에녹은 소파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린 채 곤란한 듯 입 주위를 가렸다. 속으로 혀를 차다가, 결국 사실대로 말했다.

“에린 스필렛 백작일세.”

데이먼의 표정이 밝아지고 눈이 크게 뜨였다. 그걸 본 에녹의 기분은 다시 나빠졌다.

***

나는 깃펜을 흔들거리며 내 방 안 티 테이블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오늘은 집무실에 가지 않았다.

혼자 좀 중요한 일을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내 앞에 놓인 종이에는 ‘이혼 합의서’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합의서 자체의 내용은 간단했다. 이혼을 동의하고 각자 서명을 하면 됐다.

흠, 하지만 이것만 달랑 보낸다고 해서 루퍼트가 알았다며 신나게 서명해 줄 것 같지 않다. 어쨌든 뭔가 설명해 줄 편지도 함께 적어 넣기로 했다.

다시 깃펜을 세워 들던 나는 글씨를 쓰는 대신 콕콕 종이를 찍으며 망설였다.

‘편지도 편지지만, 돈부터 돌려줘야 하지 않을까, 1년의 결혼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40억 골드를 갚아 준 거니까. 괜히 그걸 빌미로 삼아서 붙잡으면 골치 아플 거야.’

루퍼트와의 결혼 기간은 총 네 달 남짓, 그 사이 별별 일이 다 있었다. 일 년이 짧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과의 결혼 기간이라고 생각하니 결코 짧지 않다.

‘그래, 40억. 아깝지 않아.’

남은 팔 개월의 시간이 짧다면 짧을 수 있지만, 체감만으로 생각해 보면 8년보다 길게 느껴졌다.

“으음, 귀족끼리의 이혼은 절차가 좀 복잡하네.”

합의 이혼이라고 해도 형식적인 절차가 남아 있었다. 황실의 허락이 필요했고, 또한 대신전의 동의가 필요했다.

물론 당사자끼리 합의한 이혼을 시시콜콜 따져서 반대하진 않는다고 했다. 말 그대로 형식적인 절차라고.

‘소송으로 가면 더 복잡해지겠지만.’

제발, 부디 거기까지 가진 않기를. 루퍼트가 클로에에게 홀딱 빠져서 그냥 이혼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후우, 그게 원작대로잖아.”

에린이 죽은 것만 빼고는 그대론데 왜 루퍼트는 날 버리고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는 걸까.

어쨌든 나는 펜을 테이블 위에 놓고, 아직 칸이 비워진 이혼 합의서를 침대 옆 서랍 속에 넣어 놨다.

그리고 방의 구석에 있는 나무 캐비닛으로 가서 문을 열고 허리를 숙였다. 그 안에는 내 마법석으로 열 수 있는 금고가 있었다.

잠금쇠에 내 마법석을 갖다 대자 덜컹 소리와 함께 금고의 문이 열렸다. 아무리 봐도 이건 참 편리한 시스템이다.

금고 안에는 빌리 고든에게 받은 80억짜리 어음이 있었다.

그 봉투를 손에 들고 나는 가슴 안쪽 깊숙한 곳에 숨겨 넣었다. 그 봉투도 역시 전과 같이 밀봉되어 있었다.

아예 괴한이 납치라도 하여 뒤지지 않는 이상, 귀족 여인의 가슴팍 안에 뭐가 있는지는 차마 알지 못할 것이다.

아무튼 이것을 이제 현금으로 바꿔야만 했다.

나는 드레스 위에 겉옷을 챙겨 입었다. 큰 금액의 어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겁도 났지만, 그래서 오히려 혼자 아무렇지 않게 얼른 다녀오려고 했다.

다행히 황궁 앞 길가 건너편에 바로 은행이 있었고, 그곳은 금방 다녀올 수 있는 거리였다.

내가 방문을 나서는 걸 본 리아가 얼른 쫓아왔다.

“마님, 어디 가세요?”

“아, 리아. 잠깐만 나갔다 오려고.”

왠지 나도 모르게 리아에게도 바로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잠깐, 어디요? 마님, 기사라도 한 분 데리고 가세요. 지금 황실 외궁에 요청을…….”

“아니야, 요청을 넣어도 시간이 걸리잖아. 공무 수행 중인 것도 아니고, 정말 가까운 곳에 가는 건데. 뭘 그렇게까지.”

“그래도요, 마님.”

내가 거절하자 리아는 고민하더니 자신이라도 따라가겠다고 했다. 결국 그것은 거절하지 못하고 승낙해야만 했다.

외궁 문밖을 지나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성문 밖으로 나섰다. 아직 오전이라 그런지 거리는 한산했다.

바로 건너편에 보이는 은행으로 그대로 직진하려는데, 갑자기 리아가 뒤에서 잡아당겼다.

그리고 내 앞으로 쌩하니 마차 한 대가 지나갔다.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다.

“마님! 천천히 살피고 가세요.”

“아아, 그래. 고마워.”

마음이 급해서 나도 모르게 서둘렀나 보다. 나는 천천히 좌우를 살핀 다음에 마차가 다니는 넓은 길을 건너갔다. 리아가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아……읍!”

맞은편 도보로 거의 다 왔을 때쯤, 갑자기 짧은 비명소리가 들렸다. 나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지만, 시야가 갑자기 어두컴컴해지더니 이내 엄청난 졸음이 쏟아졌다. 나는 그렇게 누군가에 의해 정신을 잃고 말았다.

***

흐릿했던 의식이 점차 회복되었다.

아직도 시야는 어두웠고, 몸 전체에 규칙적인 진동이 전달되고 있었다. 아마도 여기는 마차 안,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손발이 묶여 있었고 눈도 가려져 있었다.

“으……읍.”

소리를 내려고 해 봤지만 입에도 천으로 재갈이 물려 있었다.

나는 내 처지도 처지였지만, 가슴팍에 숨겨 둔 어음 봉투가 더 신경 쓰였다. 내 80억 골드, 설마 이대로 뺏기는 건 아니겠지? 아침에 했던 기우가 현실로 일어날 줄이야.

리아는 괜찮은 건가? 시야는 막혀 있었고, 소리도 마차 바퀴 소리에 묻혀 버려서 기척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새 마차의 움직임이 멈췄다. 마차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그대로 누군가의 어깨 위에 들쳐 메어졌다.

나는 온몸에 힘을 빼고 잠든 척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어딜까, 여기는. 나를 납치한 건 누굴까. 단순 강도일까? 아니면…….

잠시 후 나는 어떤 건물로 들어가 의자 위에 앉혀져서 그대로 밧줄로 꽁꽁 묶였다. 습기 가득 찬 곰팡이 냄새와 짠 냄새가 났다. 무슨 창고 같은 건물인 것 같다.

뒤로 묶인 손을 조금 움직여 손목에 있는 마법석 팔찌가 잘 붙어 있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잘 있었다.

예전에 사냥 대회에서 에녹이 이것으로 나를 찾아왔던 기억이 있었다. 만일 내가 없어진 걸 알아챈다면 이번에도 이걸로 찾아오겠지.

뭐, 그 전에 죽어 버리면 아무 소용없겠지만, 최소한의 보험은 있는 셈이라 그래도 조금이나마 안심이 됐다.

낡은 철제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여러 명의 발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눈을 가렸던 천이 풀리고 흐릿하게 앞이 보였다. 하지만 안은 어두웠고, 작은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만으로 시야를 가늠해야 했다.

내 주위로 검은 로브를 깊게 눌러 쓴 무리들이 모여들었다. 언뜻 보니 창고 구석에 리아가 기절한 채 누워 있었다. 가슴이 오르내리는 걸 보니 아직 살아 있는 것 같았다. 다행이다. 그녀는 손만 뒤로 묶여 있었다.

“깨어났군. 들키진 않았나?”

음산하고 낮은 목소리가 먼저 질문했다. 지금 막 저 문으로 들어온 사람이었다. 내 뒤쪽에 서 있던, 나를 이곳으로 데려다 놓은 사람들이 대답을 했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을 때 순식간에 데려왔습니다. 아직 모를 겁니다.”

“이 여자가 황궁에 들어가 있는 바람에 도무지 접근할 수가 없었는데, 다행히 제 발로 나와 주어 일이 수월했습니다.”

내 뒤에는 둘, 지금 문으로 들어온 사람은 세 명이었다. 모두가 한결같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꽁꽁 가리고 있어 누가 누군지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왕이시여, 만만치가 않은 여자입니다. 처음부터 제대로 해야 할 겁니다.”

여자 목소리였다. 그것도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목소리였다. 누구지, 누굴까.

“일단 너희들이 먼저 해 봐라.”

“예, 전하.”

‘전하?’ 보스로 보이는 사내에게 한 명은 왕이라 부르고 다른 둘은 전하라고 한다.

나는 말똥말똥 눈을 뜨고 그들이 하는 행태를 살펴보았다. 뒤에 있던 둘이 양옆으로 왔다.

한 명이 내 정수리 위에 손을 올려놓고 무어라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한 명은 내 눈을 쳐다보면서 말을 걸었다.

“에린 스필렛, 너는 지금 즉시 돌아가는 대로 남편 루퍼트에게 마법석 광산을 넘긴다는 유서를 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자결하라.”

이건 무슨 헛소리야? 그 와중에 정수리에 닿는 느낌이 기분 나빴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게 두통이 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저 말도 안 되는 명령에 대답이 나올 것 같진 않았다.

한동안 열심히 주문을 외우던 놈이 손을 내리더니 헉헉대며 말했다.

“전하, 세뇌 마법이 듣질 않습니다.”

“왕이시여, 이 여자는 보통이 아니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다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한 번 더 들으니 더 기억이 선명해졌다. 분명히 내가 아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세뇌 마법이라고? 루퍼트에게 광산을 넘기고 자결하라고? 루퍼트가 벌인 일일까?

어쨌든 그들의 대화로 알 수 있는 건, 지금 이 자리에서 날 죽이진 않을 거라는 것이다. 뭐 쉽게 놓아줄 것 같지도 않지만 말이다.

여러 가지 추측을 거듭해 가는 동안, 그 왕이라 불리는 자가 노기 어린 음성으로 그들을 탓했다.

“멍청한 것들, 그러고도 너희들이 내 정예 대원이라 할 수 있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비켜라, 내가 직접 하지.”

그러더니 그 남자가 직접 나섰다. 아까 옆에 있던 사람이 했던 것처럼 똑같이 내 머리에 손을 얹더니 주문을 외웠다.

나는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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