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역시 옷을 갈아입었어야 했어.’
간단한 식사일 거라 생각했는데, 긴 테이블 위에 정찬이 올라와 있었다. 나와 에녹은 양쪽 끝에 앉아 있었고, 시종들이 익숙하게 음식들을 날라 내 앞접시에 놓아 주었다.
확실히 황궁의 요리사가 실력이 좋은지, 갖다 주는 것마다 입에서 사르르 녹을 만큼 맛있었다.
에녹은 내가 어느 정도 배가 채워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을 건넸다.
“입에는 좀 맞으십니까.”
“네, 역시 황궁 요리가 다르긴 다르네요. 공작가와 비교도 안 되는…… 아, 흠흠. 네, 맛있어요. 이런 걸 매일 먹는다면 정말 즐겁겠어요.”
입맛이 까다로운 편은 아니었지만, 이 세계로 와서 먹은 음식들은 사실 하나같이 그냥 그랬다. 간혹 맛있는 것들도 있었지만, 계속 먹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이런 맛은 이곳에서 처음이었다.
내 말에 에녹이 갑자기 환히 웃으며 답했다.
“백작께서 원하시기만 한다면, 매일 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바보가 아닌 이상 나 역시 알아들었다.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도, 시종에게 원하는 음식을 가리켰다. 맛있긴 정말 맛있었다. 누가 보면 못 먹고 산 줄 알려나.
“참, 전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에녹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고,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얼마 전에 빌리 고든 씨와 계약하면서 약속을 한 게 있어요.”
에녹에게 그 이면 계약에 대해 말해도 될지 망설였지만, 어쨌거나 에녹은 내 이혼을 도우면 도왔지 방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상단의 보증인이 되어 주는 조건으로 돈을 받았거든요.”
“……아, 네. 그러셨군요.”
들으면 그래도 놀랄 줄 알았는데, 에녹은 한 타이밍 늦게 반응하면서 내 말에 대답했다. 조금은 이상했지만 나는 이어서 설명을 했다.
“그런데 그가 제안을 했어요. 먼저 금액의 3분의 2를 주고, 보증인으로서 황궁의 담당자와 만나게 해 주는 조건으로 나머지 3분의 1을 주겠다고요.”
“황궁의 담당자라면.”
“황궁에 물품을 납부하는 상단을 정하는 담당자가 있을 거 아니에요. 계약을 성사시켜 달라는 건 아니고 그냥 만나게 해 주기만 하면 된다고 했어요. 혹시, 누군지 아세요……?”
“으음, 그게.”
에녹은 포크와 나이프를 놓고 잠시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혹시 비밀인가요? 그럼…….”
“아뇨, 아닙니다. 그렇다기보단,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윗선이라서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이권이 많이 개입되는 거고, 황궁의 살림살이에 직접 연관되는 거라.”
“……윗선이요?”
물론 그럴 것이다. 황실의 물품은 상당히 고가인 경우가 많고, 쓰이는 재정 규모도 상당할 테니.
“아무래도 재정부 쪽인가요?”
“아닙니다. 재정부는 황궁에 예산을 배정하긴 하지만 그 쓰임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그럼, 누가?”
“황궁의 살림살이니까 역시…….”
에녹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나는 그의 표정과 말에서 힌트를 찾으려 샅샅이 살펴보다, 이내 한 사람이 떠올랐다. 설마 거기까지 올라간다고?
“황후……폐하?”
“음, 네, 그렇습니다.”
나는 내 입을 손으로 막아 버렸다. 뭘 믿고 빌리 고든에게 담당자를 연결시켜 주겠다고 말한 거지?
“상단과 한번 계약하면 꽤 오랫동안 유지되니까요. 또 취향과 같은 요소도 맞춰야 하고요. 그래서 그분이 직접 살펴보고 계약을 결정하십니다.”
“아…… 그렇……군요.”
나는 눈앞에서 40억 골드가 날아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황후 폐하를 빌리 고든과 어떻게 만나게 한단 말인가. 내가 무슨 수로.
“안 되겠네요, 아무래도.”
내가 한숨을 쉬며 단념하자, 에녹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어 왔다.
“포기하시려고요?”
“그럼 어떡해요. 당장 저조차도 황후 폐하를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데……. 상인…… 더군다나 평민을.”
빌리 고든이 그렇게 애를 써도 황궁을 뚫지 못한 이유를 왠지 알 것 같았다.
에녹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백작에게는 내가 있지 않습니까. 왜 이용할 생각을 안 하십니까?”
“이, 이용이라니, 황태자 전하를…….”
물론 그런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고, 앞으로도 이용……하겠지만 그렇다고 자기 자신이 직접적으로 언급해 버리면 내가 민망하지.
“괜찮아요, 얼마든지 이용하세요. 이왕 황태자로 태어났는데 이런 도움이라도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입술을 우물거리며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가능……할까요?”
그는 자신을 이용하라더니, 내 질문에 쉽게 답하지 않았다. 뭔가 고민하는 듯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다 천천히 답했다.
“만나게 해 드릴 순 있지만…….”
“황후 폐하께서 빌리 고든 씨를 보실지 안 보실지는 제가 하기 나름이라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조금은…… 성격이 독특하시기도 하고.”
“그렇군요.”
빌리 고든에게도 성사는 네 몫이라 했으니, 그걸 에녹에게 그대로 듣고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에녹이 만나게 해 줄 수는 있다고 해도, 역시 내 입장에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일단 생각만 해도 몸이 뻣뻣해지고 긴장되는 것이 말을 제대로 꺼낼 수 있을지조차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어머니보고 성격이 독특하다니, 대체 어떻길래 저렇게 말하는 걸까?
“조금,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렇게 하세요. 당장 급한 일은 아니니까요. 그 사람도 보채진 않을 겁니다.”
아직 거기까지 말하진 않았는데, 에녹은 내가 얼마를 받았고 그 돈을 어디에 쓸 생각인지 아는 뉘앙스였다.
“혹시, 빌리 고든 씨와 따로 이야기를 나누셨어요?”
“아…….”
“아, 뭐, 이야기 나누셨다는 게 문제가 되는 건 아니죠. 당연히 그래야 하고요.”
그보다도 내 이야기를 했느냐가 궁금했다. 거기까지 물어보려는데, 에녹이 갑자기 주제를 바꿔 내게 말을 건넸다.
“저번에 호위 기사를 알아봐 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랬죠.”
“아무래도 조금 면식이 있는 사람이…… 낫겠습니까?”
나는 당연한 걸 묻는 에녹에게 조금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겠죠? 근데 제가 아는 사람 중에 그런 걸 할 만한 사람이 있을까요?”
하지만 내 이어진 물음에 답은 하지 않고, 에녹은 미간을 찌푸리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역시.”
“누가 있나요?”
“아직은, 본인의 의사를 먼저 확인해 보겠습니다.”
“음, 그래요…….”
생각보다 에녹이 그 부분에 대해 많이 신경 쓰나 보다. 사실 그동안 내내 궁 안에서 지냈기 때문인지, 내 쪽에서 부탁해 놓고도 잊고 있었다.
어쨌든 그 부분은 전적으로 에녹에게 맡기기로 했다. 나는 황후 폐하의 일도 신경이 쓰였고, 당장 또 해야 할 일에 정신이 빠져 있었다.
일단 당장 필요한 80억 골드가 수중에 들어왔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다. 슬슬 이혼 통보서를 작성해야 했다.
***
“전하, 안녕하십니까?”
앳된 얼굴의 갈색 머리 청년이 에녹을 향해 씩씩하게 인사를 했다. 에녹은 고개를 한 번 까딱이고는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청년은 어색하게 좌우를 살피다 소파 위에 걸터앉았다.
“어쩐 일로…… 저를 찾으셨습니까? 더군다나 여기는…….”
이곳은 황실 도서관 쪽 귀빈 전용실이었다. 독서를 할 수 있는 책상과 의자, 약간의 다과, 그리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소파가 놓여 있었다.
황궁 외궁으로 부르면 혹시나 에린과 마주칠까, 약속 장소를 이쪽으로 잡았다.
에녹은 막상 그를 앉히고 보니 조금 짜증이 났다. 아니, 앉히기 전부터, 아니, 그전에 떠올렸을 때부터 내내 짜증이 났던 것 같다. 하지만 에린이 조건을 말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기도 했다. 대체재가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대체할 사람을 갖다 놓는다 해도, 에린의 아름다움 때문에 또 언제 같은 일이 반복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데이먼 로젠 백작. 물어볼 일이 있어서 이렇게 불렀다.”
“예, 전하. 하문하십시오.”
데이먼의 눈빛은 초롱초롱했다. 때가 덜 묻은 청년 기사였다. 저번에 사냥터에서 보니 몸놀림도 가벼웠고, 검술 실력도 제법 수준급이었다.
“경은 결혼하지 않을 건가?”
에녹은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온 질문에 깜짝 놀랐지만 태연한 척 표정을 굳혔다. 원래 이런 걸 물어볼 생각이 아니었다. 이건 정말 무의식중에 나온 질문이었다.
질문을 받은 당사자, 데이먼 역시 눈을 깜빡거리다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어, 그. 하긴 해야 되는데 어차피 부모님도 안 계시다 보니 천천히 정해도 될 거 같아서 말이죠.”
그의 말에 에녹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로젠 백작 역시 에린 스필렛 백작과 비슷하게 어린 나이에 백작의 작위를 물려받았다. 부모 모두가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흠, 괜한 질문을 했군.”
“아닙니다, 아! 혹시 황태자 전하께서 제 혼처를 주선해 주시려고……?”
“아니, 아닐세. 그런 뜻으로 물은 게 아니었네.”
에녹은 손사래를 치며 강하게 부정했다. 털끝만큼이라도 그녀와 이놈과의 관계에 여지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도 계속 망설이고 있는 중이었다. 게다가 같은 백작이 백작의 호위를 맡아 준다는 게 아예 없는 일은 아니지만, 드문 일이었으니까.
무신이 작위가 있다면 보통은 제국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우거나, 아니면 황실 기사단에 들어가 탄탄한 지위를 보장받고 싶어했다.
“그럼……?”
“자네 아직 관직이 없지. 출사를 하지 않을 셈인가?”
“흠, 지금 혼란스러운 영지를 다스리는 것만으로도 분주하여…….”
“군대를 싫어하는 모양이군.”
에녹이 짚어 내자 데이먼이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뭐, 사실 그런 것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문관 체질도 아니고요.”
“자네에게 제안해 줄 자리가 있네.”
“말씀 드렸지만, 전 황실 기사단 쪽은…… 규율이…….”
“아니, 이건 개인 호위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