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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71)화 (71/129)

71화

“지금 황궁에 이 찻잔을 납품한 상단은 어느 곳일까요?”

그 말에 빌리 고든이 이를 악문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스필렛 백작님.”

그의 부름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혹시 아세요? 정말 몰라서 묻는 건데.”

그러자 고든은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일루이 상단에서 납품했을 겁니다.”

정말 몰랐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잘 알았다. 평민 경영인인 빌리 고든은 고위 귀족들의 저택까지는 어떻게든 거래를 틀 수 있었다.

하지만 단 한 곳, 가장 크고 확실한 거래처. 모든 유행의 선두 주자라 할 만한 곳. 제국이 멸망하지 않는 한 절대로 떼어먹지 않을 상대. 바로 황실과는 거래를 하지 못했다.

황실은 오직 귀족이 직접 운영하거나, 보증하고 있는 곳만을 상대로 했다. 아무리 돈이 많고, 아무리 인맥이 넓어도 그곳만큼은 아직 빌리 고든이 파고들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내내 그의 자존심을 좀먹고 있었다. 뛰어난 경영 능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고든 상단이 최고가 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나는 차를 한 모금 들이키고 다시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시선은 온통 내가 아까 가리킨 찻잔으로 향해 있었다.

이글거리는 눈빛을 보니 내가 제대로 짚었구나 싶었다.

“100억 골드. 어떻습니까.”

“빌리 고든 씨, 생각보다 통이 작으시군요.”

“스필렛 백작님, 저는 바보가 아닙니다. 백작님께서는 지금 부군이신 클리포드 소공작님과 사이가 썩 좋지 않으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그에게 빌미를 잡힐 순 없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죠? 사이좋은 귀족 부부가 있긴 있나요?”

“물론 그렇습니다만, 백작님이 세 배를 부르신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

나는 가만히 그의 눈을 보고 있다 잠시 눈을 감았다.

“음, 흥미가 없으시다니 유감이군요. 저는 다음 면접을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의 개인적인 거래는 어쨌든 부수적인 일이었다. 주가 되는 것은 마법석 광산 개발 투자이다.

그가 단지 내 빚과 작위만을 놓고 보다 진짜 중요한 일을 놓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했다.

어쨌든 마법석 광산의 소유주는 나였으니까.

이것이 소위 갑질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가 광산 투자로 얻을 이익과 황실과 연이 닿았을 때 얻을 이익을 합하면 120억 골드 정도는 절대 크지 않았다.

내가 일어날 기색을 보이자 빌리 고든이 다급하게 따라 일어나 나를 불렀다.

“스필렛 백작님!”

나는 느리게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네, 말씀하세요.”

빌리 고든이 숨을 참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 한숨처럼 내뱉었다.

“120억, 드리겠습니다.”

나는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그럼 그렇지. 유쾌하진 않았지만 들어는 보기로 했다.

“당장 급하실 80억을 먼저 드리겠습니다.”

“나머지는요?”

빌리 고든은 긴장한 눈초리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 쪽에서는 거절해도 상관없는 일이다.

내가 이 거래에 귀족을 끌어들이지 않은 건, 그들의 깐깐한 성미와 사교계에서의 귀찮은 소문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금 성가실 뿐이지 못할 것도 없다.

“저에게도 일종의 안전장치가 필요합니다. 나머지 40억은 황실의 구매 결정자와 연결되었을 때, 그때 드리겠습니다.”

“빌리 고든 씨.”

“백작님. 120억이 어떻게 보면 별것 아닌 돈이지만 일단 저희 고든 상단의 유동 자금 중 3할을 차지합니다. 제가 경영자이지만 이 정도 돈을 움직이려면 나머지 상단 관리자들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그의 다급한 설명을 들으며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여 줬다. 내가 혹 거절하면 어쩌나 긴장했는지, 그 작은 고갯짓에도 고든은 목소리가 차분하게 잦아들었다.

“그래서, 만나게만 해 주신다면 40억을 드리겠습니다.”

나는 입매를 가로로 길게 굳히며 천천히 다시 의자 위에 앉았다.

그런데 황실 구매 담당자가 누구지? 떠올려 봤지만 전혀 몰랐다. 하지만 내가 계약을 성사시켜 주는 것도 아니고 만나게만 해 주는 거라면, 어려울 것 없을 것 같았다.

어차피 에녹에게 말해서 연결시켜 주면 되겠지, 나는 그렇게 태평하게 생각하며 그의 조건을 수락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계약 자체는 빌리 고든 씨의 몫입니다. 성사에 관한 부분은 일체 관여하지 않을 겁니다.”

“네, 물론입니다.”

나와 빌리 고든은 그 자리에서 바로 계약서를 작성했다.

마법석 광산 개발의 1차 투자 계약서를 작성하고, 이면에 나와 빌리 고든 간의 계약서를 작성했다.

두 장씩 작성하여 양쪽 모두 사인을 하고 두 종이 사이에 인장을 찍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가 떠난 후, 채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봉인된 봉투가 내게 전달되었다. 꽁꽁 감싸인 봉투는 내 마법석 팔찌가 아니면 풀 수 없게 만들어져 있었다.

거기에 팔찌의 보석을 갖다 대니 꽉 닫혀 있던 봉인이 풀리고 봉투를 열어 볼 수 있었다. 봉투 안에 있는 것을 보고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바로 고든 상단의 명의로 발행된 약속 어음이었다. 거기에 80억이라는 숫자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나는 그것을 다시 얼른 봉투 속에 집어넣고는 얼른 품에 감췄다.

그리고 며칠 후, 에녹에게 잠시 시간을 내 줄 것을 요청했다. 빌리 고든이 요청한 일에 관해 물어볼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마침 식사 시간인데 안쪽에서 식사나 하시면서 얘기하시죠.”

“그래요, 그럼.”

나는 그 안쪽이 외궁 안쪽 어디 식당일 거라고 생각했다. 외궁에는 많은 사람들이 근무하는 만큼 안쪽에 식사를 제공하는 여러 종류의 식당들이 있었다.

외궁 사람들의 대부분은 식사를 거기서 해결하거나, 너무 바쁜 상황이라면 시종에게 시켜 음식을 집무실 안으로 배달시키기도 했다.

나 역시 며칠을 이곳에서 지내다 보니 그 식당들이 있는 방향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에녹이 향하는 방향은 전혀 달랐다.

“전하?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그를 따라가면서 둘러보니 그 많던 사람들이 점점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아무래도 궁의 더 깊숙한 곳으로 온 것 같았다.

궁 안을 순찰하는 기사와 병사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을 때쯤, 높은 담장과 커다란 문이 보였다.

“전하, 이곳은 내궁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이곳으로 온 건가요?”

문 앞에 선 기사들은 황태자임을 확인하고는 절도 있게 고개를 숙이고,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내 집에서 제대로 식사 대접을 하고 싶었습니다. 안 되겠습니까?”

담담하게 묻는 그의 말투와 달리 눈빛에서는 불안감이 묻어나왔다. 사실 그가 가자고 명령을 한다면 나는 기분과 상관없이 두말하지 않고 따를 것이다.

에녹은 내게 한동안 가장 필요한 사람이었으니까.

초대를 하면서도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딘가가 또다시 울렁거렸다.

“요새 바빠서 제대로 식사도 못 하셨지 않습니까.”

“……저는 좋아요, 다만 제가 이 내궁에 들어가도 될까요? 조심스러워서…….”

솔직한 심정을 그에게 이야기했다. 여기는 황족들만 출입하는 곳이 아닌가.

“내 손님이니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에녹이 에스코트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잠시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러다 문득 짙은 카키색의 치맛자락이 눈에 들어왔다.

“미리 알려 주셨으면 제대로 옷을 갖춰 입었을 텐데…….”

아쉬운 듯 중얼거리자, 에녹은 걷다 멈춰 잠시 나를 슥 훑어봤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도도하게 웃었다.

“그래도 예쁘기만 하죠?”

내 질문에 그의 눈동자가 갈 길을 잃고 방황하기 시작했다.

“안 그런가요, 황태자 전하?”

왠지 그런 에녹의 반응이 재밌어서 한 번 더 물었다. 그러자 그는 찬찬히 나를 살피면서 느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에녹이 차라리 그 특유의 말투로 ‘네, 그렇습니다.’라고 했으면 나았을까. 정말로 그렇다는 듯이 눈빛으로 대답을 하니 오히려 민망해졌다.

“어서 가요, 황궁의 요리라니 궁금하네요.”

나는 괜히 그를 재촉했고, 은연중에 웃는 그의 입매를 봤다. 누가 누구를 놀리는 상황인지 애매해져 버렸다.

역시 황족들이 사는 내궁이라 그런지 걸으면서 눈이 닿는 모든 곳이 훨씬 화려하게 잘 꾸며져 있었다.

계절을 거스르고 피어난 꽃들이 길목마다 자리하며 오고 가는 이를 반겼고,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정교한 조각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저 꽃들은 마법으로 피운 거겠죠?”

에녹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해 줬다.

“맞습니다. 하지만 단지 눈요기를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저 꽃들은 하나하나가 다 마법 트랩입니다.”

“와, 마법 트랩이요?”

“이곳은 내궁이니까요. 침입자를 방지하기 위해서죠.”

“하긴…….”

하지만 마법 트랩을 저렇게 쭉 유지하기 위해서는 마법석도 상당량 필요할 것이다.

역시 제국의 황실 아니랄까 봐, 돈 쓰는 방식도 정말 화끈하다. 클리포드 공작의 타운 하우스 내에 마법 램프가 겨우 두 개였던 걸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아니, 이상하지. 겨우 두 개라고?’

조금 찜찜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곧 놓쳐 버리고 말았다. 어차피 그 집안일은 이제 나와 상관없는 일이 아닌가. 마법석이 도둑을 맞았든 말 든 관심 갖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에녹의 안내를 따라 걷다 보니 드디어 황태자궁이 나왔다.

한 제국의 차기 황제 후보가 기거하는 궁이다. 오면서 이런저런 황녀궁, 황자궁들을 보면서도 꽤 크다고 생각했는데, 확실히 황태자궁은 규모가 그 몇 배에 달했다. 막상 앞에 서니 긴장됐지만, 잘 가다듬으며 그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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