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에녹이 주재하긴 했지만 어쨌든 내 요청 하에 이루어진 회의였다. 그는 조금 물러난 상황에서 나를 보며 시작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열 명을 가려 냈지만 이들 모두를 면접 보는 건 시간 낭비인 것 같아요. 함께 옥석을 가려내 주시면 좋겠어요.”
나는 먼저 입을 열어 그들에게 이 회의의 주제에 대해 설명했다.
모두들 수긍하는 와중에 보조사무관 밀라 버튼만은 조금 짜증 어린 눈으로 나를 보다 고개를 픽 돌려 버렸다.
어쨌든 회의에서 총 네 명이 추려졌다. 그들에게 면접 일자를 통보할 일만 남았다.
회의가 끝난 후, 나는 남은 네 명 중 한 명의 제안서를 유심히 살펴봤다.
제안서는 본인들이 직접 작성한 것처럼 보였다. 필체가 모두 제각각이었고, 분량도 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명의 필체가 유독 화려하고 익숙했다.
‘어디지, 어디서 봤더라.’
그리고 자금도 제일 많고, 유동성도 풍부했고, 신용도도 좋았다. 무엇보다도 광산 개발에 대한 투자도 이미 여러 번 해 봤던 사람이었다.
특이했던 건,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귀족이었던 것에 반해 이 사람은 평민 출신인데도 이만한 부를 이루었다는 점이다.
‘전부 합법적으로 이룬 거라면, 정말 대단한데.’
아직 면접을 보기도 전이었지만, 이미 내 머릿속은 이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에녹이 뒤에서 다가와 내게 질문했다. 회의실에는 이제 우리 둘뿐이었다.
“아뇨, 그렇다기보단…….”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군요.”
에녹의 말에 나는 앉은 채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봤다. 그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 웃음의 의미는 모르겠지만 그를 보는 순간 아까 추궁하려다 말았던 일들이 떠올랐다. 나는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고, 에녹이 한 걸음 물러나 의자를 빼내 주었다.
나는 그와 마주 보고 서서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그런데, 황태자 전하의 집무실은 야근이 없다면서요?”
“아, 그게 그러니까 아예 없는 건 아니고.”
“그러고 보면 며칠간 저만 실컷 야근한 셈이네요. 원래 이미 후보자 서류도 다 골라 놨다고 하던데요.”
“…….”
에녹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딱 다문 채 아무 말도 못 했고, 나는 눈을 흘기며 그를 보다 작게 한숨 쉬었다.
한숨을 쉰 이유는 그런 그에게 마음이 약해지는 나 자신 때문이었지만, 에녹은 내가 화가 아주 많이 났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다급하게 그가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백작, 미안합니다. 하지만 백작을 그 집에 계속 두기에는 불안해서 이런 방법을 쓴 겁니다.”
“알아요, 하지만 그냥 그렇다고 말해 줬다면 납득했을 거예요. 괜히 며칠간 눈이 빠지게…….”
말을 하던 나는 그가 괜히 나에게 헛수고를 시켰을 리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 많은 서류를 보면서 나는 사실 꽤나 유용한 정보를 얻었다. 수많은 대부호들의 이름과 가문, 그들의 관심사, 투자처, 돈의 흐름을 볼 수 있었고 또한 소소하게나마 평판도 알 수 있었다.
물론 빠르게 넘겼기 때문에 그 많은 걸 다 외우진 못하더라도, 잔상이나마 기억하고 있는 건 언젠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내가 말을 멈추고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자, 에녹은 내가 화가 덜 풀려서 그렇다고 판단했는지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다.
“내가 어떻게 하면 화가 풀리시겠습니까.”
그가 이렇게까지 말할 일은 아닌 것 같기도 했지만, 그래도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부탁할 일을 떠올렸다.
“개인적으로 호위 기사를 고용할까 하는데, 전하께서 믿을 만한 사람을 추천해 주셨으면 해요.”
“그렇다면 황실 기사단 중 한 명을 백작의 호위로…….”
에녹의 대답에 나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제 사람을 필요로 해요. 물론 제가 찾아 나서야 하는 거고, 제 사람으로 만드는 건 제 몫이지만요.”
그녀의 말에 에녹이 잠시 누군가 떠오른 듯 눈을 빛내다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그 다채로운 표정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역시 무리한 부탁이었나요? 그럼…….”
“아아, 아닙니다. 조금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에녹의 표정은 여전히 애매모호했다.
***
그렇게 며칠 후, 마법석 광산 개발 투자자들을 모집하기 위한 면접이 시작되었다.
추려진 네 명은 광산 투자자를 찾기 위한 조건만 보자면 비슷했다. 모두 상단을 갖고 있었고, 따라서 자금의 보유 규모나 유동성, 신용도도 좋았다.
넷 중에 셋은 귀족이었고, 한 명은 평민이었다.
모든 조건이 같은 상황에서 둘을 골라야 했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은 나와 조용히 개인적인 거래가 가능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을 모두 제치고, 서류상 유독 신경 쓰였던 화려한 필체를 가진 사람을 제일 먼저 불렀다. 바로 평민 출신의 대상인, 빌리 고든이었다.
“빌리 고든 씨?”
“네, 스필렛 백작님.”
에녹을 비롯한 황태자 집무실 사람들과의 간단한 면접이 끝나고, 나는 그와 독대를 청했다.
생각보다 그리 나이가 많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평민인데도 나름대로 매너를 익혀 이 황궁 안에서의 행동거지가 크게 어색하지 않았다. 아마 그가 상대하는 사람이 귀족들이 많기 때문에 따로 선생을 초빙해서라도 익혔을 것이다.
평민이라 말을 놔도 되긴 했지만, 어쨌든 지금은 투자자 후보로서 이 자리에 왔기 때문에 그에게 존칭을 써 주기로 했다.
마법석 동굴의 소유권은 나에게 있었기 때문에, 에녹은 최종 결정의 권한도 내게 전적으로 맡겼다.
황실의 수익도 연관이 되어 있는 일에 이렇게까지 밀어 주니 에녹에게 고마우면서도 조금 불안했다. 과연 내가 잘 판단할 수 있을까?
빌리 고든은 웃으면서 날 보고 있었다. 그냥 기분이 좋은 웃음이라기보단 어딘가 의미심장한 웃음이었다.
“나를 아시나요?”
“편지로 한 번 찾아뵌 적이 있죠.”
“편지요?”
나는 잠시 무슨 말인가 고민하다가 퍼뜩 떠오르는 기억에 움찔 몸을 떨었다. 그리고 탁자 위에 놓인 서류의 필체를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안 그래도 어디선가 많이 봤다고 생각했는데.
“……혹시 작위를 팔라고 했던 그분이신가요?”
“오, 이름을 쓰지 않았는데 기억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빌리 고든이 바로 수긍했고, 나는 그를 조금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그걸 원하세요?”
“파실 의향이 있다면 사양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나는 그에 대한 경계심이 들었지만, 애써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기 위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다리를 꼬았다. 그의 정체를 알았으니 태도를 조금 수정하기로 했다.
“돈은 있는데, 신분은 낮고, 정보를 얻기도 힘들고, 평민이라는 이유로 보지도 않고 번번이 거래를 거절당하고.”
내 말이 이어질수록 빌리 고든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져 갔다.
“돈보다 신분이라, 더럽고 치사해서 그 많은 돈을 주고라도 사겠다고 결심한 거군요.”
“그렇습니다.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빌리 고든은 조금 붉어진 얼굴을 하고서도 차분히 내 말에 대답했다. 역시 노련한 상인답게, 완벽하진 못해도 감정을 잘 다스릴 줄 알았다.
그가 정말 사교계의 귀족이었다면 아마 얼굴색조차 바꾸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거래 상대로는 더없이 좋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느끼셨잖아요, 돈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그 신분의 벽을요. 그러니 돈 몇 푼 준다고 어떤 귀족이 그걸 팔겠어요?”
그러자 빌리 고든이 눈썹을 까딱하더니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하지만 백작님께서는 그렇게 여유로운 처지가 아닌 거로 알고 있습니다. 클리포드 소공작 부인이 되셨다지만, 아직 빚을 절반밖에 탕감하지 못했죠.”
“아, 그걸 알고 있다니 얘기가 더 빨라지겠네요.”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빚에 대해 언급하니 마음이 껄끄러웠지만, 나는 오히려 픽 하고 웃어넘기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말 그대로 절반은 이미 갚은 돈이에요. 그 나머지 절반, 겨우 그 정도로 신분을 얻으시겠다니 너무 손해인걸요. 그 열 배가 되어도 한참 모자라죠.”
“팔지 않겠다는 말씀을 아주 돌려 하시는군요.”
빌리 고든이 조금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내가 앞으로 무슨 말을 할지는 꽤 궁금한 모양이었다.
“세 배.”
내 말에 빌리 고든이 눈을 크게 떴다. 방금 내가 열 배가 되도 팔지 않겠다는 말을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아까 말씀하신 절반의 금액, 40억 골드의 세 배를 주면 작위를 빌려 드리죠.”
사실 두 배만 돼도 빚은 모두 갚을 수 있다. 하지만 한동안의 생활을 생각하면 세 배는 필요하다.
스필렛 백작은 정말로 작위뿐이었고, 영지도 이전에 이미 다 팔아 버렸기 때문에 따로 수입이 없었다.
마법석 광산 개발이 시작되고 그것이 유통을 거쳐 판매되어 수익을 올리기까지는 어쨌든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것이다.
여기가 쉽게 취직을 해서 돈을 벌 수 있는 세계도 아니었고, 어쨌든 나머지 골드는 불확실한 미래를 위한 자산이었다.
“그럼 120억 골드군요. 아무리 저라고 해도 정말 큰돈입니다. 그리고 작위를 빌려 준다는 게 무슨 의미입니까?”
“말 그대로예요. 작위를 줄 순 없어요. 하지만 당신이 귀족이 아니라서 못 했던 일들을 내 작위를 내세워 해결해 주겠다는 말이에요.”
나는 그 말을 하는 동안에 빌리 고든의 눈빛이 점점 반짝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 관심 있는 눈빛과는 달리 입에선 다른 말을 했다.
“저는 이미 큰 부를 이루었습니다. 작위가 없어 불편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큰돈을 지불할 만큼 간절한 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가 흥정을 시도했다.
“두 배 어떻습니까, 80억 골드.”
“필요 없다는 것치고는 바로 금액을 제시하시네요.”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나는 팔을 뻗어 앞에 놓인 찻잔을 우아하게 들어 보였다. 그리고 보란 듯이 그 찻잔을 이리저리 돌려 보여 주었다.
“이 찻잔, 예쁘죠?”
딱 그 정도 손짓만으로도 빌리 고든은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내내 얌전하던 그의 목울대가 울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