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집무실 앞으로 쭉 뻗은 복도에는 램프의 등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그리고 야근 중인 사람들이 아직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에녹은 그중 램프 하나를 들더니 집무실 문 앞에서 왼편으로 꺾어 들어갔다. 그곳은 상대적으로 어둡고 조용했다. 그리고 몇 걸음 더 가니 문이 나타났다.
그 문을 열자 익숙한 사람이 그 안에 있었다.
“리아?”
“아, 마님.”
리아가 커다란 가방 안에서 내게 익숙한 물품들을 꺼내 여기저기 정리하고 있었다.
영문을 몰라 에녹을 보자, 그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한동안 여기 머무실 것 같아 저택에 기별을 넣었습니다. 아무래도 편히 지내시려면 익숙한 사람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뭐 얼마나 있는다고.”
“그럼 오늘은 이만, 편히 쉬십시오. 어차피 저 서류들은 밤을 새도 다 못 볼 겁니다.”
“저기, 저……!”
에녹은 내 부름에도 불구하고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외박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한편으로는 잘됐다 싶기도 했다. 이제 그 타운하우스로 가는 게 께름칙하기도 해서, 슬슬 다른 집을 알아볼 생각이었다.
그때까지 여기서 시간을 벌 수 있다면야, 나쁠 것 없다.
잠시 소파에 앉아 방 안을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넉넉한 공간에 침대와 소파, 작은 테이블과 화장대, 욕실로 보이는 문까지 있었다.
직원들의 야근이 잦아서 그런 건지, 숙직을 위한 방 치고는 꽤나 화려하고 안락했다. 이 정도면 황궁 직원들에 대한 복지는 꽤 좋은 편인가. 뭐 그런 생각을 했다.
리아가 소파 뒤로 다가와 단정하게 올린 머리를 풀어 주었다. 길게 웨이브진 머리가 목과 어깨 위로 사르륵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리아는 그 위로 어깨를 뭉근하게 주물러 주며 내게 물었다.
“일단 씻으시겠어요? 목욕물을 받아 둘까요?”
“그럴까? 아, 잠시만.”
나는 벌떡 일어나 다시 방에서 나갔다. 집무실에서 서류를 좀 가져와서 마저 볼 생각이었다.
원래 아무것도 없이 깜깜했던 복도 벽에는 램프 하나가 덩그러니 달려 있었다. 아마도 아까 에녹이 돌아가면서 달아 놓고 간 모양이었다. 그것을 보자 괜스레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복도를 따라 지나가며 아까 나왔던 집무실 문 앞에 섰다. 그런데 안쪽에서 뭔가 두런두런하는 이야기 소리가 들렸다.
‘하긴, 아까도 다들 아직 퇴근 전이었지.’
나는 천천히 문을 열었고, 그 순간 슉 하고 검은 잔상 같은 것이 방 안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방 안에는 에녹 혼자만이 열린 창문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전하? 혼자 계셨나요?”
에녹은 일순간 당황하는 눈빛이었다가, 이내 능숙하게 표정을 바꿔 보였다.
“백작, 왜 다시 오셨습니까.”
“자기 전에 서류를 조금 더 보려고요. 워낙 양이 많아서…….”
나 역시 담담하게 그를 바라보며 내 책상으로 다가갔다. 사라진 건 아마 에녹의 그림자 기사단일 것이다. 소설에서 가끔 등장해서 알 수 있었다.
무슨 용무인지 한편으로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 않기로 했다.
오늘따라 바람이 많이 부는 날씨였다.
열린 창문으로 세찬 바람이 들어와, 풀어헤친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휘날렸다.
서류 더미 중 일부를 집어 올리고, 나머지는 그 바람에 날리지 않게 무거운 것으로 눌러 놓았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머리카락 끝을 만지는 손길이 느껴졌다.
내가 놀라서 뒤를 확 돌아보자, 어느새 다가온 에녹이 손을 떼며 뒷걸음질 쳤다.
“전하?”
“아, 그, 바람이…….”
“바람이?”
“아, 음…… 미안합니다, 나도 모르게 손이.”
에녹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아니, 그렇게까지 사과할 일은 아닌데.
나는 그를 마주 본 채 아예 내 머리카락을 집어서 그 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궁금하셨어요? 그냥 만져도 되는데.”
머뭇거리던 에녹은 끝을 살짝 손으로 만져보다 금방 놓아 버렸다. 그의 얼굴이 아까보다 훨씬 더 새빨갛게 물들어 있어, 괜스레 시선이 갔다.
“저…… 그만 가 볼게요.”
“네,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시간은 많으니까요.”
나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나와 버렸다. 시간이 많다, 라. 정해진 기한은 없으니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루퍼트가 오기 전에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선 서둘러야 했다.
방으로 돌아가 목욕을 하고 난 후, 나는 램프의 불빛에 의지해 좀 더 서류들을 살펴보았다.
“오, 이 사람 괜찮네.”
보다 보니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의 프로필 위에는 누군가가 체크 표시를 해놓은 흔적이 있었다.
나는 의아하게 그것을 보다 한쪽으로 빼놓고는 나머지 서류들을 살펴봤다. 그리고 새벽녘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
며칠 후, 그 많던 서류를 거의 다 봤을 때쯤에 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괜찮다고 생각해서 빼놓은 사람들의 이름 위에는 어김없이 체크 표시가 되어 있었다. 열 장 중 여덟 장이 그랬다.
언젠가 에녹에게 물어봤지만, 그는 잘 모르겠다며 얼버무리고 넘어갈 뿐이었다. 그리고 에녹이 아직 출근하지 않은 오늘 아침, 나는 보좌관인 리암에게 다시 물었다.
리암은 오늘도 어김없이 바빠 보였지만, 에녹이 없는 지금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리암은 여전히 자신이 들고 있는 문서에 코를 박고 있다가 내 질문에 시선만 흘긋 돌린 채 대답했다.
“아, 그거 저희가 일차로 보고 뽑아 놓은 사람을 따로 체크해 놓은 겁니다.”
“그래요? 그럼 왜 굳이 저에게 다 보라고…….”
“아, 그, 어, 그러니까…… 다시 한 번 꼼꼼히 보면 좋을 테니까? 그렇게 지시하신 게 아닐까요? 황태자 전하께서?”
그렇게 말한 리암은 갑자기 당황해서 땀을 뻘뻘 흘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가 버렸다.
나는 그의 말을 곰곰이 되새기다 확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이미 다 골라 놨으면서 나한테 다 보게 한 거야? 저 많은 걸?”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데, 문이 열리고 사무관 두 명과 보조 사무관 하나가 들어왔다. 집무실에는 보조 사무관도 둘이었는데 한 명은 남자, 한 명은 여자였다.
지금 들어온 건 남자 보조 사무관 레논 켐벨이었다.
“요새는 제법 선선해져서 걸어올 만하네.”
사무관 플로라가 하는 말에, 보조 사무관 레논이 고개를 흔들었다.
“플로라 님은 집이 가까워서 그렇겠지만, 전 무리예요. 꼭 마차를 타야 해요.”
“하긴 그렇지.”
레논 켐벨은 보조 사무관으로서는 드물게도 평민이었다. 평민 신분으로 이 황궁에서 일한다는 건 그만큼 그가 우수한 재원이라는 뜻이었다.
본인에게는 비밀이었지만, 곧 그가 남작위를 받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던 내가 플로라에게 물었다.
“……집에서 출퇴근을 해요? 야근을 하고 돌아가면 너무 늦지 않나요?”
내 질문에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플로라가 무슨 말이냐는 듯이 대꾸했다.
“리암 님만 빼고, 저희는 아무리 바빠도 야근 안 해요.”
플로라의 말에 보조 사무관 레논 켐벨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맞장구쳤다.
“맞습니다. 황태자 집무실은 다른 곳에 비해 야근이 거의 없다는 것 때문에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이곳으로 배정 받았는걸요.”
“그리고 숙직실은 냄새나고 비좁고…… 침대는 삐걱거리고. 늦더라도 집에 가는 게 나아요.”
플로라는 생각만 해도 싫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신의 자리로 갔다. 뭐지, 대체.
나는 여태 황궁 복지가 좋은 건가 생각했는데. 나에게 배정된 방은 뭐지?
그리고 곧 여자 보조 사무관 밀라 버튼이 들어왔다.
버튼 자작가의 영애인 그녀는 학술원 성적도 뛰어났고, 자원해서 이곳 황궁에서 일하기를 청했다고 한다.
보통 귀족가 영애들이 학술원보다는 과외를 선호하고, 곧 나이가 차면 결혼하는 것과 다른 행보였다.
나는 그런 밀라 버튼의 이야기를 듣고 호감을 느꼈지만, 그녀는 다른 모양이었다. 소개받은 첫날부터 나를 향한 눈빛이 곱지 않았다.
남자 사무관 아담 존스턴 자작도 첫날 그랬지만, 점차 지내면서 유순해진 반면에 밀라 버튼과는 사흘째이지만 좀처럼 가까워질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지.’
친교를 쌓으러 온 게 아니니까, 나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아무 상관없었다.
그나저나 문제는 황태자 에녹이었다. 지금 들어 보니 서류도 원래는 이미 다 검토되어 있었고, 굳이 야근을 하며 궁에 머무를 필요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에녹은 내게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저 방에 머물게 하고, 또 서류도 이렇게 많이 안겨 줬다.
그의 의도는 알 것 같았다. 아마도 나를 그 집에 있게 하는 게 신경 쓰이는 거겠지.
“솔직히 그렇다고 하면 될 것을.”
나도 모르게 하던 생각을 소리 내어 중얼거렸고, 그 소리에 흘긋 나를 보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작게 헛기침을 하며 추려진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총 열 개, 그것들을 다시 한 번 꼼꼼히 살폈다. 으음, 여기서부터는 나 혼자 결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고 에녹과 아까 나갔던 황태자 보좌관 리암이 들어왔다.
에녹의 난처한 표정을 보아하니 리암이 아까 나와 나눈 이야기를 전해 준 모양이다. 그리고 그가 들어오자마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 앞으로 나섰다.
걸어오던 에녹은 주춤거리며 불안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런 그를 보니 괜히 더 곤란하게 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꾹 참고 원래 하려던 말을 했다.
“전하, 말씀하신 서류를 모두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니 회의를 주재해 주셨으면 합니다.”
내 말에 잔뜩 긴장하던 그가 입을 살짝 벌린 채로 나를 쳐다보았다.
“전하?”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곧 나의 요청에 의해 회의가 열렸다. 회의의 주제는 당연히 누가 제일 돈이 많고, 또 믿을 만한가를 가리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