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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68)화 (68/129)

68화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던 루퍼트는 제 상처를 보고 ‘아.’ 하고 입모양을 내더니, 클로에를 향해 나가라고 손짓했다.

“미안하지만, 이 방은 내가 먼저 들어왔습니다. 문을 잠그지 않은 건 실수이지만…….”

“그게 아니라, 루퍼트 님이 이곳에 들어가는 걸 보고 따라 들어온 거예요.”

클로에는 바구니를 들고 루퍼트의 곁으로 갔다. 그리고 소파 아래 바닥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루퍼트가 수건으로 감싸고 있는 상처를 보려고 했다.

루퍼트는 흘긋 바구니에 든 것들을 보았다. 약병과 붕대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여기서 치료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내가 다친 건 어떻게 알았죠?”

“피 냄새가 났거든요.”

평범한 여자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조금 이상했지만, 루퍼트는 그냥 클로에가 하는 대로 내버려 뒀다. 아닌 게 아니라 치료를 좀 하긴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의사 가문이라니 뭐라도 할 줄 알려나.

그런데 아까부터 열이 올라 점점 정신이 혼미해졌다. 꼭 술에 취한 기분이었다.

‘고작 샴페인 두 잔에 취한 건가?’

그리고 자신의 상처를 돌보고 있는 클로에의 가느다란 목덜미가 눈에 들어왔다. 상처를 건드리는 손길이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예쁘긴 예쁜 여자야. 아까 춤출 때보다 어쩐지 지금이 더…….’

클로에는 특유의 상냥하고 애처로운 느낌이 있었다. 누구와는 참 많이 달랐다.

그렇게 계속 그녀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점점 더 울렁거렸다.

붕대를 감기 위해 그녀가 더 가까이 다가오자, 달콤한 향기가 났다. 아까 샴페인의 맛과 비슷한 향기였다. 그 향기를 느끼자마자 뜨거운 기운이 목 안에서 꿈틀거렸다.

그리고 어떻게 된 거지?

루퍼트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침대 위였다. 옆에는 헐벗은 클로에가 잠들어 있었다.

깨어난 클로에는 애처롭게 울면서 자신이 루퍼트를 짝사랑했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는 루퍼트에게 부담을 느낄 필요 없다고 말한 뒤에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후, 루퍼트는 계속해서 클로에가 눈에 밟혔다. 며칠을 고민하던 루퍼트는 결국 클로에를 찾아갔고, 그녀와 만남을 갖기 시작했다.

루퍼트는 클로에와 만나면 만날수록 그녀에게 푹 빠져 버렸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묻지 않는 클로에에게 편안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를 만나는 동안에도 에린의 존재는 신경 쓰였다.

그전에는 루퍼트가 있는 곳에 자주 에린이 자주 오곤 했었다. 하지만 클로에를 만난 이후부터는 에린이 잘 보이지 않았다. 루퍼트는 그 사실이 묘하게 거슬렸다.

그래서 그는 그냥 내버려 뒀다.

스필렛 백작이 사기꾼에게 속아 무리한 투자를 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저 지켜만 봤다. 백작을 만났을 때 아주 살짝, 부추기기도 했다.

빈털터리가 된 에린이 결국 자신을 찾아오기를 기다리면서.

***

며칠 후, 나는 황궁의 외궁으로 향했다.

마법석 광산 개발의 자본을 책임질 투자자 면접을 보기 위해서였다.

루퍼트는 장례식 후, 비어 버린 영지를 수습하기 위해 발이 묶인 상황이었다. 이럴 때 최대한 많은 일을 진행시켜 놔야 했다.

황궁은 내궁과 외궁으로 나눠져 있었고, 황태자의 집무실은 양쪽에 다 있다고 했다.

외궁의 풍경은 뭐랄까, 정말 모두가 정신없이 바빠 보였다. 눈 밑이 퀭한 사람들이 빠른 발걸음으로 나를 스쳐 지나갔고, 그중에는 여자들도 있었다.

사교계에서 봤던 여자들과 달리 치장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모양새였지만, 그 모습이 왠지 멋져 보였다.

다행히 나도 그렇게 튀지 않는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이건 썩 다행이었다.

안쪽의 모습을 천천히 둘러보며, 나는 에녹이 미리 알려 줬던 황태자의 집무실로 향하기 위해 이 층으로 향했다.

그때 막 나를 마중하기 위해 내려오던 에녹과 마주쳤다. 천천히 걸어 내려오던 에녹이 나를 발견하자마자 성큼 다가섰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치맛자락을 들어 무릎을 굽혔고, 에녹은 애매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만 까딱 숙였다.

“내가 좀 늦은 것 같군요.”

“괜찮아요, 위치를 알려 주셨잖아요.”

“자, 그럼 가시죠.”

에녹은 앞서 걸어 올라가며 흘끔흘끔 뒤에 있는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를 따라가면서도 왜 그러는지 몰라 갸우뚱했다. 그러다 그가 에스코트 해 주지 않는 상황을 스스로 신경 쓰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확실히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가 바쁘게 걷기만 할 뿐 누가 누굴 잡아 주고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는 어서 가라는 듯 그에게 고갯짓 했고, 그는 반 보 정도 앞서 걸으며 나를 안내했다.

“오늘부터 이곳에서 일하시게 될 겁니다, 백작.”

에녹은 그렇게 말하며 긴 복도를 따라가다 커다란 양문 앞으로 나를 안내해 줬다.

양문 옆으로 기사들이 있었고, 그들은 황태자를 보자 바로 그 문을 열어 주었다.

안은 생각보다 넓었다. 그리고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그들은 황태자가 오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고 서류 더미에 각자 코를 박고 있었다.

에녹이 손뼉을 마주치자 그제야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이쪽으로 모여.”

그중 가장 눈 밑이 거뭇거뭇한 사람이 며칠이나 감지 못한 것 같은 초록 머리를 벅벅 긁으며 가장 먼저 앞으로 나왔다.

“스필렛 백작, 이쪽은 내 수석 보좌관이면서 이곳의 실장인 리암 스티븐스 백작입니다.”

“리암 스티븐스라고 합니다, 이곳에서는 편하게 리암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잠이 그득 담긴 보라색 눈동자로 그는 그렇게 말했다.

“네, 리암 님. 반가워요, 저도 역시 편하게 불러 주세요. 에린 스필렛이라고 해요.”

또 차례로 나온 사무관 둘을 소개받았다.

“이쪽은 아담 존스턴 자작, 여기는 플로라 월시 자작입니다.”

남자, 여자 각각 한 명이었다. 그중 고개만 까딱이는 아담 존스턴이란 사람은 나를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처음 보는 사이가 아닌 건가? 아무튼 결코 우호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플로라 월시라고 해요, 에린 님. 만나 뵈어서 정말 반가워요.”

반면에 플로라 월시는 내게 친절했다. 그리고 보조 사무관 둘이 더 있다고 했는데, 그들은 외근을 나가 이곳에 없다고 했다.

둘은 천천히 소개받기로 하고, 나는 에녹에게 자리를 안내받았다. 하지만 내 자리를 본 순간 믿을 수 없는 눈으로 그와 내 책상을 번갈아 보았다.

“이게…… 제 자리라고요?”

“예, 맞습니다. 스필렛 백작, 이곳에 앉아서 후보자 서류를 검토해 주시면 됩니다.”

“아니, 그게 무슨.”

그 책상을 보고 놀란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 번째는 자리가 바로 에녹의 책상 바로 옆 자리라는 점이었다. 수석 보좌관인 리암보다도 내 책상이 그와 가까웠다.

두 번째는 책상이 다른 직원들의 것보다 훨씬 크고 넓고, 척 봐도 목재부터가 고급 재질이었다. 그러니까 황태자의 책상과 크기나 모양이 비슷했다.

이렇게 특별 취급을 받아 버리니, 아담 존스턴이란 사람의 눈빛이 곱지 않은 것도 왠지 이해가 됐다.

세 번째는, 그 책상 위에 쌓여 있는 서류의 양 때문이었다. 언뜻 봐도 어마어마한 양의 종이 더미들이 탑 두 개를 이루어 쌓여 있었다.

“저게 다 후보자 서류예요?”

“저희가 이미 간추려 놓은 게…… 억.”

내 물음에 보좌관 리암이 대답하려 하는데 에녹이 갑자기 무심하게 팔로 그의 가슴께를 툭 쳐서 밀어 버렸다.

“그렇습니다, 전부 백작께서 직접 확인하셔야 합니다.”

리암과 사무관 둘이 눈으로 내게 뭔가를 말하려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들의 눈빛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결국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문 채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고, 나 역시 당황한 마음을 금치 못한 채 내 자리라는 곳에 앉았다.

거기 앉아 보니 아예 서류의 탑에 가려 앞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왜 이렇게 많아요?”

“마법석 광산은 확실한 수익이 보장되는 투자처입니다. 당연히 몰려들 수밖에요.”

“어떤 기준으로 보면 될까요?”

“신용도나 기본 재력 등등, 보시면 나름대로 기준이 생기실 겁니다.”

그렇게 말한 에녹이 내게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멍하니 그를 보고 있자니, 그의 자리에도 역시 뭔가 많은 일감이 놓여 있었다.

역시 황태자라는 직업도 녹록지가 않다.

나는 좀 더 주위를 살펴보았다. 외궁의 이 층 끝에 있는 집무실은 특이하게도 육각형의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각 면들마다 창문이 하나 씩 있었고, 그 앞에 각자의 책상이 놓여 있었다.

그러니까 둥글게 놓여 있어서 마치 회의실처럼 서로가 서로를 볼 수 있게 배치되어 있었다. 딴짓을 할래야 할 수 없는, 그야말로 효율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잔인한 배치였다.

에녹도 그렇고 다른 두 사무관들도 각자의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나도 소리 없이 한숨을 쉬며, 오른쪽 탑 맨 위에 놓인 서류를 눈앞에 가져다 놨다. 에녹이 흘긋 나를 보는 게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서류에는 이름과 신분, 약력, 재산 규모와 그동안의 투자처, 투자 활동, 그리고 각자가 생각하는 마법석 광산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방법 같은 것들이 적혀 있었다.

처음 몇 장은 꼼꼼히 봤지만, 곧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다. 애초에 자금의 대부분이 산이나 땅, 건물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 당장 큰돈을 마련할 수가 없다.

이미 큰 투자를 하고 있는 사람도 제외했다.

내가 찾는 사람은 유동자금이 많은 사람, 지금 당장 내게 돈을 안겨 줄 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가 그런 기준을 세워서 본다고 해도 애초에 양이 너무 많았다.

곧 내 눈가도 보좌관이나 사무관들처럼 거뭇거뭇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 일을 하다 문득 창밖을 보니 해가 지고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기가 막혔다. 나는 이 서류의 반의 반도 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것들을 집에 가져가서 봐도 될까요?”

에녹은 역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오늘따라 에녹이 참 만만치 않다. 뭔가 이제는 기억도 희미해진 직장 상사를 대하는 기분이었다.

“아니요, 보안상의 이유 때문에 이 황궁 밖으로 가지고 가실 수 없습니다.”

“……아니, 그럼.”

이곳에 출근을 해서 본다고 하면 시간이 너무 걸렸다. 그러고 보니 해가 졌는데, 다른 사람들도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내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에녹이 벌떡 일어나더니 집무실 밖으로 향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그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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