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저 녀석, 이쪽에서 거절당한 다음에 저쪽으로 가는 건 뭐야?’
한스의 행동이 이상하게 불쾌했다.
그리고 에린이 한스를 정중하게 거절한 후 흘긋 루퍼트를 보았고,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에린에게 가려던 루퍼트의 발은 멋대로 방향을 틀어 클로에에게 향했다.
이때 그의 얼굴은 이상하게 확 붉어져 있었다.
“레이디, 저는 루퍼트 클리포드라고 합니다.”
루퍼트는 클로에 앞에서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에린과 클리포드 공작의 시선이 뒤통수에도 느껴졌다. 실은 자신도 당혹스러웠다.
‘젠장, 내가 왜 이쪽으로 왔지?’
앞에 있는 클로에도 놀란 눈치로 루퍼트를 바라보았다. 루퍼트는 그제야 처음 제대로 클로에를 봤다.
순진무구한 오렌지빛 큰 눈을 깜빡거리며 자신이 내민 손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과연 한스 무리들이 호들갑 떨 만한 미인이긴 했다. 하지만 거절해 줬으면 했다.
클로에에게 온 건 말 그대로 의식의 흐름대로 했던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저……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 달리 클로에는 루퍼트의 손을 잡았다. 먼저 신청한 걸 물릴 수도 없으니, 루퍼트는 어쩔 수 없이 클로에를 데리고 중앙으로 향했다.
첼다 왕국의 왕녀와 이미 춤을 추고 있던 에녹이 그런 루퍼트를 보고 의아한 시선을 보냈으나, 루퍼트는 대충 넘겨 버렸다.
이 뒷수습을 어찌 할지 골치가 아팠다.
***
론가드 폰 리케포로스 황제는 재밌다는 표정으로 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옆에 있던 공작을 흘긋 보며 말했다.
“자네 아들이 춤을 추러 나가는구먼.”
“……녀석, 왜 쓸데없이.”
공작은 황제 앞이라 최대한 노기를 눌러 참았지만, 어쩔 수 없이 아들에 대한 짜증이 새어 나왔다.
“그러지 말고 내버려 두게, 나처럼. 젊은 애들 마음 가는 걸 어찌 막겠나.”
“폐하, 그건…… 저는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공작은 겉으로는 정정해 보였지만, 이미 자신의 병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또한 수명이 몇 년 남지 않았다는 것도 스스로 짐작했다.
황제도 그 사실을 어느 정도는 눈치챘지만, 모르는 척 중얼거렸다.
“결혼이야 스필렛 백작가랑 한다 쳐도 연애는 뭐 상관없지 않나.”
“제가 아들놈 속을 모르겠습니다. 루퍼트 녀석도 에린 양을 싫어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어릴 때부터 엄청 신경 쓰고 있지요. 녀석이 괜한 반감에 시간 낭비를 할까 염려가 됩니다.”
공작은 춤추는 한 쌍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꼭 가문 때문이 아닙니다. 에린 양은 총명하고, 또 루퍼트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 주는 아이이지요. 그런 사람은 천금을 준다 해도 얻기가 힘든 법이니까요.”
“흐으음.”
“그런데 결혼하기도 전에 다른 사람과 눈이 맞아버리면 일이 어렵게 되지 않겠습니까.”
“하긴, 지금도 에린 양에게 눈독 들이는 사내놈들이 한둘이 아닌 거 같은데.”
황제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무도회장에서 나가는 에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에린이 가는 방향으로 에녹의 고개가 돌아가는 것도 보았다.
공작은 그것을 보지 못한 채, 화제를 바꿔 황제에게 질문을 던졌다.
“폐하께서는…… 황태자비를 들이는 일에 대해 관심이 없으십니까?”
그러자 황제가 어깨를 으쓱하며 그를 쳐다봤다.
“글쎄, 자네는 황가의 전설을 모르는가?”
공작은 벙찐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전설을 알고 있기는 하지만, 황제가 실제로 그걸 믿을 줄은 몰랐다.
전설의 내용은 이랬다.
초대 황제 리케포로스 대마법사는 자신의 핏줄을 이어받은 후손들이 짊어질 제국의 무게를 알고 안타까워하며, 여신에게 청탁의 기도를 했다.
‘삶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을 만한 힘을 주소서.’
그러자 여신이 답했다.
「내가 줄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 그대의 힘을 이어받은 자들은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과 이루어지노라니.」
그래서 마법의 힘을 이어받은 황태자들은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황태자비로 맞이한다는, 뭐 그런 내용이었다.
“그렇다 해도 그냥 내버려 두실 생각이십니까?”
“뭐, 저 녀석이 알아서 하겠지. 나처럼.”
황제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지금의 황제는 분명히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메리벨 황후는 이미 결혼 후 남편이 죽어 혼자 살던 과부였다. 게다가 집안도 크게 별 볼 일 없었다. 그런 메리벨을 당시 황태자였던 황제가 밀어붙여 성사시킨 국혼이었다.
하지만 공작이 알기로 이전의 역대 황태자비는 클리포드 가에서 많이 배출되었다. 그들이 모두 그렇게 좋은 감정으로 결혼을 했다고?
뭐, 황제가 그렇다고 하니 공작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루퍼트와 클로에가 춤추는 장면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
루퍼트는 클로에와 마주 보고 선 채, 손을 맞잡고 음악에 맞춰 움직이기 시작했다. 루퍼트는 그러면서도 티 안 나게 에린을 찾았다. 하지만 에린은 아까 그 자리에 이미 없었다.
‘어디로 간 거지?’
눈으로 홀을 훑으면서 혹 다른 남자와 춤을 추는지도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예 자리를 비운 듯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편으론 안심이었다.
루퍼트는 그렇게 내내 딴생각을 하면서도 춤 동작만큼은 정확했다. 클리포드 공작가에서 어릴 때부터 몸에 익혀 놨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아도 저절로 발이 움직였다.
하지만 루퍼트에게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지금 춤을 추고 있는 파트너가 박자를 못 맞추는 것은 물론이고, 연신 발을 밟아 대고 있기 때문이었다.
루퍼트는 최대한 짜증을 자제하며 드디어 자신의 파트너를 신경 쓰기 시작했다.
“저기, 베레지안 영애라고 했죠.”
“네, 네.”
“춤을 못 추십니까?”
“아, 배우지 못해서…….”
클로에가 창피한 듯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루퍼트는 베레지안 남작이 원래 귀족이 아닌 의사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춤을 아직 배우지 못했을 수 있다.
루퍼트가 한숨을 쉬며 그녀의 손을 더 강하게 잡아 이끌었다. 그러자 클로에가 힘없이 딸려와 그의 어깨에 부딪혔고, 그 순간 루퍼트는 옆구리에서 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윽.”
“아, 죄송해요!”
몸을 부딪히는 바람에 상처가 벌어진 모양이었다. 여태 다른 곳에 신경이 팔려 상처도 잊고 있었다.
루퍼트의 옷이 짙은 색이라 많이 티 나진 않았지만, 상처 부위에서 이미 피가 배어 나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루퍼트 님?”
표정 관리를 한다고 했지만, 한번 느낀 아픔을 참는 건 쉽지가 않았다.
더군다나 지금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모르는 파트너를 순전히 자기 힘으로 밀고 당기고 돌리려니 더욱 곤욕이었다.
이를 악물며 참으려는데, 그녀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루퍼트 님, 지금 무리하고 계신 거죠?”
루퍼트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는 와중에, 클로에는 그를 놓고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해했다.
클로에는 춤도 못 추거니와, 그것을 만회할 만큼 자신의 컨디션이 좋지 않기도 했다. 혼자 남은 루퍼트는 한쪽 구석으로 이동했는데, 그곳에는 황자 브리먼이 있었다.
“전하, 여기 계셨습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루퍼트는 황자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다.
브리먼이 샴페인 잔을 건넸고, 루퍼트는 거절할까 하다가 목이 타는 것 같아 그냥 받아 마셨다.
아까 에녹이 건네줬던 샴페인보다 훨씬 단맛이 강했다.
“참, 세상 불공평하지. 자네 같은 인재가 나처럼 구석으로만 숨으니 딱하기도 해.”
“무슨 말씀이신지?”
“저기, 내 아우님. 우리의 황태자 전하를 봐.”
에녹은 여전히 빛이 났고, 그의 주위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있었다.
“혈통이란 게 뭔지, 참. 안 그래? 나도 마법을 쓸 수가 있어. 자네는 검술로 제국 일등이지. 그런데 황태자에게 모든 걸 양보해야 해. 뭘 해도 바뀌지 않아.”
“……황자 전하, 취하신 것 같습니다.”
루퍼트는 그의 얘기에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조금 당황했다.
“루퍼트, 자네는 정말 괜찮은가?”
“뭐가 말입니까?”
루퍼트의 날 선 반응에 브리먼 황자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야. 혹시 어느 날 갑자기 답답하거든 한잔하러 오라고.”
그리고는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루퍼트는 찜찜한 마음에 머리를 벅벅 긁다 다시 올라오는 통증에 얼굴을 찌푸렸다.
일단 상처를 다시 봐야 할 것 같다. 상처도 상처지만, 어딘가 몸에 열이 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무도회장 곳곳에는 쉴 수 있는 방들이 마련되어 있었고, 루퍼트는 그중 하나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 안에는 편히 쉴 수 있는 소파와 침대가 있었고 욕실까지 갖춰져 있었다.
일단 상의를 벗어 놓은 후, 소파에 앉아 상처 쪽을 바라보았다. 대충 매어 놓은 곳에서 새빨간 피가 뚝뚝 흘러나왔다.
“하.”
황태자는 다쳐도 금방 회복하던데, 그것도 다 혈통 때문이겠지.
문득 브리먼 황자의 말이 생각나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괜찮냐고? 무슨 뜻에서 한 말일까. 괜찮지 않으면 어쩌자는 말인가.
공작은 황태자인 에녹과 늘 자신을 비교했다. 잘나면 잘난 대로 겸손하라 했고, 못나면 못난 대로 에녹을 보고 배우라고 했다.
곁에서 모시는 신하가 주인보다도 뛰어나서도 안 되지만, 뒤처져서도 안 된다고 했다. 나름대로 노력해 봐도 공작에게 칭찬 한마디조차 들은 적 없었다.
루퍼트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쾌한 감정을 억눌러가며, 대충 깨끗한 수건으로 상처 부위를 눌러 놓았다.
그 때, 갑자기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뜻밖에도 클로에가 서 있었다.
‘문을 안 잠갔던가?’
루퍼트가 쳐다보니, 클로에는 무엇인지 모를 바구니를 든 채 조심스럽게 들어와 문을 잠갔다.
그녀가 고개를 숙인 채로 들어오는 바람에 표정을 잘 보진 못했지만, 언뜻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까 춤을 출 때와는 영 다른 느낌이라 순간 루퍼트는 잘못 본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상의를 벗은 채 앉아 있는 걸 봤는데 왜 문을 잠그고 들어온단 말인가?
“영애께서는 무슨 일로?”
루퍼트가 묻자 클로에가 고개를 들었다. 루퍼트를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에는 안타까움이 뚝뚝 묻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