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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66)화 (66/129)

66화

“그래도 예쁘잖아. 누군지나 좀 알아봐야지.”

무리 중 참을성이 제일 없는 한스가 존바텐 백작 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적당히 웃으며 그들과 몇 마디 주고받은 후, 다시 무리로 뛰어왔다.

“베레지안 남작의 딸이래. 들어 봤어? 베레지안 남작이라니……. 아, 하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예쁘던데. 그런 미인은 처음 봐.”

“글쎄, 처음 듣는 것 같은데.”

무리들이 웅성거리는 와중에 에녹이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전 황실 주치의에게 남작위를 내렸다더니, 그자가 베레지안이었던가.”

“엇, 정말입니까? 의사가 작위를 받았다고요?”

한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대꾸를 했고, 루퍼트는 곁에서 말없이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뭐, 간혹 뛰어난 기술을 가진 자에게 더러 작위를 주기도 하니까. 남작 정도는 별거 아니잖나, 영지도 없는 허울뿐인 작위이니.”

“그렇다면…… 정말 별 볼 일 없는 가문이군요.”

오히려 그 사실을 들은 사내들은 눈을 빛냈다. 어느 내로라하는 집안의 여식이라면 힘들겠지만, 낮은 지위, 하지만 평민은 아닌 귀족, 거기다가 예쁘기까지 하다면 가볍게 만남을 갖기에 딱 좋은 상대다.

한스 옆에 있던 남자가 그를 툭툭 치며 말했다.

“내가 먼저 춤 신청을 하도록 하지. 자네는 내 뒤야.”

“루퍼트, 자네는 어때?”

“아서라, 루퍼트는 공작 각하께서 정해 주신 혼처가 있다고.”

그 말에 루퍼트가 와락 미간을 찌푸렸다.

“헛소리들 하지 마.”

그의 짜증 섞인 대답에 한스 외의 무리들은 흥분하며 날뛰었다.

“오? 루퍼트! 경쟁에 뛰어들 셈이야?”

“하지만 루퍼트, 에린 스필렛 양도 꽤 미인이잖아.”

“맞아, 스필렛 영애도 아름답지. 붙임성이 좀 없긴 하지만 그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이 나를 향할 때면……!”

루퍼트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벌떡 일어나 자리를 피해 버렸다. 오히려 그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남은 무리는 여전히 키득거렸다.

그때 에녹이 손짓하며 그들을 조용히 시켰다.

“쉿.”

곧이어 중후한 느낌의 마차가 연회장 입구에 도착했다. 각자 모여 놀던 귀족들의 시선이 마차에 모여들었다. 한스가 목소리를 낮춘 채로 외쳤다.

“루퍼트의 아버지가 오셨다.”

에녹이 루퍼트에 앞서 먼저 일어나 공작을 맞이하러 갔다.

“오셨습니까, 클리포드 공작.”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마중 나오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가볍게 악수를 한 공작이 두리번거리며 루퍼트를 찾았다.

“제 아들 녀석은…….”

“내내 함께 있었는데,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 타이밍이 맞지 않았네요.”

“쯧쯧, 저런. 안에 있는 숙녀를 에스코트해야 하는데.”

“누가 함께 오셨습니까?”

에녹이 묻자 공작이 안에 있는 누군가에게 자상한 말투로 말했다.

“에린, 나오거라.”

마차 안에서 사라락 연분홍색 치맛자락이 흘러나왔다. 안에 탄 사람이 레이디라는 걸 눈치챈 에녹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에린은 그런 에녹을 보고 살짝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손을 잡고 내려와 무릎을 굽혔다.

“에린 스필렛입니다.”

하지만 예의를 갖춰 인사하면서도 그녀의 얼굴은 무표정하기 그지없었다.

공작은 작게 헛기침을 하며 굳이 상황을 설명했다.

“스필렛 백작이 오늘 참석하지 못한다고 하여 제가 대신 데리고 나왔습니다. 루퍼트는 그런데 보이지도 않고…….”

클리포드 공작이 루퍼트와 에린을 맺어 주려 한다는 건 이미 알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일단 들어가시죠.”

에녹은 슬쩍 미소 지으며 공작을 연회장 안으로 안내했다.

***

론가드 폰 리케포로스 황제와 메리벨 자니에르 황후가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삼삼오오 모여 있던 귀족들은 가운뎃길을 비우고 황제와 황후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그들의 뒤로 자연스럽게 황태자 에녹과 황자 브리먼이 따라 걸어갔다.

에녹은 어느새 다시 나와 있는 루퍼트에게 눈인사를 했다. 그리고 눈이 마주치자 앞쪽으로 나와 있으라는 듯 고갯짓했다.

황족들이 모두 지나간 후, 공작은 옆에 루퍼트가 온 것을 보고는 낮은 음성으로 그를 꾸짖었다.

“황태자 전하를 제치고 네가 수석을 했다지.”

“예, 어쩌다 보니…….”

루퍼트의 대답에 공작의 음성에 더욱 노기가 실렸다.

“적당히 할 수는 없었느냐. 너는 황태자 전하의 신하가 될 사람이다. 그분을 이겨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죄송합니다.”

어차피 길게 변명을 해 봐야 통할 사람도 아니었고, 그럴 상황도 아니었다.

황제가 단상에 오르자 황실 기사단장이 오늘 기사 시험을 통과한 자들의 이름을 크게 호명했다.

잠시 황족들이 앉는 공간까지 다다랐던 에녹도 호명에 내려왔고, 그 외에 루퍼트를 포함한 여럿이 중앙에 모여 섰다.

“루퍼트 클리포드, 네가 일등이로구나. 자, 어서 단상 위로 올라오거라.”

황제가 호탕하게 웃으며 루퍼트를 호명했고, 그곳에 있는 모두가 어색한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귀족들은 박수를 치면서도 에녹의 눈치를 봤다.

원래 역대 황태자가 낀 기사 시험은 눈치껏 그를 일등으로 만들어 주는 게 관례였다.

그러나 정작 에녹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루퍼트를 축하하며 그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어서 나가, 루퍼트.”

루퍼트는 주먹을 불끈 쥔 채 앞으로 나갔다. 자신의 실력으로 수석이 되었지만, 결국 아무에게도 축하받지 못한다. 심지어 아버지에게조차.

이런 수석 따위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옆구리의 상처가 문득 아려 왔다. 감정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표정 관리가 잘 되지 않았다.

루퍼트는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매년 기사 시험의 수석에게 내리는 검을 하사받았다. 애써 희미하게 웃음 지으며, 황제에게 감사를 표한 후 단상에서 내려왔다.

내려오며 루퍼트는 한쪽에 있던 에린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다 이내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여전히 흘끔흘끔 루퍼트를 보고 있었다.

루퍼트는 울렁거리는 불편한 기분에 휙 고개를 돌려 버렸다. 생각해 보면 의도와 상관없이 수석을 차지하게 된 것도 다 에린 때문이었다.

‘그 모자만 아니었더라도……!’

루퍼트를 시작으로 하여 차례차례 기사 서임식이 모두 끝나고, 무도회의 시작을 알리는 춤곡이 연주되었다. 황제와 황후를 시작으로 각자가 파트너를 찾아 연회장의 중앙으로 나왔다.

루퍼트는 시종에게 검을 맡긴 후, 친한 무리들에게 다시 다가가려다 멈칫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수석인 루퍼트보다 차석을 한 황태자 에녹의 곁에 서서 축하의 말을 건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루퍼트는 다가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혼자 멀뚱히 서 있다 또다시 에린의 시선을 느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지금만큼은, 그녀의 눈앞에서 달아나고 싶었다.

“루퍼트.”

그러다 에녹이 루퍼트를 먼저 발견했고, 그에게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차라리 저쪽이 나을지도.

루퍼트는 반쯤 체념한 표정으로 무리 안으로 들어가 에녹의 곁에 섰다. 다행히도 이제 주제가 바뀌어 있었다.

지금의 춤곡이 끝나면, 관례대로 젊은 귀족들이 중앙으로 나서게 된다. 몇몇은 벌써 자신의 약혼녀를 찾아 떠나 있었고, 마땅한 파트너가 없는 이들은 상대를 찾아 물색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들이 오늘 노리는 상대는 아까 본 베레지안 남작 영애였다.

“내가 먼저 가 볼까?”

“아니, 기다려. 일단 내가 먼저…….”

루퍼트는 벽에 기대 홀로 팔짱을 낀 채 땅만 보았다. 고개를 들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두 명과 눈이 마주칠 것이다.

하나는 클리포드 공작이었고, 또 하나는 역시 그녀였다.

마찬가지로 루퍼트 옆에 서 있던 에녹이 그에게 샴페인 잔을 건넸다. 루퍼트는 그제야 잔을 받아들며 고개를 들었다.

에녹은 홀 중앙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 끝에는 에린이 있었다.

“참 부러워, 루퍼트.”

“……제가 말입니까?”

“저렇게 너만 바라보고 있잖아, 부러울 수밖에.”

그러자 루퍼트는 티 나게 휙휙 고개를 돌려 가며 주위를 보고 말했다.

“지금 황태자 전하를 보고 있는 레이디들이 훨씬 많은데요.”

“그거야 다, 내가 황태자이기 때문이지. 그 지위가 없었어도 저들이 나를 봐 줄까?”

“그거야…….”

루퍼트는 쉽게 반박하지 못했고, 에녹은 샴페인을 홀짝 들이키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 에린 스필렛은 네가 어떤 처지이든 간에 널 봐 줄 거야. 루퍼트, 너도 사실은 알고 있지? 저런 사람은 흔치 않아.”

“별로, 저랑은 상관없는 일입니다.”

에녹은 잔에 남은 마지막 액체까지 털어 넣고는 지나가는 시종에게 건네주었다.

“자, 나는 내 일을 하러 가야지.”

“어디 가십니까?”

“첼다 왕국의 왕녀가 왔으니까, 그녀를 대접해 줘야 해.”

에녹은 조금 귀찮다는 듯 픽 웃어 버리곤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에 보니, 첼다 왕국의 왕녀와 손을 맞잡고 중앙으로 나와 있었다.

제국의 황태자로서 예의상 그녀에게 춤을 신청한 거로 보였다.

루퍼트는 한숨을 쉬며 앞을 보다, 결국 그토록 피했던 클리포드 공작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클리포드 공작은 먼 곳에서도 루퍼트에게 무언의 압박을 하고 있었다. 그의 눈은 명확히 에린을 지목했다.

루퍼트는 홀로 서 있는 에린을 흘끔 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에린의 드레스는 저번에도 한 번 보았던 것이다.

요즘 스필렛 백작가의 재정이 어렵다고 하더니, 이번 연회 드레스를 새로 맞추지 못한 모양이었다.

뭐, 그렇다고 해도 에린과 춤 한 곡 추는 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딘가 불편했다. 또한, 아버지의 압박으로 춤 상대를 정해야 한다는 게 자존심이 상했다.

그때 클로에에게 다가갔던 한스가 거절당한 후, 이어서 에린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았다. 그 모습을 본 루퍼트가 반사적으로 벽에 기댔던 몸을 일으켜 걸음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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