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루퍼트는 클로에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클로에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다 이내 잠잠해졌다.
“그럼요, 부인껜 아무 영향도 없을 거예요.”
“하지만 서서히 죽는 약이라고 하지 않았나?”
루퍼트는 여전히 염려가 가득한 시선으로 클로에를 보았다. 하지만 클로에는 그 염려가 자신을 향한 게 아니라는 걸 뻔히 알고 있었다.
“겨우 한 번 먹었다고 해서 멀쩡한 사람을 죽게 만드는 약은 아니에요. 그저 가망이 없는 병자에게 서서히 안식을 주는 약이지요.”
그녀의 나긋나긋한 설명에 루퍼트는 그제야 누그러진 얼굴을 했다.
그리고 그제야 루퍼트는 뭔가 생각에 빠진 얼굴로 클로에의 머리카락을 슥슥 쓰다듬었다. 그러자 클로에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했어.”
클로에가 물끄러미 루퍼트를 올려다봤고, 루퍼트는 피식 웃으며 읊조렸다.
“기가 막힌 일이야. 그날은 정말 정신없이 너에게 끌렸지.”
“나도 마찬가지예요, 루퍼트.”
루퍼트는 그 말에 따로 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가 클로에에게 물었다.
“클로에, 베레지안 남작이 원래는 의사라고 했었지.”
“……그랬었죠.”
“대단한 실력이었나 보군, 의사가 실력만으로 귀족의 작위를 받을 정도였다니.”
루퍼트의 말에 클로에가 쓴웃음을 지었다.
“저는 잘 모르지만, 아마도 그랬나 봐요.”
“클로에?”
루퍼트에게 기대 있던 클로에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방에 가서 좀 쉬어야겠어요, 피곤하네요.”
“그래, 좀 쉬어.”
클로에는 그렇게 말하고서도 방 안을 떠나며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루퍼트는 소파에 기댄 채 멍하니 벽만 바라보고 있었다.
클로에는 아쉬운 눈으로 바라봤지만 결국 홀로 떠나야만 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루퍼트가 자신의 방에 함께 가지 않는다는 건 의외의 일이었다. 더군다나 이 방은 에린이 쓰던 방이 아닌가.
클로에가 나간 뒤 루퍼트는 느리게 고개를 돌려 그녀가 나간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와 처음 만났던 그때를 자세히 기억해 냈다.
***
아직은 모두가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어느 날이었다.
‘하필이면.’
루퍼트는 앞에 있는 에녹을 보며 검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에녹은 여유 있게 선 채로 느슨하게 검을 쥐고 있었다.
오늘은 기사 서임식을 위한 시험 마지막 날, 이 토너먼트가 끝나고 일정 순위 안에 들어가면 정식으로 기사가 된다.
이 제국의 귀족 남자들은 성인이 되기 전 의무적으로 기사 서임 시험을 치렀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통과하는 건 아니었고, 당연히 기사로서 무술이 뛰어난 몇 명만이 통과됐다. 그러니 신분이 귀족이라고 해서 모두가 기사인 건 아니었다.
루퍼트는 기사 서임식 마지막 관문, 토너먼트 개인전에서 에녹과 마주하고 말았다. 가장 피하고 싶은 사람을 마주하다 보니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와아아아! 황태자 전하다!”
관중석을 흘끔 바라보니, 모두가 황태자 에녹을 응원하고 있었다. 자신은 안중에도 없다.
하지만 다 그런 건 아니었다. 루퍼트는 아까부터 제 쪽에 내내 고정되어 있는 시선 하나를 알고 있었다.
맨 뒷자리, 챙이 넓은 하얀 모자를 눌러 쓴 소녀 하나만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린 스필렛, 여기까지 오다니.’
루퍼트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자세를 바로 세우고 다시 에녹을 보았다.
눈이 마주친 에녹이 싱긋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잘 부탁해, 루퍼트.”
“제가 할 말입니다, 전하!”
엄청난 함성과 함께 두 사람의 검이 맞부딪혔다.
쇠가 맞부딪혀 내는 소리가 위협적일 만큼 크게 울려 퍼졌다.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두 사람의 속도는 빨랐다.
사실 둘은 종종 검을 맞대어 보았고 서로의 실력을 잘 알았다.
루퍼트는 오른쪽으로 찔러 들어오는 에녹의 검을 흘려보내며 한편으로 생각했다.
지금 수많은 관중들은 황태자를 응원하고 있었다. 어차피 루퍼트가 여기서 진다고 해도, 이미 이전 시험에서 거둔 성적만으로 기사 서임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대로 황태자를 이기게 해 줘도 무방할 것이다. 클리포드 공작도 그걸 원할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하얀 모자가 바람에 날려 하늘로 나풀나풀 날아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한눈을 판 찰나에 옆구리로 빠르게 들어오는 검을 미처 막지 못했다.
루퍼트는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옆으로 몸을 틀고, 동시에 에녹의 검을 아래에서 위로 세게 올려쳤다. 그 순간 에녹이 검을 놓쳐 버렸고, 검은 공중으로 치솟았다 떨어져 땅에 박혀 버렸다.
와아아아!
루퍼트는 당황하며 에녹을 보았고, 에녹은 한 걸음 물러서 난감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
루퍼트는 망연자실한 눈으로 자신의 검과 떨어진 검을 보았다.
에녹은 선 채로 자신을 내려다보았고, 루퍼트는 에녹의 마지막 공격에 주저앉아 있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루퍼트의 승리였다.
적당히 하다가 져 주려고 했는데, 순간 위험하단 생각에 전력을 다해 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검을 놓칠 정도였나?
의아한 눈으로 에녹을 봤지만, 에녹은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다가와 루퍼트에게 말을 건넸다.
“루퍼트, 역시 대단한걸.”
“전하야말로 실력이 더 느신 것 같은데요.”
에녹은 주저앉은 루퍼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루퍼트는 에녹의 손을 잡고 일어나며 그의 실력을 칭찬해 줬다. 속마음이 어찌 되었든 간에, 아직은 둘의 사이가 친구에 가까운 시절이었다.
“자, 어서 가서 시상대에 서라고. 루퍼트, 네가 일 등이야.”
‘일 등.’
루퍼트는 에녹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며 왠지 모를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는 시상대로 걸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아까 에린이 앉아 있던 곳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이미 에린은 사라지고 없었다.
‘어디 갔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는 봐 줬으면 했는데.
거기까지 생각한 루퍼트가 스스로 놀라며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시상대 위에 올라가 목에 메달을 걸었다. 금빛 메달이 가슴에서 번쩍거렸다. 옆의 조금 낮은 단상에서 은메달을 건 에녹이 싱긋 웃어 보였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려 있는 하얀 모자를 발견했다.
“전하, 그 모자는…….”
“아아, 이 뒤에 떨어져 있더군. 예쁜 모자야, 그렇지?”
에녹은 대수롭지 않게 모자를 흔들어 보이며, 옆에 있던 시종에게 건네 주었다. 그에 루퍼트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예쁘기는요…….”
시상식이 끝나고 들어가는 순간, 루퍼트는 옆구리가 축축하게 젖어 있는 것을 느꼈다.
손을 갖다 대 보니 미세하게 옷이 잘려 있었고, 그 안에서 핏물이 배어 나왔다. 그리고 상처를 인지한 순간 쓰라린 통증이 밀려왔다.
“아, 으…….”
에녹의 공격을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살짝 스친 모양이었다. 루퍼트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서 에녹은 몰려온 사람들에게 은메달을 자랑하며 웃고 있었다.
‘우연이겠지.’
에녹 역시 보통의 기사보다는 훨씬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갖고 있었지만, 루퍼트보다는 한참 뒤졌다. 그건 에녹과 검을 맞대 본 자신이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의 스승도 그렇게 말했던 사실이다.
그러나 자신은 그때 모자를 보느라 한눈팔고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벌어질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돌아본 루퍼트와 에녹이 눈이 마주쳤다. 에녹은 슬쩍 손을 흔들어 보였고, 루퍼트는 고개를 까딱하고는 찜찜한 기분을 털어 버렸다.
‘제대로 치료할 시간이 없을 것 같은데.’
곧 해가 질 시간이었다.
오늘 밤은 황제가 정식으로 기사 서임을 하고, 신입 기사들을 축하하기 위한 연회가 열렸다.
루퍼트는 클리포드 소공작인데다 오늘 수석을 한 주인공이니 일찌감치 참석해야만 했다.
루퍼트는 탈의실 한쪽에서 상의를 대충 벗어던졌다. 그리고 깨끗한 수건으로 옆구리를 눌러 지혈을 했다.
“꽤 깊게 베인 모양이네.”
옷을 벗고 자세히 보니 생각보다 상처가 깊었다. 일단 그는 천으로 가슴 쪽을 동여매어 압박하고는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었다. 루퍼트가 제일 두려워하는 사람이 이번 연회에 참석할 것이기 때문이다.
금세 밤이 찾아왔다.
황궁의 연회장 입구는 밤이 무색하리만큼 화려한 빛들로 반짝거렸다. 마법석으로 피워 놓은 램프는 저마다의 색을 뽐내며 곳곳을 화려하게 비춰 주었다.
연회장은 개방되어 있었지만 모두들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 일찍 도착한 귀족들은 오는 사람들을 살피기 위해 모두들 입구 밖에 나와 있었다.
차례차례 누군가 도착할 때마다 친한 사람들이 다가가 그들을 맞이하고 함께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에녹은 입구 옆 눈에 띄지 않는 돌담 근처에 앉아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황태자를 지지하는 가문의 영식들이 함께 있었다. 물론 루퍼트도 함께였다.
그들은 모여 앉아 두런두런 무언가를 이야기했다. 몇몇은 멋내기용 궐련을 입에 물고 있기도 했다.
이야기 내용은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혈기 왕성한 그 나이 또래답게, 주로 여자 이야기였다.
“펠식스 백작 영애가 오늘 데뷔탕트를 치른다던데. 꽤 미인이라고 들었어.”
“아서라, 그녀는 이미 첼톤 자작과 혼담이 오고 간다더라.”
“벌써부터? 쳇, 아쉽게 됐네.”
두런두런 말을 주고받는 그들의 눈에 마차에서 내리는 누군가가 보였다.
검고 아무런 장식이 없는 마차는 한눈에 봐도 빌린 마차였다. 거기서 중년의 사내와 어린 여자가 내렸다.
“우와, 저거 누구야?”
누군가의 외침에 루퍼트는 뒤를 돌아보았다. 확실히 시선을 확 끌 만한 미인이 거기 있었다. 그들을 맞이하러 오는 사람은 존바텐 백작이었다. 그는 확실한 귀족파였다.
“뭐야, 저쪽 사람인가 보네.”
현재 제국의 귀족들은 정확히 둘로 나뉘어져 있었다. 황태자를 지지하는 가문은 이른바 황제파 귀족이었다.
황제가 될 사람은 대대로 한 명만이 나왔고, 황제에서 황태자로 이어지는 세력의 대물림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브리던 황자도 마법 능력을 보이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귀족파들은 황자를 지지하게 됐다.
정통적인 지지 기반과 능력이 있는 황태자보다는 조금 더 자신들의 입맛대로 구슬릴 수 있는 황자가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황자는 황후의 소생은 아니었지만 황제의 장자였고, 또한 최소한의 자격 조건인 마법 능력을 갖추었으니 명분은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