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오오, 이건 놀랍군요.”
안토니오 신관의 감탄 어린 어조에 나는 슬그머니 실눈을 뜨고 물속을 바라보았다.
“어……?”
분명 아까는 짙은 검붉은 색의 액체 괴물이 꿀렁이는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그냥 물에 일정한 농도로 퍼져 있었다.
그리고 눈에 보일 만큼 빠르게, 그 색이 옅어지고 있었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이 광경을 보고 나니 더욱 확신이 들었다. 내 능력은 아마도 이런 사악한 기운을 없애는 종류인 것 같았다.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 떨어지기도 전에, 검붉은 물결은 맑고 투명해졌다.
“이 정도면 된 것 같은데, 손을 빼도 될까요?”
안토니오 신관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는 에녹과 심각한 표정으로 마주 봤다. 에녹의 표정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왜 그러는 거지?
“저, 무슨 문제라도?”
나는 영문을 모른 채 둘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고, 안토니오 신관은 침음하며 입을 열었다.
“으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군요.”
“대신전의 신녀와 비교하면 어떤 수준이지?”
“신녀와는 비교도 안 됩니다. 그녀가 이 정도 피를 정화시키려면 밤낮으로 꼬박 이틀은 매달려야 할 겁니다.”
뭔진 몰라도 능력이 좋다는 이야기인 것 같다. 그런데 왜 심각한 거지?
안토니오 신관이 자리를 정돈한 후, 우리는 다시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백작님은 일단 뛰어난 정화의 능력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화의 능력.’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한번 끄덕거렸다. 나는 공작에게서 약기운을 몰아내고, 언데드화 됐던 새를 정화하여 편안한 죽음으로 가게 했었다.
처음에는 내가 가진 능력이 혹 안 좋은 쪽이라 생명체를 죽이는 게 아닌가 생각도 했지만, 그들이 애초에 안 좋은 기운에 의해 억지로 살아 있다는 걸 듣고는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전하, 공작성에서 일어난 일들은 누가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벌인 일이죠? 제가 그것들을 정화한 게 맞는 거죠?”
에녹이 역시 말이 없자 신관이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말씀드리시죠. 어차피 능력을 갖고 태어난 이상 아예 무관한 삶을 사실 수는 없습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나는 백작이 평범한 삶을 살았으면 했어요.”
안타까운 듯 읊조리는 음성에서 나는 또 한번 그의 진심 어린 염려를 들을 수 있었다. 아까 여기 오기 전에 했던 말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의 말을 바꿔 해석하면 알게 되는 순간 평범한 삶을 살기 어렵다는 것인가.
하지만, 이미 이 세계에 온 것부터가 평범한 삶과는 거리가 멀다. 특이한 능력 하나 더 가졌다고 해서 뭐가 크게 달라지려나.
“괜찮아요, 전하. 어쨌든 제가 선택할 일이에요. 말씀해 주세요.”
“네, 그럴 생각입니다. 먼저, 공작성에서 본 언데드화는 모두 흑마법을 기반으로 해서 이루어집니다.”
“흑마법? 보통의 마법과 다른 건가요?”
에녹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설명을 이어갔다.
“마법은 재능과 노력의 산물입니다. 마나를 움직이는 능력, 즉 마력을 어느 정도 갖고 있고, 또 얼마나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느냐로 마법 능력이 결정되지요.”
에녹은 마법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을 간단하게 설명하고는 바로 흑마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흑마법은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재능도, 노력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악마와 계약해서 그에게서 능력을 끌어오는 방식입니다.”
“악마와…… 계약. 계약이라는 건 대가가 있을 텐데요.”
“맞습니다, 사용자의 정신, 즉 영혼을 담보로 해서 계약합니다.”
“영혼을 담보로 하면…… 뭐가 어떻게 되는 건데요?”
뭔가 엄청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지만 아는 게 없으니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별 변화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용자는 조심하다가도 점점 방심하게 되지요. 그러다 본능과 욕구가 자극되고 감정적으로 변합니다.”
감정적이라는 말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의외로 루퍼트였다. 그가 최근 내게 보인 변화들이 그와 관련되어 있지는 않을까.
“혹시 흑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노출되는 것만으로도 감정적으로 변할까요?”
“맞습니다. 장기간 노출되면 흑마법을 쓴 것과 같은 변화를 보일 수 있습니다.”
“아…… 그럼.”
정말 클로에가 흑마법사인 거구나. 그녀는 전면으로 나서서 뭔가를 한 적은 없지만 때마다 의심스러웠다.
“흑마법을 그렇게 계속 쓰게 되면…… 나중에는 어떻게 되나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에녹이 아닌 안토니오 신관이 했다.
“그렇게 감정적으로 격해지면서 이성이 마비되고 비정상적인 행동 방식을 보이다가, 나중에는 악마에게 혼이 먹히게 됩니다. 악마가 그 육체를 아예 차지하게 되는 거죠.”
“악마……가 육체를…….”
이거 생각보다 심각한 일 아닌가? 악마가 세상에 나타난다는 뭐 그런 이야기인데.
“그래서 의식이 있는 흑마법사는 완전히 먹히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곤 합니다. 혹은 그를 아는 주변인들이 안식을 주기도 하죠.”
“그걸 알면서 흑마법에 손을 대다니…… 어째서, 왜 그렇게까지.”
나는 클로에를 염두에 두고 말하고 있었다. 그들은 클로에가 흑마법을 쓴다고 한마디도 안 했지만, 이미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클로에는 소설 속에서 사랑받는 여주인공이다. 그런 그녀가 뭐가 모자라서 흑마법에까지 손을 댔을까.
나는 착잡해진 마음에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내 의문에 대답하듯, 에녹은 담담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가질 수 없는 것을 원하는 사람들이 주로 흑마법에 손을 댑니다. 그래서 흑마법은 모두 탐욕의 산물입니다.”
에녹의 말에 나는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백작님은 정화의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대신전에서 알면 가만히 두지 않겠군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대신전에서 왜 저를?”
불안감이 스물스물 밀려들어 왔다. 대신전에서 가만두지 않는다는 건 무슨 의미이지?
“그들은 몇백 년만에 성녀가 나타났다며, 백작을 신전으로 모시려 할 겁니다. 아주 귀한 분이 되시겠지만, 동시에 신전에 삶이 귀속되는 겁니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고, 신전의 행사 때마다 주관하게 되고…….”
에녹은 성녀가 된 이후의 삶을 거침없이 말해 주었다. 주로 안 좋은 방면으로.
“성녀…….”
참 현실감 없는 단어였다. 그리고 그가 설명하지 않아도 앞으로의 일이 귀찮아질 것이라는 건 뻔히 예상할 수 있었다.
성녀라는 건 포장된 단어일 뿐이고, 아마 이런저런 일에 이 능력을 써 달라면서 끌려 다니겠지. 에녹이 나에게도 말하지 않으려 했던 게 이 때문인 걸까? 그렇다면 이해가 가기도 한다.
나는 멈칫하며 안토니오 신관을 바라보았다.
“신관님은 괜찮으신 건가요? 어쨌든 신전 소속이실 텐데.”
“그러게요, 전하께서 저의 뭘 믿고 이곳으로 오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안토니오 신관은 너스레를 떨며 그리 말했지만, 나는 오히려 그 모습에 에녹이 이곳에 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안토니오 신관은 엑소시즘이 가능한 몇 안 되는 신관입니다. 신전 소속이긴 하지만 별개의 임무가 많아 이렇게 따로 나와서 지내시지요.”
“그냥 괴짜라는 말입니다.”
에녹의 소개에 덧붙여 말하는 그의 말투에 장난기가 묻어 나왔다.
“하지만 착각이 아니라면 백작님의 능력이 저번보다 강해진 것 같습니다.”
“강해졌다기보단 좀 더 확실해졌다고 해야 맞습니다. 그만큼 자주 노출됐기 때문이지요. 그전에는 숨어 있던 능력이 타깃을 만날 때마다 발현 돼서 구체화된 것이지요.”
‘자주 노출됐다’는 말은 클로에가 내게도 흑마법을 시도한 적이 있다는 뜻일까.
하긴, 안 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그렇다면 그녀는 어디까지, 또 얼마나 손을 뻗은 것일까.
“아무튼 이 능력을 누구에게도 들키면 안 된다는 거죠?”
“백작이 원하신다면요.”
“……당연하죠.”
성녀로 살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이렇게까지만 알려 줘도 괜찮았을 텐데, 에녹은 왜 그렇게 숨기고 싶어한 걸까? 단지 나를 믿지 못해서?
하지만 어쨌든 지금에서라도 알았으니 상관없었다. 최대한 조용히 티 내지 말고 살아야지.
정화의 능력을 갖고 있는 이상, 나 자신은 클로에의 이상한 술수에 안전하다는 의미일테니 좋은 일이다. 이때의 나는 단지 그렇게 태평하게 생각했었다.
***
클리포드 공작의 장례식이 끝났다.
루퍼트는 외부에 알리지 않고 최대한 조용히 성 내의 사람들만으로 장례식을 치렀다.
공작의 시신이 가묘에 묻히고, 짧은 기도문을 외우는 것을 끝으로 모든 장례 절차가 끝이 났다. 사용인들은 훌쩍거리면서도 흘끔흘끔 루퍼트를 보곤 했다. 그들의 시선에는 호기심과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루퍼트는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장례가 끝나자마자 성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옆에는 클로에가 따라붙었다.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검은색 레이스로 얼굴을 가린 모자를 쓰고 있었다.
루퍼트가 이 층 방으로 향하자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를 따라갔다. 이 층 방은 얼마 전 에린이 묵던 방이었다.
루퍼트는 방에 도착하자마자 겉옷을 벗고 넥타이를 풀어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놓았다. 그러자 클로에가 자연스럽게 루퍼트의 등 뒤에 서서 그를 끌어안았다.
그런데 돌연 루퍼트가 놀라 몸을 굳히고 그녀를 떼어내며 뒤돌아섰다.
“루퍼트?”
“……아, 클로에. 조금 피곤해서.”
루퍼트는 자신의 머리칼을 대충 흐트러뜨리며 소파에 걸터앉았다. 클로에는 어색함을 감추며 애잔한 미소를 띠고 그의 옆에 붙어 앉았다.
“그럴 만도 하죠, 혼자 장례를 치른 거나 다름없으니, 참, 당신 부인도 너무하네요.”
루퍼트는 물끄러미 허공만 바라보았다. 클로에는 침묵을 동조라 생각했는지 나긋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당신이 이렇게 힘든 상황에 있는데 먼저 가 버리다니……. 그래도 아직은 이 집안의 안주인이잖아요. 보기보다 책임감이 없는 모양이네요.”
“아직은?”
내내 반응 없던 루퍼트가 클로에의 말 중에 단어 하나를 꼬집으며 되물었다. 클로에는 조금 당황하면서도 능숙하게 넘어갔다.
“당신이 원할 때까지는요.”
그녀의 연약한 미소를 바라보던 루퍼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무겁게 깔려 있었다.
“클로에, 분명 그 약을 먹는다고 바로 죽는 건 아니라고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