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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63)화 (63/129)

63화

마차를 타고 수도 근처까지 왔을 때, 나는 에녹에게 말했다.

“저는 우선 신전으로 가 볼까 해요.”

신전은 수도 안에 있으니 같이 가려면 가고, 거기서 갈라질 거라면 먼저 가라는 의미였다.

“신전에 말입니까.”

에녹은 조금 심각해진 얼굴로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히려 그에게 되물었다.

“이제 가 볼 때가 된 것 같아요. 저도 이제 저한테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전하께서는 제게 아무 말씀도 안 해 주시잖아요?”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에녹은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난감한 어투로 중얼거렸다.

“일부러 말씀 안 드리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때론 모르는 게 세상 살기 편할 때가 있으니까요.”

“……그건 제가 결정해요.”

내 퉁명스러운 대답에도 불구하고, 에녹은 그 특유의 온화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히 머쓱해져서 나는 창문 밖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힘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원치 않는 상황에 어쩔 수 없이 나서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건 보통 일반 사람들이 어쩌지 못하는 어렵고, 위험한 일들이지요. 때론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담담하게 말하는 그의 말투 속에는 희미하게 걱정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곧 에녹이 말하는 내용이 본인의 이야기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창문에서 다시 에녹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혈통으로 타고난 대마법사, 황태자 에녹 드웰 리케포로스.

이 사람은 귀하신 황태자이면서 많은 일에 직접 나선다. 어쩐지 위험에도 더 자주 노출되는 거 같고 그러면서 호위도 잘 데리고 다니지 않는다.

언젠가 한 번 물어봤더니, 마법을 쓸 때 휘말리지 않게 하는 게 더 힘들다나 뭐라나.

“후, 그래도 가 볼 거예요. 말리지 마세요.”

하지만 그건 그거고, 내가 나 자신에 대해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물론 이 힘에 대해 알아보다가 내가 외부 세계에서 왔다는 걸 들킬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생각해 봤지만.

‘그래도 궁금하잖아.’

내 단호한 대답에 에녹은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수도에 있는 대신전이 아닌 다른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다른 곳이요?”

“대신전은 방문객이 아주 많습니다.”

“아, 그래요. 그럼.”

사람이 많다는 건 보는 눈도 많고, 귀찮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도 많다는 뜻이다.

에녹은 마차를 세워 마부에게 길을 알려 준 후에 다시 출발시켰다.

곧게 뻗은 길로 가던 마차는 수도로 들어가는 성문 앞에서 오른쪽 샛길로 빠져나갔다.

에녹은 오늘따라 유달리 말이 없었다. 눈을 감고 있거나, 창밖을 보고 있거나, 때로는 날 바라보았다.

그래도 마차의 규칙적인 소음 덕분에 어색한 정적이 흐르지는 않았다.

마차는 잘 닦인 도로를 지나 한적한 오솔길을 향해 나아갔다.

창문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제법 시원했다. 언뜻 본 나뭇잎 색깔이 옅게 바래 있었다.

이곳에서도 계절은 갔다.

조금 더 가다 보니 그의 말대로 작은 신전이 나왔다. 마차에서 내려 신전과 그 주변을 살펴보았다.

수도에 있는 신전의 위용과 달리 이곳은 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진 아담하고 소박한 건물 한 채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정원이 있긴 했지만 관리되지 않았는지, 군데군데 덩굴이 굴러다녔고 잡초가 무성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가 신전에 온 건 단지 기도나 드리자고 온 게 아닌데, 이런 곳에서 내 능력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라는 걱정이 들었다.

에녹이 스윽 내 앞으로 먼저 걸었다. 신전이 작아서 그런지 여느 가정집과 비슷한 문이 있었다.

그곳에 들어가기 전, 에녹이 뒤돌아서더니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의 두 손이 내 머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머리 위에 얹어진 모자를 벗겨 주었다.

“아.”

신전 안에서 모자를 쓰면 안 되는구나.

멋쩍게 웃으며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나는 의외의 장면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분명 안의 구조는 작은 예배당으로 보였지만, 의자 여기저기에 두툼한 책과 잡동사니들이 늘어져 있었고, 오랫동안 청소를 안 했는지 먼지가 가득했다.

“전하, 신전이 맞나요? 여긴 좀…….”

“맞습니다, 방문객이 없어서 편히 지낼 뿐이죠. 그나저나 이거 원. 갑자기 이렇게 방문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안토니오 신관님?”

안쪽에서 횃불을 들고 다가오는 남자는 이미 예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에녹이 옆으로 비켜 서더니 안토니오 신관과 나를 마주 보게 해 주었다.

“전하, 오신다고 기별도 안 해 주십니까. 그리고 멀쩡한 수도의 신전을 놔 두고 다 쓰러져 가는 곳으로 굳이…….”

“백작께서 그 일에 대해 알고 싶어 하신다네.”

“아아.”

안토니오 신관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턱을 긁적거렸다. 며칠 동안 면도를 하지 않은 듯 그의 얼굴에는 덥수룩하게 수염이 자라있었다.

저번에 봤던 깔끔했던 모습과 사뭇 대조적이었다.

“그것참…… 일단 저를 따라오시죠. 여기는 앉을 자리도 없으니까요.”

안토니오 신관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램프를 들고 안쪽 깊숙한 복도를 향해 걸었다.

에녹은 내게 먼저 걸으라는 듯 손짓을 했고, 나는 그를 한 번 돌아보고는 앞서 걸었다.

신전은 보기보다 훨씬 깊고 넓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조그만 건물인 줄 알았는데, 안쪽으로는 구불구불한 복도가 연속해서 이어졌다. 안내 없이 돌아다닌다면 길을 잃기 딱 좋은 구조였다.

그중 방 하나에 들어가니 또 다른 예배당이 나왔다. 처음 본 공간보다 크기는 작았지만 훨씬 정갈하고 신성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앞에 놓인 제단 앞에 작은 여신의 조각상이 있었고, 제단 뒤에는 작은 창문에서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래도 관리가 되어 있는지 제단 주변에는 작은 꽃들도 장식되어 있었다. 그리고 특이한 점은 가운데 커다란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다는 것이었다.

“이곳에 앉으세요. 그리고 죄송하지만 차는…….”

“차는 됐네.”

에녹의 사양에 안토니오 신관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제단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건…….”

그가 손에 있는 뭔가를 내게 보여 주었고, 그건 내가 아는 물건과 색만 다르고 모양이 같았다.

“그 브로치가 맞습니다.”

내가 주춤거리자 안토니오 신관이 확신에 어린 어조로 말해 주었다. 나는 그것을 들어 햇빛에 비춰 보였다.

투명하고 맑은 보석 안으로 빛이 들어와 산란하며 퍼져나갔다.

“어떻게 된 건가요? 원래 까만 보석이었는데요.”

“성수에 오랫동안 담가 두었습니다. 안에 있던 마물의 피가 정화된 것이죠. 사실 이곳에 오기 전에 이미 거의 다 정화되어 오긴 했지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브로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이걸 제게 보여 주시는 이유가 뭐죠?”

안토니오 신관은 나와 에녹의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한숨을 한 번 푹 내쉰 후 에녹을 향해 물었다.

“어쩌시렵니까, 대신전으로 안 가고 굳이 제게 모셔 온 이유가 있으시겠지요.”

에녹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뜸을 들이며 옆에 있던 나를 쳐다보았다.

“옆에서 보시기엔 어떠하셨습니까.”

“예뻤…… 아, 그거 말이지.”

내가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에녹은 헛기침을 하며 안토니오 신관을 바라보다 이내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확실하네.”

“뭐가요?”

나는 참을 수 없어 끼어들었고, 안토니오 신관은 다시 어디론가 가더니 여러 가지 것들을 가지고 왔다.

그는 물이 가득 담긴 세숫대야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리고 단단히 밀봉된 작은 병을 열어 그 안에 들어있는 액체를 대야 속에 부어 버렸다.

검붉은 액체는 물에 들어가자마자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며 서서히 물속에 섞여들었다. 징그러운 광경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나는 그 모습을 끝까지 봤다.

“이게 뭔가요?”

“마물의 피입니다.”

나는 예전 마법석 광산에서 봤던 마물을 떠올렸다. 그런 괴물의 피란 말인가, 이것이.

검붉게 퍼진 액체는 여전히 꿈틀거리며 제멋대로 모양을 만들어냈다. 그 안에서 새로운 새끼 마물이 태어나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쩌라는 눈빛으로 신관을 보니, 그는 웃으며 간단히 말했다.

“여기에 손을 넣어 보십시오.”

“네? 아니, 잠깐만요!”

나는 펄쩍 뛰며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저기에 손을 담그라니! 멀리서 봐도 징그러운 마물의 피는 이상한 냄새도 나는 것 같았다.

“싫어하시는데요.”

신관이 에녹을 향해 말하자, 에녹이 뒤를 돌아보며 내게 말했다.

“정 싫다면 안 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백작의 능력을 제대로 시험하기 위해 하는 일인데, 그냥 넘어가시겠습니까?”

“…….”

나는 에녹을 향해 눈을 홉떴다. 에녹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야 쪽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반걸음 정도 앞으로 다가가며 물 안을 살펴보았다. 

피는 분명 얼마 넣지도 않았는데, 대야에 들어 있는 물 전체가 진득하게 변해 있었다.

“몸에 안 좋거나 하진 않나요?”

“평범한 사람에게라면 좋은 성분은 아니지요. 당장 죽거나 하진 않겠지만요.”

“하아…….”

한숨이 새어 나왔다. 대충 이들이 뭘 하려는지는 알 것 같았다. 나도 바보는 아닌지라, 내가 갖고 있는 능력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는 대충 알고 있다.

나는 팔의 소매를 걷어붙이고 가까이 다가갔다.

“그냥 손을 넣기만 하면 되나요?”

안토니오 신관이 작은 모래시계를 들어 보였다.

“네, 말씀드릴 때까지 빼지 않으시면 됩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대야 안으로 손을 뻗었다.

“아……으.”

차가울 것 같았던 물은 오히려 따뜻했다. 그게 더 싫었다. 물컹거리는 촉감에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모래시계가 똑바로 세워지자, 안에 있는 모래가 스르륵 떨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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