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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62)화 (62/129)

62화

“천한 여자의 뱃속에서 태어난 놈이, 형님의 핏줄인지 뭔지 알게 뭐냐! 찔리니까 날치려고 이런 일을 벌인 게로구나!”

내가 막 다급하게 삼 층까지 올라갔을 때, 멜라톤 백작의 목소리가 복도 한가득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꺄아악!”

그리고 연이어진 사용인들의 비명 소리.

나는 그것을 듣고 이미 내가 한발 늦었다는 것을 예감했다.

루퍼트가 칼을 뽑아 든 채 방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런데 멜라톤은 그 앞에서 스스로 목을 조르며 피를 토하고 있었다. 루퍼트가 아직 그를 공격하기도 전이었다.

“으헉…… 컥, 크헉.”

얼굴이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언젠가 한 번 봤던 모습이다.

루퍼트는 그 모습을 보고서도 당황하지도 않고 그대로 서서, 분노에 찬 시선을 멜라톤에게 고정하고 있었다.

“으……억, 헉…….”

그는 멜라톤이 죽어 가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봤다. 멜라톤은 피가 바닥에 흥건하게 고일 때까지 토해 내다, 결국 그 자리에 쓰러져 숨을 거뒀다.

루퍼트는 그때까지 검을 세우다, 멜라톤이 완전히 죽은 것을 확인한 뒤에야 검 끝을 바닥으로 향하게 했다.

만일 그대로 죽지 않았더라면, 본인이 죽였을 것이다.

문 밖에서 본 그 끔찍한 광경에 몸이 굳었지만, 나는 용기를 내어 천천히 한 발자국씩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루퍼트는 분노에 이성을 잃은 듯, 내가 들어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칼끝은 곧, 구석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엘리아나를 향했다.

“두 번 묻지 않겠다. 바른대로 말해. 멜라톤이 내 아버지께 독약을 먹였나?”

엘리아나는 입술을 달싹거리면서도 무슨 말도 내뱉지 못했다.

“아……음, 어…….”

하지만 루퍼트는 엘리아나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계속해서 그녀를 다그쳤다.

“멜라톤과 짜고 내내 아버지께 독약을 먹인 것이냐? 네가 사실대로 말한다면 죄를 면하게 해 줄 수는 없어도 편하게 죽을 수 있게 해 주겠다.”

“흑, 아…… 독, 독약이…….”

그러는 내내 그녀는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클로에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나는 본능적으로 엘리아나에게 성큼 다가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에린!”

루퍼트가 소리쳤고, 나는 그를 무시한 채 엘리아나를 다독거렸다.

“괜찮아요, 진정하고 눈을 감아요.”

“마……님?”

엘리아나의 입이 트이는 걸 확인하고는 나는 그녀를 떼어내며 나와 눈을 마주치게 했다.

“어때요, 좀 낫나요?”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모르면서도, 엘리아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작 이렇게 묻는 나조차도 이 힘의 실체를 잘 몰랐다.

“그럼 말해 봐요.”

다시 엘리아나를 루퍼트와 모두에게로 돌려세웠다. 하지만 루퍼트는 이미 엘리아나가 아닌 나를 보고 있었다.

“여긴 무슨 일이야? 떠난…… 거 아니었어?”

그는 정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떠난다는 걸 알고, 없을 때를 틈타 일부러 이런 일을 벌인 걸까?

어째서?

“이런 거…… 보여 주고 싶지 않았는데.”

중얼거리는 모습이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는 와중에, 정신을 차린 엘리아나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멜라톤 백작님이 주신 약은 독약이 아니에요.”

“하지만 저 자가 약을 먹이는 장면을 내가 직접 봤고, 아버지는 죽어 계셨다. 게다가 당사자는 그대로 자결해 버렸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지?”

루퍼트는 멜라톤이 피를 토하며 죽은 것을 자살이라고 결론지어 버렸다.

“독약이 아니라면 무슨 약이지?”

“그건…….”

엘리아나는 흘긋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난감해졌다.

에녹은 여기 오기 전, 나에게 언데드화에 대한 이야기는 되도록 하지 말라고 했다. 나 역시 일의 심각성을 떠나 내 정체까지 들킬 수 있는 일이라는 점에서 거기까지 언급하는 것은 반대였다.

나는 슬쩍 고개를 저었고 엘리아나는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말해, 독약이 아니라면 무슨 약인지. 아니면 직접 마셔 보던가. 같은 장소에 있었으면서 이 자를 말리지 않았지, 너 역시 공범이다.”

“그런……!”

하지만 루퍼트가 엘리아나까지 죽일 기세라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한숨을 지으며 엘리아나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자 루퍼트가 주춤거리며 조금 뒤로 물러났다.

“에린.”

“독약이 아니라잖아요.”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엘리아나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이미 돌아가셨었어요, 약을 드시기도 전에!”

“그 말을 누가 믿을 수 있겠어?”

루퍼트 역시 답답한 듯 소리 질렀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협탁 위에 있던 약그릇을 손에 쥐었다.

“에린, 무슨 짓이야!”

“잘 봐요.”

약그릇을 들고 있는 손이 살짝 떨렸다. 제발, 내게 정말 특별한 능력이 있기를. 만일 없다면 나는 이후 어떻게 되는 걸까. 언데드화 되어 버리는 건가?

나는 찰나의 망설임 중에 오만가지 생각을 했다. 루퍼트가 그릇을 뺏기 위해 다가왔고, 나는 결국 단숨에 그것을 삼켜 버렸다.

“에린……!”

매우 쓸 것 같던 약은 의외로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나는 약그릇을 모두 비웠다는 걸 모두에게 보여 준 후에, 다시 협탁 위에 내려놓았다.

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모여들었다.

어느새 에녹도 와서 문가에 비스듬히 기대있었다. 잔뜩 굳은 그의 표정에 나는 슬쩍 시선을 피해 버렸다.

내 앞으로 온 루퍼트가 버럭 화를 냈다.

“이게 무슨 경솔한 짓이야, 죽으면 어떡하려고!”

“……죽으면 죽는 거죠.”

한숨을 쉬며 나는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내 뒤로 편안한 표정의 공작이 누워 있었다.

두근, 두근.

태연한 척했지만, 나 역시도 긴장하고 있었다. 혹시나 내가 예상한 결과와 다르게 나올까 봐서, 나는 내 심장 박동 소리에 집중했다.

방 안에 침묵이 흐르는 동안, 멜라톤의 시체가 치워지고 있었다. 나는 곁눈질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그가 죽은 이유는…… 자연스럽게 나는 클로에를 보았고,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어쩐지 클로에는 흥미로운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시체가 치워지고 피가 닦이는 것까지 보고 난 후에,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앞으로 걸어나왔다.

“어떤가요, 멀쩡해 보이지 않나요?”

“당신, 에린…… 괜찮아?”

루퍼트의 음성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그는 내게 다가왔다.

“보시다시피, 괜찮아요.”

나는 그에게서 한 발자국 멀어지며 당당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독살이란 말은 그만둬요, 공작님은…… 병세가 깊어 돌아가신 거예요.”

과정을 세세하게 말하지 않았을 뿐, 이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게 사실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루퍼트의 곁에 있었다.

따라서 루퍼트도 알면서 모른 척했을 거란 생각이 거의 확신으로 굳혀졌다. 돌연 손끝이 차게 식었다.

“나는 수도로 먼저 떠나기 전에 전할 말이 있어서 다시 온 거예요.”

하지만 할 말은 전해야 했기에, 나는 경멸감을 다 누르지 못한 채 루퍼트를 바라보았다.

“어젯밤 공작님께 인사드릴 때, 공작님이 제게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들은 그대로를 전달하기 위해 최대한 차분한 어조로 말하려고 노력했다. 숨을 짧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이 상황에서 별로 하고 싶은 말은 아니었지만, 고인의 말을 왜곡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어리석은…… 내 아들 루퍼트에게, 작위와 영지 모두를 물려주겠다고. 후대의 일은 후대에게 맡기겠다고 말씀하셨어요.”

내 말을 들은 루퍼트가 얼어붙은 듯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모두가 숨을 죽였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그를 보았다.

그러니까 공작은 당신을 이미 친아들이라고 생각했었고, 이따위 쇼는 다 헛일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했다.

아예 멍청한 건 아니었는지, 루퍼트는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짚으며 검을 집어 던졌다. 그리고 도망치듯이 이 자리를 벗어났다.

리차드는 복잡한 표정으로 누워 있는 공작을 바라보았고, 클로에는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의심과 호기심, 원망과 부러움이 뒤얽힌 복잡한 표정이었다.

“이것 참…….”

그때, 태연하게 혀를 차는 음성이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 속에 날아들었다.

“제국의 기둥인 클리포드 공작이 죽다니, 참 유감이군. 다만 폐하께 오늘 본 걸 뭐라 전해야 할지.”

나는 난감한 듯 읊조리는 에녹에게로 걸어갔다.

“이제 가죠, 전하.”

에녹은 일단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마땅치 않은 눈으로 나를 흘긋 바라보았다. 왜 그러는지 알 것 같기도 했지만, 나는 모른 척 앞을 보며 걸었다.

아마도 약을 직접 삼킨 것에 대한 우려와 질책이겠지. 나 역시도 조금은 위험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다시 일 층 로비로 내려왔을 때, 그가 물었다.

“장례에는 참석하지 않으실 겁니까.”

“……저는 이미 따로 인사를 드렸는걸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에린 스필렛 개인으로는 이미 작별 인사를 드렸다. 다만 클리포드 소공작 부인, 이 성의 안주인으로서의 역할은 이제 사양이다.

“어서 가요.”

누가 잡기 전에, 라는 말을 생략한 채 나는 에녹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랐다.

에녹이 맞은편에 올라타자마자 마차를 출발시켰다.

흘끔 뒤를 돌아보자, 역시나 내 예상대로 뒤늦게 따라 나온 루퍼트가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홱 하고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려 눈을 감았다.

루퍼트는 공작 작위를 무사히 받긴 했지만, 그 자리에서 멜라톤이 출생의 비밀을 폭로하는 바람에 여러 사람에게 그의 치부를 들키고 말았다.

당분간은 입막음을 한다고 해도, 결국은 퍼져 나갈 것이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를 죽이지 않는 이상.

하지만 그 자리에는 리차드가 있었고, 에녹도 그 자리의 증인이었기 때문에 모두를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

혈통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이 시대에, 그런 소문은 아마 꼬리표처럼 내내 따라붙을 테지.

나는 루퍼트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누군가의 악행을 눈감은 죄가 있으니,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지 않나 생각했다.

멜라톤도 독약은 아니었지만, 그보다 더 위험한 약을 공작에게 먹인 셈이니 목숨으로 값을 치른 것이고.

‘다만, 한 명은 아무 죄도 받지 않았어.’

나는 다시 눈을 떴다. 앞에 앉은 에녹이 눈을 마주치며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나 역시 생긋 웃었다.

이 성을 벗어나 수도에 가는 그날부터, 나는 루퍼트와의 이혼 절차를 밟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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