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엘리아나와 몇 마디 더 이야기를 한 후, 나는 곧장 다시 공작의 방으로 향했다.
방 안의 냄새가 아까보다 옅어져 있었다.
나는 공작이 누워 있는 침대 옆에 다가가 섰다. 바짝 마른 고목처럼 검게 말라붙은 살가죽과, 퀭한 눈꺼풀에 잠시 시선을 뒀다.
새와 같은 거라면, 내가 공작과 가까이 할수록 이 사람은 죽음을 향해 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 사이 공작이 눈을 떴다.
“……에……린.”
버석하게 마른 입술이 열리고, 그보다 더 거칠고 메마른 음성이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죽은 자의 목소리였다.
“네, 공작님.”
그렇다면 공작을 처음 만난 날, 그날의 대화가 살아 있는 공작과의 마지막 대화였던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루퍼트, 불쌍한…… 녀석…….”
그래도 아버지는 아버지인가. 아들에 대한 연민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담담하게 공작을 내려다보았다. 문득 그의 의향이 궁금해졌다.
나는 상체를 조금 기울여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공작님, 드시는 그 약은 생명을 연장시켜 주는 약이에요. 계속 드시고 싶으신가요?”
더 살고 싶냐는 말을 애써 돌려 말했다. 그리고 본인이 먹는 약이니 그것도 알긴 알아야 할 것 같았다.
공작은 대답하지 않고 눈만 느리게 깜빡거렸다. 그리고는 이내 눈을 감았다.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패여 있었다.
“…… 졸리구나, 이제 쉬고 싶어.”
그는 몹시 지쳐 보였다.
그것은 곧 대답이 되었다. 내 손이 저절로 움직여 그의 손등을 살짝 쓰다듬었다. 바짝 마르고 거친 촉감이 손끝에 느껴졌다. 이게 가능한 건지, 정말 내 능력이 맞는지는 의문이었지만.
“공작님.”
한 번 더, 느리게 손등을 쓰다듬자 그는 아까보다 편안한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물론 아직 죽은 건 아니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나는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댔다. 그리고 그가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치맛자락을 들고 무릎을 굽혔다.
“그럼 편히 주무시길.”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뒤돌아 나왔다. 이제 내일이면 이곳을 떠날 것이다.
나는 내려가자마자 제니에게 떠날 채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날이 밝자마자 나는 부리나케 마차를 준비시켰다.
“이미 준비되어 있는데요?”
“……그래?”
제니가 말하는 걸 듣고는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종종 타고 다니던 황실 마차가 떡하니 성 앞에 나와 있었다. 왠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아 어딘가가 간지러웠다.
나는 최대한 웃음기를 거두고 몸을 돌려 문을 나섰다. 우아하게 걷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이윽고 마차 앞에 서자, 문이 안에서부터 저절로 열렸다. 그리고 잘생긴 남자 하나가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일찍 나오셨군요.”
“……잠이 오지 않더라고요. 그리고 또 혹시나…….”
나는 조금 불안해서 휙휙 주변을 살폈다. 몇몇 사용인이 인사를 하러 나왔을 뿐, 루퍼트와 클로에는 보이지 않았다.
에녹이 손을 내밀고, 나는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출발할까요?”
에녹이 나를 보며 물었다. 그러자고 대답해야 하는데, 목구멍 안이 탁 막힌 것처럼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백작.”
나는 마음을 다잡으려 에녹을 바라보았다.
“전하, 아무래도.”
그리고 곧은 자세를 유지한 채 그를 불렀다. 그가 얘기하라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말을 전해 주고 가야 할 것 같아요.”
루퍼트를 마주치는 게 껄끄럽기도 하고, 또한 어차피 그렇게 될 일이라 생각하여 그냥 가 버릴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마음을 바꾼 이유는 그것이 곧 공작의 유언이나 다름없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것을 전해 주기 위해 결국 다시 마차에서 내려 성으로 향했다.
***
엘리아나는 깊은 생각에 빠진 듯, 멍한 시선으로 앞을 바라보며 쟁반을 들고 있었다.
“자, 오늘은 양이 많으니 조심해서 들고 가거라.”
늘 그렇듯, 멜라톤이 그 쟁반 위에 약그릇을 올려 주었다.
엘리아나가 그 자리에 선 채, 오목한 그릇 속에서 찰랑거리는 액체를 잠시 바라보았다.
“뭐하느냐, 가지 않고.”
“아…… 네.”
멜라톤의 재촉에 엘리아나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멜라톤은 그런 그녀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다 뒤따라갔다.
“어리숙하게 굴지 마라, 안 그러면 이 약도 없을 테니까. 그럼 형님은 곧 죽어 버리겠지.”
“…….”
평소 같으면 겁을 집어먹고 사과했을 엘리아나였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아무 대꾸도 없이 묵묵하게 계단을 올라가기만 했다.
하지만 멜라톤은 신경 쓰지 않았다. 고작 하녀 출신인 정부 따위의 기분은 그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계단을 오르며 멜라톤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공작의 아들인 루퍼트는 공작에게 별 관심이 없었고, 삼 층에는 거의 오지 않았다.
함께 방으로 들어간 멜라톤이 뒤에서 엘리아나와 공작을 바라보았다.
엘리아나는 약그릇과 숟가락을 든 채 공작을 바라보았다.
공작의 안색이 어제보다 밝았다. 마치 좋은 꿈을 꾸는 것처럼, 편안하게 잠든 것처럼 보였다.
“뭐하는 거야? 어서 형님께 약을 먹이라고.”
답답한지 멜라톤이 한소리를 했지만, 엘리아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봐, 엘리아나!”
멜라톤이 다가가 그녀를 툭 건드렸고, 엘리아나는 움찔 떨며 뒤로 물러났다.
“에이, 진짜 답답하게!”
멜라톤은 엘리아나의 손에서 약그릇을 뺏어 들었다. 그리고 한쪽 손으로 공작의 입을 열고는, 다른 손으로 약그릇을 들고 입 안에 부어 넣으려 했다.
하지만 입 안에 들어간 액체는 전혀 삼켜지지 않고 그대로 흘러나왔다.
“뭐야, 왜 이래. 형님, 형님?”
너무 깊게 잠들었나 싶어 멜라톤이 클리포드 공작을 흔들어 깨웠다. 그러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형님……?”
자세히 보니 공작의 안색은 밝다 못해 창백해 보였다. 흔들리는 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멜라톤은 약그릇을 바닥에 놓고는 공작의 귀 아래 목에 손을 갖다 댔다.
“아니야, 설마…….”
엘리아나가 입을 가리며 놀란 눈을 크게 떴다.
“형님, 형님! 안 됩니다, 이대로 죽어 버리다니요!”
멜라톤이 공작을 더욱 세게 흔들며, 바닥에 놨던 약그릇을 다시 손에 들었다. 이미 한 번 숨을 거뒀던 공작을 이 약으로 살려 냈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이 약으로 살려 내면 된다.
멜라톤은 그렇게 생각하며 떨리는 손으로 약그릇을 공작의 입에 갖다 대고는 마구잡이로 부어 버렸다.
그때 갑자기 문이 열렸다.
멜라톤과 엘리아나가 동시에 열린 문을 바라보았다.
“……루퍼트!”
루퍼트가 무시무시한 표정을 한 채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싸늘하게 멜라톤을 바라보았다.
“손 떼, 뭐하는 거지?”
“너, 너. 이 녀석, 지금 숙부한테 무슨……!”
“숙부라니,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루퍼트는 뚜벅뚜벅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손에 들려 있는 약그릇을 뺏어 들고는 멜라톤을 한쪽으로 밀어 버렸다.
루퍼트는 공작의 상태를 눈으로 확인하고는 멜라톤을 향해 말했다.
“당신은 지금부터 클리포드 공작을 독살한 살인범이니까.”
“무슨……! 이건 그런 약이 아니야!”
“지금 대놓고 먹이는 걸 봤는데도 시치미를 떼는군.”
루퍼트는 아직 액체가 남아 있는 약그릇을 협탁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놓았다. 그리고 흘끔 뒤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자를 체포해서 지하 감옥에 가둬라.”
루퍼트를 따라온 기사들은 일사불란하게 멜라톤을 끌어당겼다. 마치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는 듯 준비가 철저했다.
“아니야, 내가 죽인 게 아냐! 이미 왔을 때 형님은 죽어 있었다고, 루퍼트!”
엘리아나는 구석에 선 채 벌벌 떨고 있었다. 루퍼트는 무시무시한 눈길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네가 한번 말해 봐라. 바로 옆에 있었으니까.”
“그게 그러니까…….”
멜라톤은 분명 공작에게 약을 먹였지만, 독약을 먹인 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분명히 확인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 그녀는 제대로 입을 벙긋할 수가 없었다. 당황하여 눈만 굴리는 와중에, 누군가 소리 없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클로에였다.
“……루퍼트.”
“클로에, 들어오지 마. 보기에 좋진 않을 거야.”
그리고 이어서 리차드가 뛰어 들어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방 안을 바라보았다.
“설마, 공작 각하께서…….”
“이봐, 리차드! 내 말 좀 들어 보게! 난 형님을 죽이지 않았어!”
리차드는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루퍼트를 향해 물었다.
“도련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저 자가 저 약을 내 아버지께 먹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상태인 거지.”
“멜라톤 백작님! 사실입니까?”
“아냐, 아니라고!”
뒤이어 소식을 들은 사용인들도 뛰어 들어왔다.
“공작님이, 이럴 수가!”
그들은 공작이 죽었다는 걸 직접 눈으로 보고 난 후, 그 자리에 주저앉아 슬피 울었다.
“그건 독약이 아니라니까!”
“그럼 무슨 약이지?”
“그건…… 그러니까…….”
루퍼트가 따져 묻자, 멜라톤은 클로에를 흘끗 보았다. 그런데 그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무언가에 의해 입이 막힌 듯 웅얼거리다, 갑자기 전혀 다른 말을 내뱉었다.
“이놈, 루퍼트! 서자 주제에!”
“닥쳐.”
서자라는 말이 나오자 리차드도, 다른 사용인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루퍼트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오래 일했음에도 그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루퍼트의 서슬 퍼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멜라톤은 더욱 흥분하여 외쳤다.
그의 말은 루퍼트에게 있어 역린이었다.
“천한 여자의 뱃속에서 태어난 놈이, 형님의 핏줄인지 뭔지 알게 뭐냐! 찔리니까 날 치려고 이런 일을 벌인 게로구나!”
멜라톤의 말이 끝난 순간, 루퍼트의 푸른 눈동자가 순간 이성을 잃고 번뜩거렸다. 그는 결국 칼을 뽑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