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다음날 오후가 될 때까지 클리포드 공작성은 조용했다. 루퍼트도, 클로에도 별다른 움직임 없이 잠잠했다.
나는 지난밤 이런저런 생각 덕분에 한숨도 자지 못했다.
‘결국 그냥 이렇게 내일 떠나야 하는 건가.’
사실 나는 정말로 외부인이다. 공작성에서뿐만 아니라, 이 세계 자체의. 원작을 조금 안다고 해서 세계의 큰 흐름을 바꿀 수는 없다.
공작이 어제 봤던 그 새와 같다면, 이미 정해진 수명을 다 살고 가는 셈이었다.
‘운명이라고 해야 하나.’
그럼 나 에린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원작의 내용이 이 세계의 운명이라고 한다면, 에린은 진작 죽었어야 했다.
물론 이 몸의 옛 주인이었던 에린은 훨씬 전에 죽었지만, 지금의 나는 살아 있다.
‘벗어난 걸까.’
나는 이 층 복도를 거닐며 물끄러미 삼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떠나면 그만이라지만, 자꾸 공작의 모습이 어제의 새와 겹쳐 보였다. 고통받는 걸 알면서도 방관해야 할까.
하지만 섣불리 내가 공작에게 다가가서 그가 그대로 죽어 버린다면, 주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었다.
클리포드 공작이 이 제국에서 가지는 위상과 그 작위가 승계된다는 의미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어쨌든 이야기 정도는 해 봐도 되겠지.’
나는 입술을 꼭 다문 채 치마 앞자락을 들고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갔다.
삼 층의 공작 방에 다다르자 또 그 냄새가 났다. 나는 노크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엘리아나 양.”
엘리아나는 깜짝 놀라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손에는 여느 때와 같이 약그릇이 들려 있었다.
“마님?”
나는 침대로 다가가 누워 있는 공작의 얼굴을 흘긋 바라보았다. 공작은 검푸른 안색을 한 채 색색 숨을 내쉬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말은 하지 못했으나 나는 그의 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색이 바랜 푸른 눈동자와 붉게 물든 흰자위가 또다시 새를 떠오르게 했다.
나는 엘리아나의 손에서 약그릇을 빼앗아 들었다.
“앗, 마님! 그 약은!”
“일단 잠시 나와 이야기 좀 해요.”
엘리아나는 절박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먼저 나가세요, 이 층 응접실로 가 있어요.”
그녀의 원망하는 눈빛에도 불구하고 나는 명령조로 말했다. 엘리아나는 결국 내게 굴복하며 문밖으로 나가 버렸다.
나는 약그릇을 그대로 든 채 공작을 내려다보았다.
“…….”
그의 의향이라도 물을까 했지만, 어느새 눈이 감겨 있었다.
‘살아 있지만,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는 상태.’
하지만 첫날, 그리고 에녹이 온 날은 비교적 멀쩡해 보였었는데.
그건 약의 힘이었을까, 아니면 나도 모르는 나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어쨌든 상관없다.
나는 창문을 열고 그릇에 들어 있는 액체를 그대로 창문 밖에 내다 버렸다. 그리고 나서야 엘리아나를 따라나섰다.
이 층 응접실로 가 보니 엘리아나는 앉지도 못한 채 그곳을 서성거리다 내가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엘리아나 양.”
“마님, 왜 방해하시는 거죠?”
엘리아나는 정말로 분노하고 있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어쩔 줄 몰라 했지만, 나를 보는 눈빛에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드러내는 모습이었다.
조금은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직 무슨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이 정도 일에 이렇게 흥분하는 모습이 평소답지 않아 보였다.
“엘리아나 양, 일단 앉아 봐요.”
나는 부드럽게 그녀의 주먹 쥔 손을 잡으며 그녀를 달랬다. 여기서 한동안 보아 온 모습을 볼 때, 엘리아나는 적어도 공작에 한해 악의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서요.”
손을 잡고 잠시나마 다독거리자 씩씩거리던 호흡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내 손길에 순순히 이끌려와 소파에 자리 잡았다.
“……죄송합니다, 마님. 잠시 격해졌네요.”
그녀의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약에 대해 당장 묻기보다는 조금 우회해서 접근하기로 했다.
“엘리아나 양에게 공작님은 어떤 존재였나요?”
엘리아나는 잠시 고개를 떨군 상태로 말이 없었다. 잡고 있는 손을 놓지 않은 채 차분히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눈가에 붉은기가 더욱 짙어졌다. 그리고 이내 눈물이 고여 볼 위를 타고 내렸다.
“공작님은…….”
떨리는 목소리가 울음에 젖어들었다.
제니가 조용히 눈치를 보며 찻잔 두 개를 놓고 나가는 동안 나는 인내심 있게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제게 은인이에요. 공작님은 고아였던 저를 거둬주시고, 하녀로 일하게 해 주셨죠.”
나는 가만히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녀의 손을 놓고,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귀족 성에서 일하는 하녀는, 귀족들 입장에서 보면 별것 아닌 거 같겠지만, 실상 평민 여자가 할 수 있는 직업 중에서는 최고로 쳤다.
물론 모시는 귀족의 성격에 따라 난이도가 천차만별이지만, 기본적으로 봉급이 높고 숙식이 제공되는 데다, 바깥의 사람들도 누구 집 하녀라고 하면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제가 병에 걸렸고, 한참을 앓아눕느라 일을 못하게 되었어요. 사실 그 정도라면 보통은 쫓겨나거나…… 스스로 나가야 해요.”
다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흘러내렸다.
“하지만 공작님은 더 가까이 절 거둬 주셨어요! 제가 정부라고들 하지만, 사실 그분과 저는 그런 관계가 아니에요. 공작님은…… 저에게는 아버지 같은 분이에요.”
그녀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바르르 떨며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차분하게 일렁이던 눈동자에 다시 불꽃이 일어났다.
“……그래서 공작님을 그대로 돌아가시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마님은!”
“엘리아나 양.”
갑작스러운 흥분에 당황하면서, 나는 그녀의 어깨를 손으로 짚고 다독거렸다.
“진정해요.”
“……아.”
경직됐던 몸이 풀리고, 그녀의 마음이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점점 묘한 기분이 들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녀가 쉽게 흥분하는 게 꼭 이 상황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일단 엘리아나 양에게 공작님이 소중한 분이라는 건 잘 알겠어요.”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나는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뭘 알고 잡았다기보단,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손을 잡고 그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엘리아나는 고개를 떨구며 먼저 시선을 피했다. 나는 아까보다 한 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뭘 숨기고 있는 건가요?”
“숨기……다니요.”
“엘리아나 양, 내 눈을 봐요. 정말 없어요?”
엘리아나는 잘게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잠시 눈을 마주하자, 그 떨리던 눈동자가 점점 안정되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저는.”
하지만 흐느낌은 더해졌다. 나는 그녀의 울음을 내버려 둔 채,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사실 봤어요, 공작님이 숨을 거두시는 장면을요.”
“그……럼.”
조금은 충격이었다. 공작의 수명을 억지로 늘렸다는 예상은 했지만, 이미 죽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게 언제인가요? 약은 언제부터 드신 거고요?”
“약은 마님이 오시기 일주일 전부터예요. 그때는 많이 쇠약해지긴 했지만 살아 계셨어요. 그런데 마님과 처음 만난 이후…….”
“이후?”
“편히 주무시는 줄 알았는데, 숨을 쉬지 않으시더라고요. 그래서 너무 놀라서 일단 허겁지겁 약을 입에 넣어 드렸는데……. 다시 숨이 돌아왔어요.”
엘리아나는 자신이 본 것을 말하면서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설사 약을 써서 살아났다고 해도, 죽은 사람은 그걸 삼킬 수가 없다.
“그 약은 공작님을 살려 드리는 약이에요.”
“하지만 공작님은 그 약을 드시기 싫어하시는 것 같았는데, 아닌가요?”
“……하지만 살리는 방법이 있는데, 어떻게 죽는 걸 보고만 있겠어요.”
그녀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소중한 사람이 죽어 간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리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건 정말 살리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엘리아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영혼을 사로잡혀 누군가의 꼭두각시가 된다고 했다. 멜라톤 백작이 공작을 꼭두각시로 이용하려고 이런 짓을 벌이는 걸까? 그는 그 약을 어디서 구했을까?
“정말로 그 약을 드시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곁에서 지켜봤잖아요.”
“물론 그 약을 드시고 나면 혈색이 안 좋아지시고…… 정신이 흐릿해지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살아 계시니까, 저는 그것만으로도 좋았어요.”
엘리아나는 간절하게, 하지만 자신 없는 말투로 내게 말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있자니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설득이 안 될 것 같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며 한숨을 쉬었다.
내게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좋았군요, 공작님은 고통스러워하시는 것 같던데.”
슬쩍 엘리아나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그러자 그녀는 내 말에 동요하는 듯 움찔 떨다 고개를 떨궜다. 그녀의 손바닥이 치마 위를 문지르고 있었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소중하다는 사람을 고통 속에 살게 하는 게, 진정 그를 위하는 걸까요? 글쎄요, 난 아닌 것 같은데.”
“……마님.”
“살아도 사는 게 아닐 거예요. 잘 생각해 봐요. 나는 곧 떠날 거니까.”
“가세요? 언제요?”
엘리아나가 따라서 벌떡 일어나며 물었고,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줬다.
“내일요.”
“아…….”
그녀는 조금 놀란 듯 보이긴 했지만 딱히 나를 잡거나 크게 아쉬워하진 않았다. 나에게 특별한 정이 생기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고, 이혼할 거라는 사실을 모르니 다시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 마님.”
엘리아나가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나는 그대로 나가려다 그녀를 돌아보았다.
“조심히 가세요.”
역시 그 약은 클로에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엘리아나는 공작을 살리는 약이라며 집착했지만, 사실 이 상황이 매우 이상하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고마워요.”
짧게 인사하고는 그대로 응접실을 나와 버렸다.
이제 선택은 그녀와 여기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이후의 일이 어떻게 되든, 나는 더 이상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