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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59)화 (59/129)

59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혼란스러웠다. 잘하는 건가. 이를테면 이건 안락사라는 건데, 이건 내가 전에 살던 세계에서도 아직 도덕적 관념이 자리 잡지 않은 문제였다.

하지만 그런 내 혼란에 종지부를 찍어 준 건 역시 에녹이었다.

“새의 수명은 이미 한참 전에 다했었습니다.”

“그럼?”

“억지로 늘려 붙인 것이죠. 살아 있지만, 살아 있다고 말하기 애매한 상태라고 해야겠군요.”

에녹이 새를 후원 구석 풀이 난 땅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새가 빠르게 부식되어 땅속에 스며들었다. 나는 그 놀랍고도 끔찍한 광경에 눈을 돌려 버렸다.

“어째서…….”

혼란스러운 마음에 에녹을 보며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자 에녹이 쉿 하는 입술 모양과 함께 검지를 들어 올렸다.

에녹은 보지도 않고 그의 뒤에서 다가오는 이를 알아차렸다.

역시 그 혈통 탓인가, 남들보다 훨씬 뛰어난 감각을 갖고 있었다. 나는 그 방향을 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녹보다 한 박자 늦게 알아차렸다.

뛰어난 기사이기 때문인지, 루퍼트의 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궁금한 게 많은데 왜 하필 지금 등장하는 거야!

정말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다.

그렇게 내가 분통을 터뜨리건 말건, 루퍼트는 내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가까이 다가왔다.

루퍼트는 에녹을 보는 둥 마는 둥 흘긋거리다 입을 열었다.

“밤이 깊었습니다. 여기서 뭘 하고 계셨습니까.”

분명 에녹에게 하는 말이었는데, 날 쳐다보며 말을 한다. 그 기이하기 짝이 없는 시선에도 불구하고 에녹은 선선히 대답해 주었다.

“보다시피 밤 산책 중이었네.”

“단 둘이…… 말입니까.”

루퍼트의 목소리가 점점 음습해졌다. 또 혼자 괜히 오해 중인 모양이었다. 뭐, 완전히 오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나 에녹이 의도한 상황은 아니었다.

“아니, 그건.”

내가 재빨리 설명하려 하는데, 루퍼트가 흡사 잡아먹을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당신, 제정신이야? 이 밤중에 돌아다니다니, 이 성의 안주인이라는 자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그리고는 버럭 화를 내는 게 아닌가.

내가 좋다 할 때는 언제고, 그럼 질투를 해도 곱게 해야지. 에녹 앞이라 적당히 넘어가려 했는데, 순간 나도 욱 하고 화가 올라왔다.

하지만 소리치진 않았다. 내 방식과 맞지 않았으니까. 나는 최대한 톤을 유지하며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조용히 해요, 루퍼트. 당신이야말로 너무 시끄럽네요.”

“……뭐라고?”

“정말, 눈치를 어디에 둔 건지 모르겠네. 나는 이런 식으로 당신을 방해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나는 말을 하며 루퍼트보다 에녹을 먼저 흘끔 쳐다봤다. 혹 그가 불쾌하다면 당장 그만둘 셈이었다. 하지만 에녹은 싱긋 웃어 보일 뿐 어떠한 말이나 제재도 하지 않았다.

후, 그렇다면야.

“당신의 정부가 이곳에서 밀회를 나눌 때도 나는 기꺼이 모른 척 해 줬다고요. 좀 눈치껏 빠져 주면 안 돼요? 루퍼트 클리포드 소공작님.”

“……에린, 너 정말 이런 식으로 나올 거야?”

그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나 역시 결국 터져 버렸다.

“내가 뭘 어쨌다는 거야? 루퍼트, 정말 작작 좀 해.”

“에린……!”

어둠 속에서도 루퍼트의 얼굴이 화르륵 불타오르는 게 선명하게 보였다. 그가 지나치게 흥분하는 듯하자 결국 에녹이 중재에 나섰다.

“루퍼트, 흥분했군. 목소리가 지나치게 큰 것 같네.”

그러자 루퍼트가 휙 하고 고개를 돌려 에녹을 바라보았다.

둘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쳤다. 눈빛만 봐서는 루퍼트가 에녹을 한 대 칠 것만 같았다.

이거, 어디선가 많이 보던 상황 같은데. 무도회에서였던가. 그렇게 난감하던 찰나에, 루퍼트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죄송합니다.”

이를 가는 목소리로 그가 먼저 사과를 했다. 이 상황에서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어쨌든 흥분은 가라앉는 듯했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

에린은 조금 불안한 듯 흘끔 뒤를 보다 에녹을 바라보았다. 그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자 안심하며 다시 걸어갔다.

루퍼트는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계속해서 눈으로 쫓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서 손을 잡아 주는 건 자신이 아닌 에녹이었다.

“빌어먹을.”

에녹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욕지거리가 입 밖으로 튀어 나왔다. 피의 속박이 대체 무엇이길래, 그의 앞에선 욕설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했다.

황태자의 눈, 한없이 여유만만한 그의 눈을 보고 있으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어른 앞에 선 아이가 된 것 같은 무력감과 함께, 빌어먹게도 그의 명령이라면 무엇이라도 수행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근본 없는 충성심이 용솟음쳤다.

루퍼트는 그 기분이 무척이나 싫었다.

‘차라리 아예 이런 생각조차 안 들었다면 모를까.’

본인의 자의식이나 기분까지도 없애 버릴 만큼 강한 속박이었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기분은 기분대로, 충성은 충성대로 따로 논다는 것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루퍼트는 나름대로 이리저리 속박을 풀 방법을 찾아 봤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이런 상황에서 충성 맹세까지 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황태자의 개가 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미루고 미루었지만, 그것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은 아직 소공작이었다.

‘그것도 이제 얼마 안 남았지만.’

루퍼트는 주먹을 꽉 쥔 채 공작이 잠들어 있는 삼 층 창문을 바라보았다.

클리포드 공작은 루퍼트에게 있어서 가장 존경하며, 동시에 가장 증오하는 사람이었다.

‘그깟 황태자가 뭐라고.’

필사적으로 황태자에 대한 본능적인 애착을 거부하면서, 루퍼트는 공작의 의심과 미움을 사고 말았다.

공작은 심지어 루퍼트가 친아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그 앞에서 서슴없이 드러내곤 했다. 루퍼트는 그것을 잊지 못했다.

“하지만 원망하지 마세요, 아버지. 앞을 깨끗이 닦아 놓지 않은 건 아버지가 아니십니까.”

분명히 자신과 맞는 방식은 아니었다.

루퍼트는 복잡한 건 질색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클로에에게 동의했던 건, 그녀가 달콤하게 속삭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

에녹은 친절하게도 나를 방문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저, 아직 궁금한 게 많아요.”

“그러시겠죠. 나도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았습니다.”

“그럼…… 들어오시겠어요?”

나는 이번에는 조금 머뭇거렸다. 내가 그의 방에 들어가는 게 아니고, 그가 내 방에 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루퍼트가 벌컥벌컥 들어왔을 때에는 이런 기분이 아니었는데, 에녹이 이 방에 들어온다 생각하니 어딘가 낯간지러웠다.

에녹은 대답 없이 애매한 웃음을 보이며 문 옆 벽에 기대섰다.

“아까 하던 얘기를 마저 할까요.”

그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작았는데, 발음이 정확해서 그런지 듣는 데에는 별로 지장이 없었다.

“음, 그러니까. 제가 혹시 나쁜 기운을 갖고 있는 걸까요?”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몰라 당장 생각나는 것을 물어보았다. 에녹이 조금 웃는 것 같았다.

“새가 죽은 것을 두고 하는 말씀입니까.”

“네, 제가 만지고 새가 죽었잖아요. 멀쩡하던 새가…… 아니, 멀쩡해 보이진 않았지만.”

“말 그대로 멀쩡히 살아 있는 새는 아니었습니다. 억지로 생명을 잡아 둔 거죠.”

“그게 그러니까…… 뭐죠?”

이어진 내 질문에 에녹이 잠시 뜸을 들였다.

“백작이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나쁜 기운이라는 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요.”

이 사람은 답을 직접 떠먹여 주지 않는다.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않는 이상은. 덕분에 나는 내 상상력을 총동원했다. 이 세계에도 그런 게 있는 걸까?

“무슨 좀비라도 된 건가요? 새가요.”

“좀비? 비슷하지만 조금 다릅니다. 언데드화 되었다고 해야 하나요. 혼을 육체에 강제로 잡아 두고 세뇌하면서 점점 조종하는 걸 뜻합니다.”

다행히 좀비라는 용어를 알아들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설명에 나는 조금 더 심각해졌다. 새의 생명을 연장시켜 조종하고 있는 거라면, 혹시 공작도 같은 상황인 걸까.

“그렇다면 왜 제가 만졌다고 그…… 언데드화가 풀리는 건가요?”

이번 질문에 에녹은 벽에 기대선 그대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뜬금없이 다른 말을 했다.

“생각해 보니 백작이 루퍼트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걸 들은 건 굉장히 오랜만이군요.”

“그런 식이요? 아.”

반말한 걸 말하는 거구나.

나는 그저 화가 나서 맞대응한 것뿐인데, 에녹의 말을 듣고 보니 어린 시절에는 서로 반말을 주고받았었나보다. 혹시 친했나? 나로서는 에린의 어린 시절에 대해 모르니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그게 참 부러웠는데, 오늘 그걸 갚아 준 것 같아 기분이 꽤 좋습니다.”

“그게…… 부러우셨어요?”

에녹이 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머리를 갸웃거리며 한 번 더 질문했다.

“지금이라도 반말해 드려요?”

“그건…….”

그는 조금 멍한 표정으로 나를 보다 입술만 달싹거렸다.

“네? 뭐라고요?”

하지만 곧 기대에 찬 눈빛을 보고는 알 수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주위를 훑어보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에녹, 정말 안 들어갈 거야?”

그러자 에녹의 눈이 크게 뜨였다. 뭐야, 해 달라는 거 아니었어? 왜 그렇게 놀라는 건데.

그는 갑자기 문을 열더니 내 등을 슬슬 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일단, 일단 들어가세요.”

“……전하는요?”

“나중에, 아니, 그러니까 내일 얘기합시다.”

“잠시만, 아직 난……!”

내가 얼른 뒤를 돌아봤으나, 에녹은 그대로 문을 닫아 버렸다. 그래서 다시 열고 쫓아가려다, 결국 그만두고 말았다.

언뜻 본 그의 귓바퀴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괜히 뒷목을 슬슬 문지르며 침대로 걸음을 옮겼다.

“뭐야, 말을 하다 말고.”

하지만 엄청난 힌트를 얻은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오늘 들은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정리하면서 침대 맡에 놓인 손거울을 들어 올렸다.

거울 안의 내 얼굴도 아까 본 에녹의 귓바퀴만큼이나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나는 침대 위 이불을 뒤집어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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