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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58)화 (58/129)

58화

잠시 후, 진정이 된 클로에와 루퍼트는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루퍼트는 클로에가 내온 차를 대충 마시는 시늉만 하고는 내려놓았다. 클로에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손에 든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부인께서도 너무하시지, 당신 마음을 그렇게나 몰라 주다니…… 예전의 에린 스필렛을 생각해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클로에는 루퍼트의 곁에 앉아 조곤조곤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루퍼트는 고개를 느리게 저었다.

“아니야, 내가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외면하긴 했어. 알면서도…… 그래, 그녀를 원망하기에는 내가 너무 무심했지.”

그가 과거를 회상하듯 눈을 감은 동안, 클로에는 살짝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가 다시 놓았다.

마법석 동굴을 회수해 오라는 황자의 명령을 수행하려면, 일단 루퍼트와 에린의 부부 사이가 좋아져서 그녀의 소유가 루퍼트의 것으로 바뀌어야 했다.

하지만 막상 에린 때문에 고민하는 루퍼트를 눈앞에서 보자니, 질투에 몸이 달아올랐다.

어쨌든 2황자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만일 루퍼트로 실패한다면 황태자를 공략해야 한다.

몇 번인가 기회를 엿보았지만 에녹은 그 자체로 이미 만만하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클로에 스스로가 루퍼트를 원했다. 흑마법에 손을 댄 것도 애초에 그를 갖기 위함이었다.

클로에는 파들파들 떨리는 손끝을 감추기 위해 찻잔을 손에 더 꼭 쥐었다.

조용히 있던 루퍼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녀가 변한 건 다 황태자 때문이야.”

그는 구부정하게 등을 굽혀 두 무릎 위에 팔꿈치를 얹었다. 그 자세로 손을 깍지 끼고는 형형하게 눈을 빛냈다.

클로에는 무언의 긍정을 하며 그를 바라봐 주었고, 루퍼트는 그에 힘입어 더욱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 사람은 황태자라는 고귀한 신분에 모든 걸 가졌으면서도, 또 다른 걸 원하지. 황태자는 에린이 나만 바라보는 게 못마땅했던 거야. 내게 남은 유일한 것까지 뺏으려고…….”

턱에 힘을 주며 말하다가도, 루퍼트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툭 고개를 떨궜다.

그를 욕하는 건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마음속으로는 아무리 증오하고 질투해도, 그걸 입 밖으로 꺼내는 건 다른 문제였다.

피의 속박, 그것은 그를 앞에 두지 않은 상황에서도 유지되고 있었다.

떨어져 있을 때도 이 정도였으니, 눈앞에서는 더했다. 간신히 노려봐도 그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마주하게 되면 결국 고개를 숙이게 됐다.

그 상황에서 루퍼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게 고작이었다.

클로에는 안타까운 듯 바짝 붙어 앉아 그의 팔과 어깨를 슥슥 문질러 주며 마음을 달래 주었다.

“……황태자는 당신에게 정말 너무하네요, 루퍼트.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그를 계속 지지할 생각인가요?”

루퍼트는 고개를 돌려 그 말을 하는 클로에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클로에는 아차, 하며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냥, 별 뜻 없이 한 이야기예요. 오해하지 말아요.”

그러자 루퍼트는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며 클로에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아냐, 클로에. 나라고 왜 그런 생각이 없었겠어.”

“그럼…….”

“하지만 그건 내 뜻과 관계가 없어. 빌어먹을 내 선조가 벌인 일에 대대손손 얽매여 있지. 내 아버지까지만 해도 별 불만 없이 잘 견뎌 온 것 같지만…….”

“그건 모르는 일이에요, 루퍼트.”

“뭐, 하긴 그래. 모르는 일이야. 나와 같은 사람이 있었을 수도 있지. 하지만 결론은 아직도 우리 가문은 피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거야.”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클로에가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만약에…… 그 속박을 풀 수 있다면, 당신은 그렇게 할 생각인가요?”

조심스러운 그녀의 질문에 루퍼트는 뜬금없다는 듯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그런 방법이 있겠어? 있었다면 벌써…….”

“물론 쉽지 않겠지만요, 만약에요.”

“……만약에 그런 방법이 있다면.”

허탈한 웃음 속에서 찰나의 기대감이 스쳐 갔다.

“내 모든 걸 걸고서라도 풀려고 하겠지. 내가 황태자를 지지하든 그렇지 않든, 무조건적으로 머리를 조아리는 기분은 아주 별로거든.”

“……그렇군요.”

클로에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녀의 오렌지빛 눈동자 속에 짙은 어둠이 일렁거렸다.

“하지만 바람은 바람일 뿐, 나는 기대하지 않아.”

“간절히 바란다면 이루어질 거예요, 꼭…….”

클로에가 루퍼트에게 몸을 기댔다. 눈을 감는 그녀를 보며 루퍼트가 잠깐의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보다, 클로에.”

그녀의 귀밑머리를 다정하게 쓸어 넘기며 루퍼트는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했다.

“힘들면 너무 무리하지는 마.”

그러자 클로에가 마주 보며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동시에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그럴게요.”

에린이 루퍼트에게 애정을 갖고 있지 않다면야, 다른 방법을 쓰는 게 훨씬 빠르고 간편했다.

 ***

어느덧 밤이 찾아왔다.

“멜라톤 백작이 정말 공작을 살리고 싶어 한다면…….”

아까 엘리아나가 산책하던 후원을 서성거리며, 나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혹시나 후원에서 또 누군가를 마주칠까 한 바퀴를 돌아봤지만, 일단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연못에 물고기 밥을 던지며,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정리가 되기는커녕 마음이 점점 더 답답해졌다.

“……그럼 루퍼트는.”

나는 머리를 감싸쥐며 연못 앞에 주저앉았다. 내가 왜 여기까지 생각하지 못했을까?

공작이 지금 죽으면 가장 이득을 보는 사람은 루퍼트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아무런 잡음 없이 공작의 작위와 영지를 그대로 상속받을 수 있다.

‘하지만 루퍼트가 공작을 죽이려 한다는 낌새는 느끼지 못했는데. 속마음은 모르겠지만, 게다가 그에게선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걸. 아니 참, 냄새가 나는 쪽이 살리는 쪽이었지.’

한 번인가 저택 전체에 탄 냄새가 짙게 깔린 이후에는 특정한 상황과 사람에게서만 그 냄새가 났다.

‘클로에는 어느 쪽일까.’

분명 그녀에게서 냄새를 맡았고, 쓰러진 순간 웃는 것을 봤다. 누군가는 그것만으로 근거가 부족하다 할 수도 있겠으나, 내 감이 말하고 있었다.

클로에도 연관이 있다. 그것도 아주 깊이.

하지만 어느 쪽인지는 헷갈렸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루퍼트와 같이 공작이 죽는 쪽을 바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멜라톤과도 친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게다가 냄새도 났어.’

하지만 클로에가 설사 멜라톤과 한배를 탔다 해도, 그녀에게서까지 냄새가 나는 건 무슨 이유일까.

실제로 클로에가 공작의 방에 드나드는 건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었다.

일단 엘리아나와 한번 이야기라도 해 볼까. 아니야, 곧 떠날 건데 괜히 깊이 관여하지 말까.

이리저리 고민하던 차에, 갑자기 무언가가 날아와 그대로 등에 세게 부딪혔다.

“앗……!”

나는 연못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고, 그대로 물 속에 처박히기 일보 직전이었다. 팔을 파닥거리며 균형을 잡아 보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연못 수면에 코끝이 닿으려는 순간, 내 허리를 확 낚아채는 팔이 있었다. 묵직하고 잔잔한 향이 코끝에 스쳤다.

“백작.”

“아, 아. 전하? 여긴 어떻게.”

그의 팔 하나에 매달린 채 가쁜 숨을 고르면서도 그가 이곳에 온 경위에 대해 물었다.

그래도 사람 하나가 매달린 거라 꽤 무거웠을 텐데, 그는 아무렇지 않게 나를 들어 올려 땅을 딛게 만들었다.

그의 팔을 가볍게 잡은 채로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백작, 거기서 뭘 하고 계셨습니까. 방금 전은 정말 위험했습니다.”

“구해 주셔서 고마워요. 그런데 여기 누구 없었나요?”

에녹은 나를 연못에서 몇 걸음 더 뒤로 물리며 말했다.

“없었습니다, 일단은.”

“일단은? 뭔가 제 등에 부딪혔는데. 아, 그게 사람은 아니고…….”

그 상황을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몰라 허둥지둥했다.

그러자 에녹이 표정을 굳히며 갑자기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했다. 그의 손 안에서 작은 회오리가 몰아치더니, 점점 더 범위를 넓혀 태풍처럼 커져 나갔다.

신기한 건 분명 그렇게 눈에 보일 만큼 세게 몰아치는 바람에 내 옷깃 하나 휘날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게 몰아치던 바람에 갑자기 내 뒤편에 있던 커다란 나무 위에서 검은색 새 한 마리가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아! 새가!”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움찔 떨었고, 동시에 거센 바람도 잠잠해졌다. 에녹은 터벅터벅 걸어가 그 새의 날개 끝을 들어 올렸다.

“죽었나요? 그 새는 왜……?”

“죽진 않았습니다.”

그의 손에 붙들린 새는 몇 번인가 날갯짓을 하긴 했지만, 큰 움직임은 없었다. 다만 새의 눈이 빨갛게 보여서 조금은 섬뜩했다.

내가 손을 갖다 대려 하자 에녹이 경고하듯이 말했다.

“백작이 손을 대면 아마 죽을 겁니다.”

“……네?”

내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고, 그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보았다.

“하지만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겠죠.”

나는 조금 더 자세히 새를 관찰했다.

붉은 눈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것이 차츰 보였다. 힘없이 날개를 파르르 떠는 새의 모습은 가여웠다.

힘겹게 생명을 이어가는 것과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 어쩐지 공작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그리고 내가 번뜩 스치는 생각에 에녹과 눈을 마주치자 그는 두 손 위에 새를 올려놓고 나를 바라보았다.

“결정은 백작께서 하시면 됩니다.”

“손을 안 대면 어떻게 되나요?”

“몸에 한계가 올 때까지 이용당하겠죠.”

그의 말에 망설이던 나는 천천히 새의 몸을 쓰다듬었다.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한, 그 냄새가 났다.

그리고 새는 날개를 한 번 팔락거리다 이내 얌전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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