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나는 씁쓸한 웃음과 함께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정 말씀 못해 주신다니 할 수 없죠. 제가 괜히 와서 곤란하게 해드린 것 같네요.”
“……잠시만요.”
그대로 문을 나서려는데 그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어쩔 줄 몰라 하며 난감한 표정을 짓는 걸 보니 얼마 안 남은 것 같았다.
“괜찮아요. 제가 신뢰를 드리지 못한 것 같아 송구스럽습니다. 이제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비켜주세요, 전하.”
나는 냉랭한 표정을 유지하면서도 그에게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가 당황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아니요, 귀찮지 않습니다. 전혀요. 애초에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아시지 않습니까.”
“…….”
나는 대답 없이 살짝 고개를 돌린 채 사선으로 내리깔았다. 그러고 있으니 더욱 안절부절못하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괴로운 듯 미간 사이를 찌푸리며 말했다.
“나를 믿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고개를 들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전하께서는 저를 믿지 못하시고요.”
마치 정곡을 찔린 듯,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대답이 없었지만 그게 곧 대답이었다. 정말 못 믿는구나. 이건 좀 의외인걸.
“나에게 실망하셨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에녹의 눈썹이 축 늘어지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에 대한 내 판단과 태도를 전면적으로 수정했을지도 모른다.
그 당당하던 에녹이 꼬리를 늘어뜨린 강아지처럼 보인다니, 나도 참 나다.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썩 좋은 기분은 아니네요.”
그렇다고 해서 그냥 넘어가겠다는 뜻은 아니고.
내가 그를 믿는다고 말했던 건, 그가 내게 보여 준 호의와 능력을 믿는다는 뜻이고, 또한 앞으로도 가까이할 여지가 있다는 말이었다.
그가 나와 같은 신뢰를 보여 주는가는 판단 외의 일이었다.
“아무튼 우리가 지금 할 말은 없는 것 같은데, 그만 보내 주시지 않으시겠어요?”
냉랭하던 태도는 조금 누그러뜨렸고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까지 지어 주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에게는 벽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에녹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가는 게 그 증거였다.
에녹과 나의 사이를 망칠 정도로 중대한 비밀이라면, 나 역시 더 이상 캐묻진 않을 생각이다. 그에게 나름 선택권을 준 셈이다.
그대로 에녹을 지나쳐 가려는데 그가 다시 한번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아까보다 훨씬 자신 없는 몸짓이었다.
“……알겠습니다.”
에녹의 대답이 무엇에 대한 긍정인지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에녹은 문 앞에서 비켜서지 않았고, 나를 다시 소파로 안내했다.
“일부는 말씀 드리겠습니다.”
다는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그 선에서 이만 타협하기로 했다.
어차피 루퍼트와 이혼을 할 예정이었고, 그때가 되면 그도 나에게 완전한 신뢰를 보여 주겠지.
지금은 아마 자의 반 타의 반 상황에 모든 걸 들려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에녹은 손으로 자신의 앞머리를 쓸어 넘긴 후, 다시금 내게 앉기를 권했다. 나는 고개를 한 번 까딱이고는 앉았던 자리에 다시 앉았다.
머그컵을 들어 적당히 식어 빠진 민트 티를 다시 홀짝 들이켰다. 그런 나를 에녹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마주 보고 앉았다. 아직도 불안한지 흘긋흘긋 내 표정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말을 하면서도 그는 무엇이든 물어보라는 표정은 아니었다. 아마도 내가 묻는다 해도 답하지 못하는 것들도 많을 것이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다, 일단 나와 가장 관련이 깊은 문제부터 물어봤다. 뭐니 뭐니 해도 내 신상이 가장 중요하다. 공작의 문제도 궁금했지만 그건 차후 문제다.
“어제부터 났던 냄새는 저와 전하만 맡을 수 있는 것 같았어요. 왜 그런가요?”
“백작의 경우는 나도 확실히 모릅니다만, 나는 혈통 때문입니다.”
“혈통이요? 대마법사였던 초대 황제의 핏줄이기 때문이란 건가요?”
에녹이 고개를 한 번 끄덕거리며 말을 이어 갔다.
“지금은 거의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지만, 초대 황제께서 마왕을 쫓아내고 제국을 건설하실 때 외부 세계의 어떤 존재와 자신을 융합하셨다고 합니다.”
그의 설명에 머그잔을 들고 있던 내 손이 움찔 떨렸다. 다행히 에녹은 눈치채지 못했는지 계속해서 말했다.
“뭐, 자세한 원리는 모르지만, 그 때문에 역대 황제와 황태자들은 특별한 힘을 쓸 수 있고,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지요. 일단 내가 그 냄새를 감지할 수 있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내가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이유까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한 대답이 됐다. 내게 그런 어마어마한 능력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나 역시 에린의 몸을 빌린 외부의 존재였다.
혹 에녹도 여기까지 예상하진 않았을까 하여 눈을 마주 봤지만, 그는 특유의 담담하고 침착한 태도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좋아요, 그럼 냄새가 나는 이유는 뭔가요? 그 냄새와 공작님의 병세가 상관이 있나요?”
“…….”
이번에는 그가 뜸을 들였다. 답할 수 없는 질문인 건가?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니 그가 턱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병세와 관련은 있지만, 백작이 생각하는 방향과는 다를 겁니다, 아마도.”
생각하는 방향과 다르다.
나는 은연중에 그 냄새가 공작의 병세를 악화시키고 죽음으로 이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방향이 다르다고?
“백작께서는 어떻습니까. 고통스럽고 추악하지만 그 목숨을 이어 붙이는 쪽과 때가 됐을 때 깔끔하게 끝내는 쪽, 본인이 병자라면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물론 나는 공작의 의중은 모릅니다.”
***
마음이 복잡해졌다.
나는 에녹의 말을 듣고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서 생각하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더 물어볼 말은 많았지만, 지금은 잠시 유예하기로 했다.
그에게 굳이 묻지 않아도, 내 추론만으로 알 수 있는 일도 몇 가지 있었다.
그것들을 생각하고자 나는 홀로 있기를 택했다. 이번에는 에녹이 손수 문을 열어 주었고, 고맙게도 나가는 길에 내게 말해 주었다.
“궁금한 게 있다면 언제든지 찾아오세요.”
다 대답해 줄 것도 아니면서.
그래도 나는 기꺼이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대화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그리고 백작.”
끝날 줄 알았던 대화가 조금 더 이어졌다.
“곧 떠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물론 나도 이곳에 오래 머무를 생각은 없었다. 슬슬 떠나야겠는데 계기가 없었을 뿐이었다.
“마법석 광산의 일로 공고를 냈더니 구름 떼처럼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그 선별 작업도 어느 정도 마쳤고…….”
“아, 그럼 가야죠. 언제 갈까요?”
그런데 계기가 생겨 버렸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런 내 태도에 에녹이 오히려 놀란 듯 보였다.
“이틀 후에 떠나면 적당할 것 같습니다만, 백작. 정말 괜찮겠습니까?”
“안 될 이유가 있나요?”
나는 오히려 되물었고 그는 입을 다물었다. 물론 신경 쓰이는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이 성의 일은 이 집 사람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이틀 안에 뭔가가 해결되면 좋은 것이고,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아까의 대화를 정리는 해야겠기에 나는 일단 내 방으로 향했다.
루퍼트와 함께 쓰라고 내어 놓은 신혼방이었지만, 그냥 이 방은 내 방이었다. 첫날을 제외하고는 루퍼트는 한 번도 이 방에 나타난 적이 없었다.
그렇게 안심하고 문을 여는 순간, 나는 내 방에 들어와 있는 불청객을 발견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은 마주치고 싶지 않은데. 아니, 꼭 지금만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내가 먼저 나가려는데, 소파에 길게 누워 있던 루퍼트가 몸을 일으키며 내게 말을 건넸다.
“기다려.”
“그냥 누워 있어요, 내가 나갈 테니.”
그대로 돌아서 나가려는데 그가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올렸고, 손목을 잡으려던 그의 손이 목표를 잃고 허리춤에 부딪혔다.
“어차피 똑같은 이야기 아닌가요? 나는 그때 할 말을 다 한 것 같은데.”
“……화가 났다는 건 알아, 이해해. 솔직히 몰랐는데, 겪어 보니 알겠더군.”
클로에가 멜라톤과 뒹굴었다는 걸 루퍼트가 알아챈 걸까? 나는 호기심에 잠시 뒤를 돌아보았고, 루퍼트는 괴로운 표정으로 전혀 다른 답을 내어놓았다.
“당분간 클로에와 멀리한다면, 그럼 만족하겠어?”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당신이 왜요?”
“당신 말을 듣고 생각해 봤어.”
그가 성큼 다가와 채 닫히지 않은 문을 닫아 버렸다. 나는 퇴로가 막힌 게 신경 쓰였지만, 어차피 여기서 그와 술래잡기를 할 것도 아니니 내버려 두었다.
“그래, 질투. 질투라는 건 괴로운 감정이더군. 당신이 그렇게 내게 마음을 닫아 버린 것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
슬슬 불안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또 무슨 헛소리를 할 것인가. 하지만 이 헛소리를 듣지 않아도 될 날도 머지 않았다.
에녹은 이틀 후라고 했다. 물론 정상적인 절차를 밟는다면 내 손에 돈이 들어오는 건 훨씬 후의 일이겠지만, 나는 가자마자 다른 방법을 써서 시간을 앞당길 생각이었다.
내가 루퍼트를 바라보며 머릿속에서 열심히 주판을 굴리는 동안, 그는 여전히 내 앞에서 괴로운 마음을 토로하고 있었다.
“당신이 황태자와 함께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불쾌하고 짜증이 치솟아. 이걸 경험시켜 주려 한 거잖아. 나도 느껴 보라고, 안 그래?”
나는 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고 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쯤 해서 한마디 정도는 대꾸해 줘야 할 것 같았다. 물론 그것은 루퍼트의 말 중에 가장 치명적인 오류를 정정해 주는 일이었다.
물론 말한다고 해서 알아들을지는 미지수였다. 이런 말을 하는 게 분명 처음은 아니었으니까.
“루퍼트, 나는 당신이 클로에와 함께 있어도 괴롭지 않아요.”
분명 처음이 아니었는데, 그는 마치 그런 말을 처음 듣는 사람처럼 서서히 얼굴을 굳혀 갔다.
“당신을 전혀 좋아하지도, 사랑하지도 않기 때문이죠. 새삼스럽네요. 전에도 말했던 것 같은데.”
그 말을 하며 안타까운 듯 미소지어 주었다. 그것은 일종의 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