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하지만 직접 방에 들이시는 건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잠시 에녹의 등을 보고 있던 테리언 자작은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충언을 했다. 그의 목소리는 누가 들을세라 아까보다도 훨씬 낮게 깔려 있었다.
테리언 자작의 시선이 동쪽 별궁을 슬쩍 향했다. 에녹은 어깨를 으쓱하며 창문에서 떨어져 테리언 자작을 응시했다.
“내가 들인 게 아냐. 어젯밤 그 여자가 몰래 들어온 거지.”
변명 같지도 않은 변명에 테리언 자작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 그 오류를 지적했다.
“아시면서 내버려 둔 것 아닙니까. 덕분에 향에 당하셨고요.”
에녹 정도 되는 실력자가 그런 질 낮은 흑마법사가 몰래 들어오는 걸 감지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 실력을 너무 믿은 탓에 살짝 위험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 귀찮은 걸 두르고 올 줄 몰랐어. 아마 계획대로 되지 않으니까 쓴 모양인데, 백작이 깨우러 오지 않았다면 간만에 늦잠을 잤겠지. 나도 나중에서야 감지했는데, 백작은 훨씬 예민한 모양이야.”
이 와중에도 에녹은 스필렛 백작에 대한 감탄을 늘어놓았다. 그 감탄은 순수한 감탄이라기보다 마치 자신의 사람을 자랑하는 것으로 들리기도 했다.
이러니 테리언 자작은 황태자가 백작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마녀가 뭐라고 하던가요?”
테리언은 돌려 말하지도 않았다. 정확히 누군가를 지칭하는 단어로 그녀를 언급했다.
에녹은 눈썹을 까딱하면서도 그의 물음에 답을 해 줬다.
“손을 잡자더군.”
“무슨?”
“적의 적은 동지라나, 루퍼트를 자신이 갖게 해 달라고 내게 말하더군. 그럼 나도 홀로 된 백작을 차지할 수 있으니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고.”
테리언 자작은 웃음을 흘릴 뻔했다.
“마녀치고는 꽤나 순진하군요.”
“그래, 그러니 누구 말만 듣고 순진하게 흑마법을 펑펑 써 대고 있는 거겠지.”
에녹은 입꼬리를 슬쩍 올리면서 안타까운 듯 읊조렸다. 하지만 말투와 달리 그의 눈빛에서는 일말의 동정심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흑마법에 손을 댔다는 것부터가 이미 탐욕의 증거였다. 순진한 건 별개의 문제다.
“당연히 거절하셨겠지요.”
“흥미는 가지만 더러운 것과 손잡을 만큼 궁하진 않다고 했다.”
“그 와중에 꽤나 솔직하셨군요.”
에녹은 발로 카펫 위를 짓이기며 툭툭 발로 차 냈다. 그의 발밑에는 무언가 타다 남은 잿가루 같은 것이 묻어나왔다.
“어젯밤 그 여자가 하는 짓을 스필렛 백작이 보고 말았거든. 백작의 눈을 더럽혔다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진솔해졌어.”
테리언 자작은 문득문득 그의 말에 뭔가 짜증이 치솟았지만, 그냥 포기하고 이런 대화에 익숙해지기로 했다.
“그래서 앞으로 어쩌실 요량입니까.”
“……공작의 수명은 이미 다하였네. 그녀는 의외로 공작의 목숨을 노리는 게 아냐. 연출을 도와줄 뿐이지. 백작만 위험해지지 않는다면야…….”
“루퍼트 소공작이 그대로 공작이 돼도 괜찮겠습니까?”
에녹이 얼굴에서 여유 있는 웃음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뒤돌아 다시 창문 밖을 보았다.
창문 밖 본성의 꼭대기에는 클리포드 공작가의 깃발이 펄럭거렸다. 붉은 바탕에 흰색 방패가 그려진 그 상징의 의미는 제국의 수호자.
그 옛날 클리포드 가문은 초대 황제 리케포로스 대마법사에게 대대로 충성할 것을 다짐하며, 스스로 피의 속박을 걸었다.
그 붉은 깃발을 바라보던 에녹이 짧게 답했다.
“일단은.”
본인이 싫든 좋든, 속박을 풀지 않는 한 클리포드 가문은 대대손손 그들에게 충성할 것이다.
***
다음 날 오전, 나는 공작의 방에 들른 후 느리게 복도를 걸어가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오늘 아침 공작은 어제보다 훨씬 좋아져 있었다. 이렇게 건강이 오락가락하다니, 참 모를 일이다. 에녹이 하루만 지켜보자고 했던 게 그런 의미였을까? 덕분에 신관은 부르지 않기로 했다.
치료 능력이 있는 신관은 소수였고, 그들은 전 대륙을 오가며 신성 능력을 펼치기 때문에 아주 바빴다. 때문에 황실이라 해도 정말 급한 일이 아니라면 부르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나는 공작의 병세가 하루마다 달라지는 게, 단순히 노화나 질병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 심란했다.
“……이상해.”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건 소설 속에 나오는 단편적인 정보일 뿐이었다. 돌아가는 상황이 매우 이상하다 느끼면서도 좀처럼 실마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나만 느낄 수 있는 냄새, 이게 공작의 병세와 관계가 있을까? 하지만 꺼림칙한 느낌만으로 판단하기에는 내가 너무 이에 관한 지식이 없었다.
“역시 한 번 더 물어보자.”
이번에도 알려 주지 않을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 유일하게 이번 일에 관해 아는 사람이 에녹 한 사람뿐이었으니 말이다.
결심이 서자 걸음이 빨라졌다.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다 찻잔 두 개를 쟁반에 받쳐 올라가는 하녀와 마주쳤다.
찻잔에는 짙은 색의 액체가 찰랑찰랑 들어 있었다.
왜 그랬을까. 순간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내게 꾸벅 인사하는 그 하녀를 지나치는 순간, 나는 일부러 그녀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앗!”
쨍그랑-!
쟁반이 흔들리면서 위에 있던 찻잔 두 개가 바닥으로 떨어져 와장창 깨져 버렸다. 그에 당황하던 하녀가 순간 원망의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다시 하녀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네 이름이 뭐지?”
“……레닌이라고 합니다, 마님.”
방금 전 불손했던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녀는 두 손을 한데 모아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또 그 냄새가 났다. 냄새가 레닌이라는 하녀에게서 나는 건지, 쏟아진 차에서 나는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이 차는 어디서 가져오는 건가.”
“주방에서…… 가져오는 길입니다. 공작님의 병세에 도움이 된다 하여 찻잎과 약초를 섞어 우려낸 차입니다.”
한마디로 귀한 것을 나 때문에 엎었다는 소리였다. 나는 표정 변화 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랬구나, 하지만 의사 처방이 없는 것을 함부로 내어 가지 말거라.”
“이것은 엘리아나 님께서 지시하신 일입니다.”
나는 미간은 살짝 찌푸리며 좀 더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엘리아나와 나 중 누가 이 집안의 어른이라 생각하는 거지?”
“……그건, 마님이십니다.”
조금 발끈하던 레닌은 다시 고개를 조아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올라가 보거라. 엘리아나에게도 내 의사를 전달하고.”
“예, 마님.”
레닌은 다시 한 번 머리를 깊게 숙이고는 바닥에 흩어진 조각들을 치우려 했다.
“놔둬, 이건 내가 사람을 불러 치우도록 하마.”
“예.”
그녀는 내 말에 허리를 펴고 꾸벅 인사하고는 그 길로 다시 올라갔다.
그녀가 완전히 올라가 복도 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본 후, 나는 허리를 숙여 젖은 바닥을 손가락으로 살짝 찍은 후에 코에 갖다 댔다.
씁쓸한 약초의 냄새는 났지만, 그 탄 냄새는 나지 않았다.
“내가 예민하게 굴었나.”
손을 털며 일어나 공기 중의 냄새를 맡아 봤지만, 아까도 워낙 미세하게 났던 거라 그런지 맡을 수가 없었다. 사라진 건 레닌뿐이었다. 그럼 레닌에게서 났던 걸까?
나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다시 빠른 걸음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황태자가 머무는 방 앞에서 망설임 없이 문을 두드렸다.
쿵쿵쿵-
“무슨 일…….”
에녹이 즉시 방문을 열었다. 그의 눈은 놀란 것처럼 커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조금 머쓱해졌다. 너무 세게 두드렸나?
“……백작,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니, 일이라기보단.”
“일단 안으로.”
그가 문을 활짝 열고 한쪽으로 비켜섰다. 나는 새침한 표정을 애써 유지하며 사뿐사뿐 방 안으로 들어섰다.
어제 났던 냄새는 말끔하게 지워져 있었다.
“앉으세요, 오신 김에 차 한잔 드시겠습니까.”
그는 손수 찻주전자 안에 찻잎을 넣으며 내게 말했다. 자세히 보니 그 찻잎은 이곳에서 보던 게 아니었다.
“찻잎을 황궁에서 가져오셨나 봐요.”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맞습니다.”
“향도 미세하게 다르고…….”
에녹이 머그잔에 찻물을 부으며 곁눈질로 흘끔 나를 보았다.
“차는 누군가를 속이기 딱 좋은 품목이죠. 다른 건 몰라도 어딜 가든 찻잎은 따로 준비하는 편입니다.”
그는 마치 조금 전 내가 겪은 일을 아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우연이겠지?
어쨌거나 그 내용은 이해가 갔다. 에녹은 황태자였고, 전에 보니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이 많아 보였다. 자연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마워요.”
그가 건네준 머그잔을 받아들었다. 알싸한 민트 향이 복잡했던 머릿속을 맑게 씻어 주었다.
그는 맞은편에 앉아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할지 예상하고 있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조급함이 없었다. 오히려 급한 건 내 쪽이었다.
나는 잠시 차를 마시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뭐라고 말을 꺼낼까. 돌려 말하는 건 역시 내 성격과 맞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알려 주실 건가요?”
목적은 분명하게, 하지만 끝은 흐리지 않고 당당하게 물었다.
“때가 되면, 이라 말씀 드렸을 텐데요.”
에녹의 얇은 입술 끝이 희미하게 말려 올라갔다. 눈가도 호선을 그렸다.
특유의 부드러운 웃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완강했다. 하지만 나도 이번에는 쉽게 물러서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건 너무 늦어요. 지금 알고 싶으니까요.”
“…….”
그도 분명 입이 근질근질한 것처럼 보이는데,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럼 단순히 말로 설득하는 건 소용없겠고. 여기까지 와서 아무 소득도 없이 돌아갈 순 없는 일이다.
나는 웃던 표정을 싹 지우며 냉정한 말투를 만들어 냈다.
“안 되나 보군요……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전하.”
나는 머그잔을 탁자 위에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부러 그와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백작?”
그리고 예상대로 에녹은 나를 따라 다급하게 일어났다. 그 여유 있던 표정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