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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54)화 (54/129)

54화

일단 나는 엘리아나를 따라 급히 클리포드 공작의 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나는 그녀를 따라가면서 점차 확연해지는 느낌에 의문이 들었다.

‘……아까 그 냄새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아침에도 느꼈고, 조금 전 쓰러진 클로에에게서도 느꼈던 그 냄새였다. 뒤늦게 리차드도 내 뒤로 뛰어오고 있었다.

“마님!”

그가 오는 것을 보고 잠시 걸음을 멈췄다.

“리차드. 조사해 봤나요?”

“아, 예. 일단 성 안팎으로는 뭔가 태운 흔적 같은 건 없었습니다. 마님, 그런데 정말 타는 냄새가 나십니까? 여기저기 물어봤지만 저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그런 냄새는 느끼지 못했습니다.”

“…….”

리차드는 조심스러운 표정이었다. 내가 착각한 게 아니냐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을 뿐, 내 말을 믿는 것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조사도 다만 윗사람인 내 의견을 존중해서 이루어진 일일 것이다.

나는 혹시나 해서 엘리아나의 얼굴도 바라보았다. 그녀도 역시 무슨 말인지 모르는 듯했다.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게 일일이 설명해 봐야 어차피 소용없는 일. 나는 그를 설득하는 것을 관두고 다시 공작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막 문을 열려는데, 복도 저편에서 에녹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도 소식을 듣고 이제 막 오던 참인 것 같았다.

“전하.”

“들어갑시다.”

에녹은 나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엘리아나는 누워 있는 공작에게 달려가 눈물을 뚝뚝 떨궜다.

“……공작님.”

나 역시 다가서서 누워 있는 그를 보았다.

검푸르게 변한 얼굴이 한눈에 봐도 생명이 꺼져가는 모습이었다.

아침에 멀쩡하던 모습이 아직도 선한데, 어떻게 단시간에 이렇게 안 좋아진 거지.

나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역시나 짙은 탄내가 방 안에 가득했다. 정말 이걸 아무도 느끼지 못한다고?

무심코 옆에 서 있던 에녹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눈빛으로 에녹에게 이 냄새에 대해 물었지만 그는 곤란한 표정과 함께 슬쩍 눈길을 피해 버렸다.

나는 냄새에 대해 더 묻는 대신에 다른 이야기를 했다.

“……전하, 부탁드릴 게 한 가지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신관을 불러 주셨으면 해요.”

어제 그가 직접 불러 주겠다 말한 적이 있으니 거절하진 않을 것이다. 예상대로 에녹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하루만 더 지켜보기로 하지요.”

“그동안 괜찮을까요?”

내가 불안한 눈빛으로 에녹을 바라보자, 그가 방을 한 번 크게 훑어보며 대답했다.

“아마도요. 이 방에 좀 더 머물다 나오세요. 그쪽은 잠시 날 따라오고.”

에녹은 엘리아나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마님, 공작님을 잘 좀 살펴 주세요.”

갑자기 지목받았지만 엘리아나는 하늘같이 높으신 황태자의 명령에 순순히 대답했다.

그녀는 이미 신관을 불러 주겠다는 에녹의 말에 감격한 것 같아 보였다. 에녹은 잠시 날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눈짓으로 인사한 후, 엘리아나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왜 엘리아나를 데리고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돌아오면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아픈 공작과 단둘이 남겨진 나는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 문득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방 안 가득 퍼져 있는 이 탁한 공기를 내보내는 것이다.

나는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시원한 공기가 방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후, 이제 좀 살 것 같네.”

아무래도 이 방은 환자가 있어 보온을 위해 오랫동안 창문을 열지 않은 것 같았다.

그 후에 나는 천천히 공작이 누워 있는 침대 곁으로 다가섰다. 짙푸른 안색이 미묘하게 아까보다 옅어져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환기를 시킨 게 안색과 관계가 있을까?

하지만 아직도 상태가 좋지 않은지,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협탁 위에 놓인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주었다.

루퍼트의 아버지, 클리포드 공작.

사실 곧 루퍼트와 이혼할 내가 이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상태 변화는 아무래도 자연적인 게 아니라는 예감이 들었다.

“아무리 바보라도 그 정도는…….”

그리고 아까 보았던 클로에의 웃음. 아주 미세해서 잘못 봤을 가능성도 있다. 그녀는 의식을 잃은 상태였으니까.

에녹은 어느 정도 이 상황의 진상을 알고 있는 듯했다. 문제는 대개의 상황에서 호의적인 그가 이것과 관련해서는 실마리조차 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조금 침울해졌다.

“……이걸 서운하다고 해야 하나.”

머리로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마음까지 납득이 가는 건 아니었다.

방 안의 공기가 꽤 바뀌었다 생각했을 즈음에 나는 다시 일어나 창문을 닫았다.

공작의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다 덮어 주는데 그가 서서히 눈을 떴다.

“공작님? 정신이 드세요?”

그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도 정신이 든 걸 보니 아까보단 안심이 됐다. 그리고 때마침 에녹을 따라갔던 엘리아나가 돌아왔다.

“아, 깨어나셨어요.”

“아! 공작님!”

엘리아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다급히 다가와 공작을 바라보았다.

“다행이에요, 정말…… 아까는 얼마나 놀랐던지.”

눈을 뜬 공작을 보자마자 그녀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저런 걸 보면 엘리아나는 공작에게 진심이다. 그들의 나이 차를 볼 때 이성적인 마음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공경하는 마음은 분명 있는 듯했다.

“전하가 무슨 일로 보자고 하셨어요?”

“……어음, 그게 좀…….”

이야기 꺼내기를 머뭇거리는 걸 보면 무슨 비밀 지령이라도 받은 걸까?

“엘리아나, 당신은 클리포드 가문 소속이에요. 물론 황태자 전하는…….”

“아, 아니에요. 그게 좀 애매해서.”

엘리아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고는 황급히 손을 저어 가며 부정했다.

“그냥 요새 혹시 피곤하냐고 물으셔서, 괜찮다고 말씀 드렸더니 응접실로 데려가셔 차 한 잔 마시고 돌아가라 하셨어요.”

“……차요?”

“네, 차 마시면서 무슨 말씀이라도 하시려나 했는데 정말 저 혼자 차를 마시라고…….”

“다른 말씀은 없었고요?”

“환자를 잘 돌보려면 적절히 쉬어야 한다고 말씀하시긴 했어요.”

맞는 말이긴 하지만 너무 뜬금없었다. 단순히 엘리아나를 쉬게 하려고 그런 거라고? 세심한 면은 있긴 하지만, 에녹이 거기까지 신경 쓸 여력은 없어 보이는데.

의문이 들긴 했지만 엘리아나도 딱히 모르는 눈치였다. 나는 그녀에게 공작님을 잘 돌봐 달라는 말과 함께 종종 방을 환기시켜 줄 것을 당부하고는 방에서 나왔다.

***

에녹은 엘리아나를 응접실에 덩그러니 둔 후에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1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가기 위해 계단을 따라 내려가다 보니 루퍼트가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루퍼트도 에녹을 봤는지 잠시 멈칫하더니 짧게 묵례를 했다.

“아버지를 뵙고 오는 길이십니까.”

“그렇네, 확실히 저번에 봤을 때보다는 안 좋아 보이더군. 내일 상태를 봐서 신관을 부를 생각이네.”

“…….”

“별로 내키지 않는 눈치인데.”

루퍼트의 굳은 표정에 에녹이 떠보듯이 물어보았다.

“아닙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에 루퍼트가 즉각 인사치레를 했다. 에녹은 고개만 까딱하고는 그를 스쳐 지나가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정말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계단을 오르던 루퍼트가 걸음을 멈칫하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에녹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우아한 걸음으로 마저 계단을 내려갈 뿐이었다.

그가 자신의 방에 도착했을 때, 방 안은 미세한 빛만이 존재하여 아직 어두웠다. 탁한 냄새는 이미 씻은 듯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방 안에는 이미 누군가가 있었다.

그는 에녹을 보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채 깊게 절했다. 에녹은 그를 한 번 쓱 쳐다보고는 일인용 소파 위에 걸터앉았다.

“말해 봐.”

에녹의 말에 무릎 꿇고 있던 테리언 자작이 일어나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너무 쉽습니다. 발원지는 저쪽입니다.”

테리언 자작은 손가락을 별궁 쪽을 가리켰다. 에녹은 별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냥 두실 겁니까?”

“딱히 별일은 없잖아, 귀여운 수준이지. 그리고 아직까지는 쓸모가 있다.”

테리언 자작은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 듯한 눈길로 에녹을 보면서도 그것에 굳이 반박하진 않았다. 대신 다른 이야기를 했다.

“그분께 아직 말씀을 않으시는 건…… 믿지 못해서입니까?”

‘그분’이란 말에 여유 있던 에녹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는 편안히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창가로 향했다.

창가에는 아직 두꺼운 커튼이 쳐져 있었다.

“내가 누굴 믿는 거 봤나?”

밖이 보일 리도 없는데 에녹은 창문 밖을 보는 것처럼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심란한 표정을 숨기기 위함인 것 같았다.

그는 몇 번인가 깊게 숨을 내쉬다 곧 뒤로 고개를 돌렸다.

“너라면 믿을 수 있겠나. 그렇게 오래 지켜봤는데.”

“하지만…… 마음이 있으신 거 아니었습니까?”

“호감과 신뢰는 다른 법이니까.”

에녹이 한쪽 커튼을 활짝 열어젖히고 창문 밖을 비스듬히 올려다봤다. 그 시선 끝에는 에린의 방이 있었다.

냉정한 말과 달리 에녹의 눈가와 입매는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 테리언 자작은 그를 지적하려다 그만두었다.

어차피 저러다가도 스필렛 백작 앞에서는 신뢰고 나발이고 언제 그랬냐는 듯 흐물흐물 녹아내릴 게 뻔했다.

잠시 조용히 있던 에녹이 눈을 빛냈다.

“시간을 좀 당길 필요는 있겠어.”

어차피 당분간은 에린과 함께할 기회가 많이 남아 있다. 차근차근 자신에게로 당겨 오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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