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53)화 (53/129)

53화

성묘가 끝난 이후에는 무덤가 근처에 있는 작은 예배당으로 갔다. 예배당 안에는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테르사 여신의 조각상이 있었다.

“……이곳에 잠든 모든 영령의 안식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 앞으로 가서 영령들의 안식을 비는 짧은 기도문을 외웠다.

형식적인 절차라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이 몸의 주인이었던 에린을 생각하며 기도했다. 그녀의 죽음은 나밖에 모른다. 때문에 나라도 애도의 마음을 잠시나마 표현하고 싶었다.

일단은 그녀인 척 연기하고 있지만, 나는 에린과 다른 존재라는 것도 다시금 되새겼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정해졌던 에린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기도를 마치고 고개를 들자, 여신의 조각상 너머에 있는 창문에서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순간 눈이 부셔 눈살을 찌푸리다, 나는 여신의 조각상과 눈이 마주쳤다.

물론 눈이 마주쳤다, 라는 건 순전히 내 생각이다. 조각상은 눈동자까지 표현되어 있지는 않았다. 그저 그런 기분이 들었다는 것일 뿐.

“마님, 저쪽에서 쉬었다 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정오가 지나고 해가 잘 드는 오후 시간, 리차드는 바로 성으로 돌아가기보다는 공원으로 가기를 권했다.

자연스럽게 권하는 걸 보니 이곳의 문화가 참배를 마친 후에, 저곳에서 잠시 머물렀다 가는 모양이다.

“그래요.”

어차피 지금 성에 가 봐야 머리만 아플 뿐, 나는 에녹과 대화도 나눌 겸 잠시 들렀다 가기로 했다.

리차드가 먼 곳에서 보초를 서고, 에녹과 나는 묘지 옆에 있는 공원 큰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펴고 앉았다.

우리는 제니가 미리 싸 온 샌드위치와 과일 등을 꺼내 놓고 간단히 요기를 했다. 에녹은 아까부터 내 앞접시에 음식을 갖다 놓으며 먹기를 권했다.

“저 배불러요.”

“이것까지만 드십시오.”

에녹은 사과주스를 컵에 가득 따라 건네 주었다. 그것을 받아들고는 흘끔 그를 쳐다보았다. 어서 마시라는 듯 그가 턱짓을 했고,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홀짝 반만 마시고는 내려놓았다.

봐달라는 듯 바라보자 그가 픽 웃으며 컵에 남은 주스를 자신의 입안에 털어 넣었다.

“아침 식사 안 하셨지 않습니까.”

“아침에 입맛이 없더라고요. 냄새도 나고…….”

그러다 나는 그 냄새가 문득 다시 생각나, 그에게 물었다.

“전하도 그 냄새 맡으셨죠? 뭔가 태운 것 같은 냄새…… 혹시 방에서 뭐 태우셨어요? 담배를 피우신다던가.”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그는 즉시 부정하고는 자신의 턱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잠시 먼 곳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그런데 리차드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다고 해요. 감기에 걸린 것 같지도 않은데.”

“…….”

“뭔가 아시는 거죠? 전하.”

그는 역시 빙긋 웃기만 할 뿐 아무 대답도 해 주지 않았다. 그저 냄새일 뿐이니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에녹의 반응을 보니 별거였나 보다.

내 가느다란 눈초리에 에녹은 난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때가 되면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 때가 어느 때를 말씀하시는 거죠?”

“길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그의 선선하고도 아리송한 대답에서 결국 나는 답을 찾아냈다. 조금은 씁쓸했지만, 곧 이해가 갔다.

그 때는 아마 이혼한 이후인 것 같았다.

우리는 그 외에 약간의 시시콜콜한 잡담을 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녹이 나를 먼저 마차에 태워 주고는 뒤이어 올라타기 직전, 줄곧 묵묵히 있던 리차드가 웬일로 그에게 말을 건넸다.

“전하, 저희 도련님께서 혹 충성 맹세를 하셨습니까.”

나는 책으로나 봤던 ‘충성 맹세’에 관해 떠올려보았다. 그것은 기사가 그만의 주군에게 바치는 서약의 일종이었다. 제국에 충성하기 이전에 자신만의 주군에게 먼저 충성하겠다는 의미였다.

“아니, 아직. 루퍼트가 공작이 되면 하지 않겠나.”

리차드는 미심쩍은 얼굴로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그렇겠지요. 하지만 선후 관계가 잘못된 일입니다.”

에녹은 그 말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리차드의 어깨를 툭 한번 두드리고는 마차에 올라탔다.

나는 리차드의 말을 듣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역대 클리포드 공작들은 공작이 되기도 전에 황태자에게 충성 맹세를 하는 모양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자연스럽게 추측하게 되었다.

클리포드 공작이 루퍼트에게 아직도 작위 계승에 관한 유언을 하지 않은 건, 어쩌면 단순히 그가 서자이기 때문만은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루퍼트가 황태자를 대하는 평소 태도를 생각해 보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그는 그럼 어쩌려고 그러는 거지?

나는 문득 에녹의 얼굴을 쳐다봤다. 에녹은 루퍼트를 믿는 걸까, 아니면 알면서 묻어 두고 있는 걸까.

눈이 마주친 에녹이 싱긋 웃어 보였다. 아마도 이것 역시 대답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것 자체가 어쩌면 대답이 될 지도 모르겠다.

‘황태자는 루퍼트를 의심하고 있어.’

***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건 다정하게 정원을 거닐고 있는 루퍼트와 클로에였다.

클로에는 루퍼트의 팔에 찰싹 달라붙은 채 애교 섞인 목소리로 뭔가를 얘기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칭얼거리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루퍼트는 그녀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감싸 다독거렸다. 순전히 내 추측으로는 지난밤 외출한 것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역시 클로에는 루퍼트를 포기하지 않을 모양이다.

“백작, 내리시죠.”

나는 에녹의 손을 잡고 내렸고, 그 모습을 루퍼트가 봤다. 루퍼트는 클로에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손을 거두고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에녹은 무심한 눈길로 그를 보며 그가 묻기도 전에 말해 주었다.

“영지에 있는 가묘에 다녀오는 길일세.”

“전하께서도 함께 다녀오셨습니까.”

“성에만 있기 적적하여.”

에녹이 빙긋 웃음 지으며 루퍼트의 곁으로 다가오는 클로에를 바라보았다. 클로에는 아까의 대화를 모두 지운 듯 말끔한 얼굴로, 나와 에녹에게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잘 다녀오셨나요. 기별을 주셨다면 저도 함께 모시고 다녀왔을 텐데, 미처 알지 못했네요. 죄송합니다.”

“저런…… 죄송할 거 없어요, 앤드론 영애. 가묘는 클리포드 공작가의 가신 분들을 모신 곳이에요. 가문과 관계 있는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죠. 리차드 경도 혼자는 못 들어가시는걸요.”

어디서 정부 따위가 가묘에 들어가려 하느냐, 라는 것을 비꼰 말이었다. 말과 함께 클리포드 가의 증표를 보여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건 리차드를 처음 만났을 때 그를 통해 공작에게 받은 것이었다.

“아, 당연히 황태자 전하는 예외시고요.”

살포시 웃는 얼굴로 에녹에게 까딱 고개를 숙였고, 그 역시 눈을 마주치며 웃어 주었다. 루퍼트와 클로에의 얼굴이 동시에 보기 좋게 굳어 있었다.

“나는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백작. 들어가서 쉬어요.”

“네, 전하. 동행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리를 떠나는 그에게 정중히 인사하고는 다시 빳빳하게 서서 남은 둘을 보았다.

여전히 루퍼트는 질투 어린 표정을 숨기지 않고 있었고, 클로에는 금방 표정을 수습하며 다시 미소 지었다. 이 여자도 정말 대단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클로에를 그렇게 싫어하진 않았었는데, 먼저 슬쩍슬쩍 건드려 오니 미움이 쌓였나 보다. 나는 순간 그녀의 웃는 표정을 지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나는 루퍼트를 바라보며 한숨 쉬듯이 말했다.

“피곤하네요, 그만 들어가서 쉬어야겠어요. 당신, 같이 가시겠어요?”

“……아, 피곤해? 하긴 그럴 만도 하지, 들어가자.”

루퍼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 대화가 우리 사이에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듯, 그는 내가 먼저 제안을 했다는 것에 그저 기뻐 보였다.

나는 루퍼트가 이렇게 나올 걸 알고 있었다. 그는 클로에를 좋아하면서도 배려하지 않는다. 그건 반대로도 마찬가지였고.

본인은 그렇게 질투가 많으면서, 어떻게 클로에가 괜찮을 거라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한심하긴 했지만,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다. 나는 루퍼트가 내민 손 위에 아주 살짝 손을 올렸다.

어차피 목적은 하나였으니까. 한편으로는 에녹이 먼저 들어간 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루퍼트가 오해하든 말든 지금만큼은 상관없었다.

“그럼 영애, 나중에 봐요.”

나는 뒤돌아 인사하며 클로에의 얼굴을 봤다. 클로에는 낯빛이 하얗게 질린 채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표정은 그럭저럭 마음에 들지만, 어디가 아픈가?

생각하기가 무섭게 그녀는 곧장 쓰러져 버렸다.

루퍼트는 바로 내 손을 놓고 클로에에게 달려갔다.

“클로에, 정신차려 봐. 클로에!”

이번에는 나도 놀랐다. 연기가 아니고, 방금은 정말 그녀가 아파 보였기 때문이다.

루퍼트를 따라 클로에에게 다가갔을 때, 나는 그녀에게서 희미한 냄새를 맡았다. 그것은 아침부터 이 성안에 퍼져 있던 타는 냄새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그녀가 뭔가를 태운 걸까?

짧게 추측하는 사이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엘리아나가 숨이 차도록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뭔가 좋지 않은 것을 예감했다.

“공작님이, 하아, 공작님의 상태가 위독해요!”

갑자기?

아침까지만 해도 비교적 멀쩡해 보이던 공작의 상태가 이렇게 갑자기 위급해질 수 있는 걸까?

나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려 쓰러진 클로에와 그녀를 안고 있는 루퍼트를 바라보았다. 루퍼트는 놀란 듯한 표정으로 엘리아나에게 다그쳐 물었다.

“언제부터 위독하셨지? 지금 상태는?”

“그, 그러니까 두어 시간 전부터…….”

루퍼트와 엘리아나를 보고 있는 사이, 나는 보고 말았다. 클로에의 파리한 입술 끝이 미세하게 올라가는 것을. 그리고 동시에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루퍼트가 클로에를 번쩍 안아들었다.

“방에 데려다주고 나올게.”

루퍼트의 걸음마다 축 늘어져서 흔들리는 그녀의 팔을 보면서, 나는 아까 본 것이 착각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팔에 돋은 소름을 잠재우기 위해 손으로 슥슥 문질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