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노크를 했다. 하지만 방 안에서는 아무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자나? 잔다고? 늦잠 잘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는데.’
그냥 두고 가 버릴까 보다. 나는 한 번 더 세게 문을 두드렸다.
쾅쾅쾅-
“전하! 깨어나셨어요? 안 나오시면 그냥 두고 갈 거예요!”
그런데 문을 두드리다 보니 이곳 근처에서 아까 맡은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조금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문고리를 돌렸지만, 안에서 잠겼는지 열리지 않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여전히 적막함에 휩싸인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전하, 들어갈게요!”
나는 그대로 문을 발로 차 버릴 생각에, 치맛자락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다리를 올려 차 버리려는 순간, 갑자기 문이 열렸다.
“앗……!”
그 바람에 몸이 앞으로 기울었고, 에녹이 넘어질 뻔한 나를 잡아 주었다. 하지만 민망함을 느낄 새도 없이 나는 짙게 나는 탄 냄새에 눈살을 찌푸렸다.
“전하, 여지껏 주무신 거예요?”
나는 그의 모양새를 살피다 조금 얼굴을 붉혔다. 누가 봐도 이제 막 일어난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미남은 미남이었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와 대충 걸쳐 입은 잠옷 사이로 단단한 근육이 보였다.
자꾸 그곳으로 눈길이 가려는 걸 참아내며 그의 눈을 봤다.
아직 잠이 덜 깬 건가? 조금 탁한 눈동자가 몇 번인가 깜빡이더니 또렷하게 돌아왔다. 아직 그가 내 팔을 잡고 있었다.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쉬고 계시겠어요? 저 혼자 다녀와도 돼요.”
“아니요, 아뇨.”
그는 다급하게 대답하며 살짝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에녹에게도 내가 맡고 있는 냄새가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곧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한 냄새가 나는 거 같죠? 저만 느끼는 거 아니죠? 특히 이 방에서 유독…….”
“깨워 줘서 고맙습니다, 이제…… 괜찮을 것 같군요. 준비하고 나가겠습니다, 백작.”
그는 곤란한 듯 웃으며, 피부 결을 따라 손바닥을 스치듯이 내 팔을 내려놓았다.
“아, 그래요. 그런데 환기 좀 시키시는 게 좋겠어요. 어디서 뭘 태우는 건지…….”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에녹은 내가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나를 문밖으로 밀어내더니 문을 닫아 버렸다.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 주는 게 싫은 걸까?
아무튼 나는 그를 기다리기 위해 응접실로 향했다.
“작은 마님, 저를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미리 불러 놓은 리차드도 이제 막 도착한 듯 나를 보며 깍듯이 인사했다.
“리차드, 성에서 계속 탄 냄새가 나요. 어디서 뭘 태우고 있는 건가요?”
“탄 냄새요? 쓰레기는 무조건 성 밖에서 소각하는데.”
리차드는 코를 킁킁거리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쪽, 황태자 전하 침실 주변이 특히 심하던데.”
내 말에 리차드는 그곳 주변으로 가서 냄새를 맡아 보다 고개를 저으며 다시 돌아왔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마님.”
“……아무 냄새도 안 나요?”
“네, 전혀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오후에 돌아와서 주변을 조사해 보겠습니다.”
“……그래요.”
에녹도 분명 맡은 거 같은데, 리차드는 모르겠다고? 비염이라도 있는 걸까?
그리고 잠시 후, 에녹이 방 안에서 걸어 나왔다. 깔끔한 검은색 제복을 입고 있었고, 흐트러진 머리도 어느새 단정하게 정리되었다.
“아…….”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제대로 갖춰 입으셨네요.”
“중요한 분을 뵈러 가는 거니까요.”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성큼성큼 앞으로 향했다. 리차드가 먼저 나가 밖에 마차를 대기시켜 놓았다.
그런데 멜라톤이 뒤에서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전하! 지금 떠나시나 봅니다.”
“그렇네, 그럼 나중에 보지.”
멜라톤을 대하는 에녹의 태도가 달라져 있었다. 그래도 어제는 그에게 공대를 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완전히 하대로 바뀌어 있었다. 물론 그가 그런다고 해서 트집 잡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 그…… 네.”
멜라톤도 당황한 듯하면서도 결국 고개를 숙였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자네는 전하를 잘 모시게.”
멜라톤은 만만한 나에게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그리고 곧 클로에가 저쪽에서 다가왔다. 그녀는 어젯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상큼한 미소와 함께 여느 때와 같이 밝은 옷을 입고 나타났다.
“어디 가시려나 봐요.”
멜라톤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는 모습이 가소로웠다.
“네, 제 아버지의 묘소에 찾아뵈러 가려고요.”
“아, 착하기도 하시지. 하긴 그런 아버지라도 핏줄의 정은 무시할 수가 없죠.”
클로에는 안타까운 듯 웃음 지으며 또 선공을 날렸다. 하, 부모를 건드리다니, 선을 넘네.
“제가 좀 귀한 집 핏줄이라서요. 부모에 대한 공경은 기본이죠. 누구처럼 제 부모가 죽자마자 다른 가문으로 갈아타라고 배우진 않았답니다.”
클로에가 베레지안 남작이 죽자마자 앤드론 백작의 양녀가 된 걸 굳이 꼬집어 지적해 줬다. 바보는 아닌지, 그녀의 표정에 금이 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앤드론 백작님은 예전부터 절 아껴 주셨고…… 아버지를 여읜 절 가엾이 여겨 가문에 입적시켜 주셨죠. 좋은 분이세요.”
하지만 곧 그녀는 슬픈 듯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리깔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클로에 특유의 표정, 마치 피해자처럼 보이는 그 표정이었다.
“……그런가요. 그런 것치곤 따님이신 영애께 큰 관심이 없어 보이는데요.”
“무슨 말씀이시죠?”
에녹은 흥미로운 얼굴로 나를 보았고, 멜라톤은 남 일인 것처럼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 꼴도 우스웠다.
“이렇게 아름다운 영애인데, 혼처를 알아봐 주시지 않는 거 같아서요. 앤드론 백작가의 귀한 영애를 늘 두 번째에 있게 하시다니, 무심하기도 하셔라.”
“부인, 그 말씀은.”
“……아니면 영애 본인이 정부로 있는 게 취향이신가? 제 발로 늘 그 자리를 찾아가시는 걸 보면.”
지금 루퍼트와도 그렇거니와, 설사 클로에가 멜라톤으로 갈아탄다 해도 그녀는 정부였다. 클로에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나는 마지막 쐐기를 박기로 했다.
정부라 해도, 어느 집 부인이면서 정부인 것과 미혼의 몸으로 정부인 건 달랐다. 미혼으로 정부노릇을 하는 건 주로 평민 출신이었다. 미혼 귀족들은 사교계에서의 평판을 의식해서 연애를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숨기는 편이었다.
연애는 결혼 후에, 라는 말이 정석처럼 받아들여지는 세계였다. 내 가치관과 맞지는 않았지만, 이 곳의 관념은 그랬다.
“클리포드 공작성은 사람도 많고, 보는 눈도 많은 법이죠. 특히 후원은 밤 산책하기가 아주 좋아요.”
내 말에 클로에의 눈이 크게 뜨였다. 멜라톤도 얼굴이 벌게진 채 나를 보다 그 자리를 피해 버렸다. 나는 에녹의 아름다운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보며 화사하게 웃었다.
“그만 가죠, 전하. 시간이 많이 지체됐네요.”
“두 분 타십시오, 제가 모시겠습니다.”
리차드는 그 와중에도 묵묵하게 자리를 지키다 깍듯이 우리를 향해 목례했다.
에녹은 늘 그렇듯 마차에 오르는 내 손을 잡아 먼저 태워 주었고, 뒤따라 탔다. 제니는 마차의 짐칸에 짐을 싣고 리차드와 함께 마차 뒤편에 몸을 실었다.
나는 출발하는 마차 위에서 뒤편의 창을 보았다. 클로에는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나는 잠시 그곳에 시선을 두다 고개를 휙 돌려 앞을 봤다.
에녹과 단둘이 타는 마차는 이제 익숙했다. 스필렛 백작에게 가는 길. 나는 문득 에녹의 견해도 궁금해졌다.
“전하께서도 제 아버지를 자주 뵈셨었나요?”
“자주라고 할 순 없지만, 종종 뵈었습니다. 클리포드 공작과 더불어 나를 지지하는 가문들 중 하나였으니까요.”
“그렇군요. 전하께서 보시기엔 제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
에녹은 나를 빤히 바라본 채 잠시 말이 없었다. 나는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해 조용히 기다렸다.
“진중하고 사려 깊었던 분으로 기억합니다. 첫 번째 부인이…… 돌아가시기 전까지는요.”
에녹은 내 눈치를 보며 신중하게 말하면서도 솔직했다. 그가 말하는 첫 번째 부인이라는 건 에린의 어머니겠지.
“그럼 돌아가신 이후에는.”
“백작이 아시는 대로입니다. 두 번째 부인을 맞이하시고 나서 어울리는 무리가 달라진 이후부터는 많이 바뀐 것 같아 보였습니다.”
나는 모르지만, 어쨌든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에린에게도 남은 가족이 있기는 했다. 그걸 가족이라 불러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두 번째 부인과 그 아들이 있었지.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알아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창문 밖을 보는데, 낮은 울타리 안쪽에 모여 있는 무덤과 비석들이 보였다.
어느덧 근처에 다 온 것 같았다.
공동묘지라고는 했지만 그렇게 음침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정원수며 잔디며 깔끔하게 관리되어 있었고, 한쪽에는 작은 공원과 벤치도 있었다.
“가서 마님의 증표를 보여 주시면 됩니다.”
리차드의 말에 나는 가묘 앞으로 가서 클리포드 가의 증표를 보여 주었다. 그러자 문지기가 묵례를 한 후 닫혀 있는 울타리를 열어 주었다.
제니가 다가와 내게 꽃다발을 건네 주었고, 리차드가 앞서가며 스필렛 백작의 무덤 앞까지 안내해 주었다.
「스필렛 가의 아서, 이곳에 잠들다.」
어떠한 수식어도 없는 짧은 문구만이 쓰인 비석이었다. 애초에 그의 사연을 구구절절 쓸 수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무덤과 그 비석 앞에 서서 꽃다발을 내려놓고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에녹은 말없이 내 옆에 서서 짧게 묵례를 했다.
그 짧은 사이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에린의 아버지였다. 그녀의 몸을 차지한 내가 뭐라 말해야 할까.
에린은 그가 물려준 빚 때문에 아등바등하다가 그만 죽고 말았다. 그리고 그 빚은 내 몫이 되어 있었다. 에린의 운명은 기구했지만, 나는 그녀에게 미안한 감정은 없었다.
‘생각해 보면 에린은 무덤조차 없어.’
하지만 안타까운 마음조차 없는 건 아니었다. 부녀가 하늘에서 만나 대화라도 나눴기를 바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