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침묵하는 시간이 조금 길었다.
당장 그가 ‘당신을 황태자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하길 기대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렇다면 실망이겠지만, 이토록 조용한 것도 꽤 민망한 일이었다.
다른 주제로 말을 돌릴까 하는데,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결코 아무 여자에게 하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이상은.”
나는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정말 그런 말을 듣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그를 곤란하게 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다.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고 그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 그 정도만으로 지금은 충분했다.
역시 내가 휘둘리지 않으면 되는 일이다.
“괜찮아요, 제가 어려운 이야기를 했네요. 더 이야기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전하.”
“백작.”
다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일부러 웃어 주었는데, 그는 좀 더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아까의 여유 있던 태도는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게 아닙니다. 그저 그분의 생각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나 혼자 미래를 정해 두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에녹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의 눈 속에서 짙은 당혹감을 읽어 냈다. 그리고 일순간 애처로우면서도 원망하는 마음이 묻어 나왔다. 물론 그것은 곧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그의 말뜻을 알아듣고 그제야 이해를 했다. 그러고 보면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었구나. 뭐라고 말해 줘야 할까, 나도 미래는 모르는걸.
어쨌든 지금 나는 그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고, 그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붙잡아 두어야 하는 입장이었다. 조금은 여지를 줘 볼까. 하지만 거짓을 말할 순 없었다.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뜨며 말했다. 미래는 말해 줄 수 없지만, 그래도 현재는 말해 줄 수 있다.
“전하는…… 제가 가장 믿고 있는 사람이에요.”
겨우 이 정도뿐이었지만, 굳어 있던 그의 표정은 쉽사리 풀어졌다. 쉬운 남자 같으니라고. 하지만 나 역시 그의 표정이 풀리는 것을 보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자신의 입가를 가린 채 푹 고개를 수그렸다. 웃는 걸 숨기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보였다.
“풋.”
그 모습이 재밌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정말 희망 고문의 달인이십니다.”
“그래서 싫으세요?”
“아니요.”
바로 나오는 단호한 대답과 다시 정적. 그래도 아까보다는 분위기가 나쁘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내일은 뭘 하실 생각이십니까?”
다행히 에녹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나는 편한 마음으로, 하지만 너무 가볍지 않게 대답했다.
“내일 아버지를 뵈러 가 볼 생각이에요.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거든요.”
그러자 그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다 곧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나도 따라가겠습니다. 다른 동행인이 있으십니까?”
“아니요, 아닌데 전하가 왜…….”
……라고 하다가, 나를 빤히 보는 눈빛을 보며 말을 줄였다. 또 뭔가 감당할 수 없는 멘트가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 그래요. 그럼 내일 오전에 기별을 드릴게요.”
나는 최대한 가벼운 말투로 대답하며 일어났다. 에녹은 별말 없이 일어나 문을 열어 주었고, 나는 묵례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빠져나왔다.
설레고도 괴로운 마음이 걸음 하나하나마다 번갈아 가며 속을 어지럽혔다. 나는 분명 그의 마음을 이용하고 있다.
“……악녀라 해도 할 말이 없네.”
물론 그건 에녹 한정일 뿐이지만.
이 층 복도 밖 창문으로 별궁 문이 보였다. 그곳으로 멜라톤과의 밀회가 끝난 듯, 클로에가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클로에는 문을 닫고 들어가기 전, 갑자기 뒤를 휙 돌아보았다.
나는 흠칫 놀라 벽기둥 사이로 몸을 숨겼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본능적으로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설마 눈이 마주친 건 아니겠지?
다시 빼꼼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니, 클로에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본 게 아니라 내가 서 있는 복도 아래층 방, 에녹의 방을 보고 있었다.
잠시간 그곳을 보던 그녀는 곧 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불쾌한 감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나는 애써 무시하며 내 방으로 들어갔다.
***
다음날 아침, 늦게 잔 탓인지 몸이 조금 찌뿌둥했다. 머리도 조금 어지럽고 무거웠다. 이거 또 아픈 건 아니겠지.
일어나서 앉아 보니 방 안의 공기가 묘하게 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침대 기둥을 잡고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하아.”
맑은 공기가 확 밀려들어 오자, 조금 살 것 같았다. 아무래도 잠을 설쳐서 그랬나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일단 침대 근처로 가서 줄을 잡아당겼다. 창가에 비치는 햇빛을 보니 오전 한창때인 것 같은데, 제니가 보이지 않았다.
딸랑, 딸랑-
몇 번이나 더 당겨 봤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나는 바로 옆방 문을 노크한 후 문을 열었다. 제니는 아직도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제니, 제니.”
평소에 나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는 아이라 혹시 어디 아픈가 하고 어깨를 흔들어 보니, 딱히 열이 나거나 그런 것 같진 않았다.
나는 이 방도 공기가 탁한 것 같아 창문부터 열었다.
“……마님?”
그런 후에야 제니가 부스스하게 눈을 뜨며 일어났다.
“응, 많이 피곤했니? 아무리 불러도 오지 않길래.”
제니는 아직도 멍한 눈을 깜빡거리다 창밖을 보며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어머나, 지금이 몇 시야! 내 정신 좀 봐! 마님, 오늘 아침에 가실 곳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맞아, 맞는데. 일단 가서 정신 좀 차리고 와.”
“네, 마님.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제니는 자신의 뺨을 찰싹찰싹 때리며 세수를 하러 달려나갔다.
내 방도 그렇고, 제니의 방도 그렇고 미세하게 탄내가 나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약해서 착각인가 싶을 정도였다.
조금 이따 제니의 방 창문을 닫고, 내 방으로 와서 내 방 창문도 닫았다. 그리고 곧 다시 돌아온 제니가 내 몸단장을 도와주었다.
참배를 하러 가기 위한 복장이니만큼 어둡고 폭이 적당한 드레스에 검은색 모자를 골랐다. 그 스필렛 백작은 자신의 영지였던 곳이 아닌 이곳 클리포드 공작가 가신들의 공동묘지 쪽에 묻혀 있다고 했다.
아마 에린이 이미 백작이 죽을 때부터, 영지를 팔 생각으로 이쪽으로 모신 게 아닌가 싶었다.
아직 에녹은 일어나지 않은 건가?
에녹이 있는 방 쪽을 잠시 바라보다 일단 클리포드 공작에게 문안 인사를 하기 위해 발길을 돌렸다.
똑똑-
공작의 방 앞에서 노크를 하자, 엘리아나가 문을 열어 주었다.
공작은 어제보다도 훨씬 좋아 보였다. 이미 일어나서 앉아 있었고, 식사도 이제 막 끝낸 것 같았다. 빈 그릇이 협탁 위에 놓여 있었다.
“…… 아버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익숙하지 않은 호칭과 함께 그에게 무릎 인사를 했다. 공작은 나를 위아래로 훑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답해 주었다.
“그래, 간만에 푹 잤구나. 복장을 보아하니 네 아버지에게 가려는 모양이구나.”
“네.”
공작을 보며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소설에서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않지만, 그는 은근히 복잡하게 얽힌 스토리 속에서 많은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이었다.
루퍼트의 서자 문제를 비롯하여 수많은 질문이 떠올랐다. 하지만 꺼낼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나는 일단 오늘 가기로 한 곳과 관계된 질문을 했다.
“제 아버지는…… 왜 그런 선택을 하셨을까요?”
나는 질문을 하면서도 이런 물음이 이치에 맞는 것인지 고민해야 했다. 그가 큰 빚을 지게 된 까닭, 결국 자살해야만 했던 상황들. 공작은 조금 더 자세히 알고 있지 않을까.
“어떻게든 도와주려 했다. 나 역시 그 사람이 그리 가는 걸 원치 않았으니까. 하지만 도무지 연락이 닿질 않았지.”
공작은 나에게 변명을 하듯이 읊조렸다.
“처음 내게 투자 이야기를 꺼냈을 때도 나는 말렸다. 하지만 그는 어딘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어. 이제 우리 가문의 가신도 아니니 내가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거니와…….”
스필렛 백작은 그럼 결국 일확천금을 노리고, 남의 조언도 무시한 채 무리한 투자를 하다 실패한 건가.
내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범주였다. 나는 소리 없이 한숨을 쉬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공작님. 책임을 느끼지 않으셔도 돼요. 그래도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은 잠시 말없이 나를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서운하다 해도 나는 할 말이 없다. 어쨌든 그럼 조심해서 다녀오려무나. 갈 때 리차드를 데려가고.”
“네, 그럼 이만 편히 쉬세요.”
나는 다시 인사를 한 후 공작의 방에서 나왔다. 공작의 병세는 확실히 첫날 본 것보다 나날이 나아지고 있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나가기 전, 따라 나온 엘리아나에게 특별히 당부해두었다.
“공작님의 음식을 특별히 신경 써 주세요. 물이나 음료 같은 것도…….”
독이 있을지도 모르니 조심하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엘리아나는 알아들은 건지 뭔지 몰라도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네, 마님. 공작님 방으로 들어가는 건 늘 신경 쓰고 있어요.”
그녀 또한 의심하는 범주 내에서 벗어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따로 부탁할 사람이 없으니 할 수 없었다.
루퍼트의 아버지라지만, 그래도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일 층으로 내려갔다. 황태자가 있는 방 쪽 복도는 아직도 고요했다.
유달리 오늘따라 성 전체가 조용한 것 같기도 하고, 아까보다 탄내가 조금 짙어진 것 같기도 했다.
“황태자 전하는 아직 안 일어나셨나?”
드물게 지나가는 하인을 불러 물어보자 그가 공손히 말했다.
“네, 아직 나오시는 걸 보진 못했습니다.”
정말 아직도 자는 걸까? 나는 망설이다 결국 에녹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