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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50)화 (50/129)

50화

그날 밤,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침대에서 일어나 서성거리다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늦여름에서 초가을로 넘어가는 계절, 낮은 더웠지만 밤에는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다.

본성 동쪽 방의 불빛 역시 아직 꺼지지 않고 있었다. 그곳은 에녹의 방이었다.

그는 손님이었지만 워낙 귀한 신분이라, 각별한 호위를 위해 동쪽 별궁과 가까운 본성에 방을 배치했다. 물론 클로에가 별궁에 있다는 것도 그의 방을 그쪽에 배치한 이유 중 하나였다.

“아직…… 안 자는 건가.”

다행이라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루퍼트는 그렇게 별궁으로 들어간 뒤 또 소식이 없었다.

나는 그렇게 잠시 창밖을 보다, 산책이라도 할까 하여 겉 가운을 챙겨 입었다.

“마님?”

“괜찮아, 좀 더 자. 금방 올 거야.”

옆방에 있던 제니가 부스스한 눈으로 따라 나오려는 걸 사양하며 일 층으로 내려간 후, 에녹이 있는 동쪽이 아닌 서쪽 후원으로 향했다.

시원하면서도 서늘한 기운에 옷깃을 여미며, 낮은 관목으로 이루어진 후원의 울타리를 따라 천천히 걸어 다녔다.

이윽고 작은 연못에 비친 달을 바라봤을 때, 걸음을 멈춘 채 나는 생각에 빠졌다.

원작에서 공작을 시해하는 건 하녀였다. 루퍼트는 직접 독을 탄 하녀만을 처벌하고 끝내지만, 사실 이 안에 들어와 행간을 살펴봤을 땐 분명 그 하녀 단독으로 저지른 일이 아닐 것 같았다.

원작에서도 루퍼트는 그를 의심하면서도 밝혀내지 않고 넘어간다. 왜, 왜 그랬을까.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와 에녹, 클로에와 루퍼트 사이는 원작과 비슷하면서도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어날 일들은 또 계속 일어났다.

내가 하는 일들이 과연 소설 속 미래와 내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그것은 사실 이곳에 온 이후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불안이었다.

사락, 사락-

서쪽 후원은 조용히 생각하며 걷기 좋았다. 밤에는 물론 낮에도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크게 넓지도 않으면서 아늑하고 운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후원을 한 바퀴 돌고 다시 걸으려는데, 후원 한쪽에 있는 유리 온실 안에서 언뜻 움직이는 형체가 보였다.

“귀신…… 읍!”

깜짝 놀란 나는 소리를 지르려다 급하게 뒤에서 입을 막는 손길에 더더욱 놀랐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며 ‘쉿’ 하고 안심시켜 주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에녹을 보았다. 에녹이 나와 눈을 마주친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막았던 손을 내려놓았다.

나는 입만 벙긋거리며 ‘왜 왔어요?’라고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에녹이 발소리를 죽인 채 나를 건물의 기둥 뒤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는 유리 온실 안쪽이 훤히 보였다. 기둥 뒤에 숨은 채, 나는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며 놀라움에 입을 가렸다.

경악한 나는 뒤에 있는 에녹에게 확인하듯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쳤다. 에녹 역시 흥미로우면서도 긴장한 듯한 눈빛으로 그곳을 보고 있었다.

숨소리조차 잦아들자 그 안에서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렇게 보니 너는 참으로 아름답구나, 루퍼트가 너에게 홀딱 반한 이유도 알 것 같고. 참, 내가 너에게 이 가문의 비밀 한 가지 가르쳐 주랴?”

들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멜라톤 클리포드 백작이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있는 사람은 바로 클로에였다.

“비밀이요? 제가 그런 걸 알아도 될까요? 왠지 무서운 걸요…….”

클로에는 멜라톤과 벤치에 나란히 앉아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안겨 있었다. 그리고 멜라톤의 손, 손, 손이…… 어디로 가는 거야.

나는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보이는 장면과 들리는 이야기 모두 경악스러웠다.

“너만 알고 있어야 한다.”

클로에만 알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 왜 이리 또렷하게 들리는 걸까. 비록 주위가 조용할지라도 저 말은 거의 귓속말에 가까웠는데.

다시 흘긋 뒤를 보니 에녹이 싱긋 눈웃음을 쳤다. 혹시 에녹이 마법으로 소리를 높인 걸까?

나는 다음 나올 말에 귀 기울이며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사실 루퍼트는 적자가 아니란다. 공작 부인의 배에서 나온 아이가 아닌 거지.”

“으……음, 아…… 루퍼트가…… 정말인가요?”

조금은 끈적한 비음과 함께 클로에가 더 자세히 물어봤다. 궁금함 반 민망함 반, 나는 계속 들어도 되는지 안절부절못하면서도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그래, 하지만 공작 부인이 계속 아이를 낳지 못하자 결국 루퍼트를 부인의 양자로 입양했다. 그래서 적자처럼 키워졌지만, 사실은 서자 출신이야.”

“아…… 그랬군요.”

나는 새로 알게 된 사실에 몸을 굳혔다. 공작이 루퍼트에게 아직까지 작위를 물려 주지 않은 건 그럼 그것 때문일까?

“그런데 형님이신 공작은 그조차도 자신의 자식이 맞긴 한 건지 의심하는 모양이야. 왜냐하면 루퍼트의 어머니는 정부도 아니고 단지 하룻밤만 보냈던 여자였으니까.”

“……백작님.”

클로에는 은근한 목소리로 그를 부르며 그의 말을 막아 세웠다. 어두워서 그들의 행위가 정확히 보이진 않았지만 뭔가 밀접한 접촉이 일어난 건 분명해 보였다.

“영특한 아이로구나. 명백히 서열을 따지면 작위 계승권은 내가 우선이란다. 같은 정부라 해도 이쪽이 그럼 더 낫지 않겠느냐?”

“쉿, 이제 말은 그만하셔요……. 다 알아들었어요.”

본격적으로 진한 스킨십이 이어지자, 나는 손바닥으로 내 눈을 가렸다. 그리고 에녹이 이끌어 주는 대로 그를 따라 다급히 걸어갔다.

적막한 후원의 길을 따라가면서도 두근대는 심장 소리가 너무나도 크게 들렸다.

한참을 걸어 서쪽 후원에서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전하…… 아까 그건.”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가만히 그를 부르자, 에녹은 난처한 듯 웃음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정신 차려 보니 에녹의 방 앞이었다.

“쉿, 여기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잠시 들어가시겠습니까.”

“아.”

나는 본능적으로 주변을 살핀 뒤, 그에게 대답하는 대신 먼저 문을 열고 쏙 들어갔다. 에녹이 소리 없이 웃으며 따라 들어와 문을 걸어 잠갔다.

방은 내가 이 층 방에서 아까 본 것처럼 램프의 불이 곳곳에 켜져 있어 꽤 밝았다. 에녹은 커튼을 치고 나를 소파로 앉게 했다.

여러 가지 의문점이 들었지만 우선 한 가지 물어야만 했다.

“전하, 혹시 루퍼트가 지금 성에 없나요?”

“네, 저녁 무렵에 갑자기 성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디로 가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고요.”

“그랬군요. 아니, 그래도 그렇지.”

말을 하던 나는 문득 드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클로에를 비난할 수 있나? 딱히 그렇진 않다.

루퍼트도 지금 나와 클로에를 양손에 쥐려 하는데, 클로에라고 해서 안 된다는 법은 없다.

다만 그 상대가 루퍼트의 숙부라는 점과, 그녀가 이 로맨스 소설 속 여주인공이었다는 점, 게다가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정말 배신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대화 내용 때문에 좀 더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그나저나 루퍼트가…… 서자였군요. 혹시 전하께서도 알고 계셨나요?”

에녹은 대각선에 있는 일인용 소파에 기대앉아 다리를 꼰 채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 여유로운 모습이 어쩐지 그는 세상 모든 걸 다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인 것 같아 조금은 멀게 느껴졌다.

“하지만 어렸을 적 함께 클 땐 몰랐습니다. 적어도 공작 부인은 황후이신 제 어머니보다 훨씬 더 자식에게 자애로우셨으니까요. 나중에 다른 조사를 하다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웃고 있는 그의 표정이 어딘가 씁쓸해 보였던 건 내 기분 탓이었을까?

“하지만 공작 부인이 양자로 들였으니, 루퍼트가 작위를 계승하는 데에 법적인 문제는 없습니다. 물론 멜라톤 백작이 그걸 걸고넘어져서 소송까지 진행한다면 뭐, 조금 복잡해질 수도 있습니다만.”

거기까지 들은 나는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럼, 지금 이 시점에서 공작을 죽였을 때 가장 이득을 보는 사람이 누굴까.

멜라톤일까, 아니면 루퍼트일까. 그것도 아니면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제삼자일까. 내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공작은 죽어가기는커녕 건강을 회복하고 있었다.

혹시 의외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넘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조금 낙관적인 생각을 했다.

내가 만일 미래에 일어날지, 아닐지도 모르는 일로 누군가를 추궁한다면 ‘넌 그걸 어떻게 알았지?’라는 근본적인 의혹에 휘말릴 것이다.

나는 생각하기를 멈추고 잠시 방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방이 지내기에 불편하진 않으신가요. 전하도 아직 안 주무시고 계셨네요.”

에녹의 매끈하고 긴 손가락이 소파의 나무 팔걸이를 따라 미끄러져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했다.

“쉽게 잠들 수 있는 밤은 아니죠.”

“하긴, 지내던 곳이 아니니까요.”

“그것보단, 누군가와 같은 곳에 있으니 설레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뭘 들었나 싶어 눈을 깜박거리다, 얼굴로 밀려오는 열기에 화끈거려 그의 눈을 피해 버렸다.

저런 느끼한 대사를 저렇게 담백하고 아무렇지 않게 하다니, 역시 서브 남주를 무시하면 안 되는 거다. 그러니 여주인공이 남주를 좋아하면서도 서브 남주에게도 어쩔 줄 몰라 하고는 했지.

나 역시 오글거리면서도 두근두근 가슴이 설렌 건 마찬가지였다. 시선을 내리깔고 마음을 진정시킨 후, 나는 다시 그를 봤다.

“전하, 가끔 이럴 때 보면 바람둥이 기질이 있으세요.”

“내가 말입니까? 바람둥이요? 그건 좀 억울한데요.”

“아무 여자한테 그런 말을 하면 오해하잖아요. 그런 말씀은 부디 황태자비 될 분께만 해 주세요.”

말을 하면서도 목 아래가 조금 따끔거렸다.

그리고 에녹의 표정이 굳는 걸 바라보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주 조금은, 그의 마음을 시험하기 위한 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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