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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49)화 (49/129)

49화

저게 뭐야.

왜 에녹이 클로에를 끌어안고 있는 거야? 물론 클로에가 갑자기 쓰러지는 걸 받아 안았다는 건 내 눈으로 봐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감정적으로는 쉽사리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둘이 저렇게 가까이 있는 것을 보니, 또다시 에녹이 소설 속 서브 남주라는 것이 생각났다.

이미 그들의 감정은 원작에서 한참 멀어졌다는 걸 아는데도 불안감이 스멀스멀 밀려들었다.

이 와중에 루퍼트는 또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었다.

“에린!”

“저것 좀 봐요, 루퍼트. 당신 애인이 쓰러져 있잖아요.”

이것도 다 루퍼트 탓이다. 자기 연인은 안 챙기고 왜 따라와서 쟁알쟁알 쓸데없는 말만 늘어놓는단 말인가.

루퍼트는 내가 손짓하자 그제야 클로에를 발견한 듯 흠칫 놀랐다.

에녹은 그쯤 해서 클로에를 의자 위에 털썩 걸쳐 놓았다. 걸쳐 놓았다는 표현을 쓴 건, 그가 정말 클로에를 의자 위로 턱하니 올려 놨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곧이라도 주르륵 미끄러질 것 같았다.

루퍼트는 나와 클로에를 번갈아 보다 주춤주춤 클로에에게 다가갔다.

“클로에, 클로에.”

그는가 그녀를 바로 앉혀 살짝 흔들어 보고는 불손한 눈빛으로 에녹을 올려다 봤다.

“왜 이러는 겁니까?”

“과음을 한 것 같네.”

하지만 그에 대답하는 에녹은 그의 눈빛을 보지 못했다. 나를 안절부절못하는 눈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뭔가 변명을 하고 싶은 듯 당황하는 그의 눈을 마주하자니, 아주 잠시나마 불편했던 마음이 훅 가셔 버렸다. 이 무슨 마음의 조화랴.

하지만 루퍼트는 여전히 불편한 듯 나와 에녹을 보다 결국 클로에를 안아 들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녀를 안고 터덜터덜 별궁 쪽으로 가는 모습에 또 한 번 마음이 놓였다. 그래, 헛소리 할 거면 거기 들어가서 차라리 나오지 마라.

“죄송합니다, 전하.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일이 좀 있었나 보네요.”

내 말에 에녹은 손을 저어 부정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

“아니…… 맞습니다, 백작. 그러니까 자리를 비우지 마세요.”

말투는 단호한데 반해, 눈동자는 이리저리 흔들렸고 주먹을 말아쥐었다 폈다 하며 불안한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나는 픽 토라진 척 그에게서 몸을 돌렸다.

“왜요, 꽤 다정해 보이시던걸요.”

“저…… 백작, 그런 게 아니고…….”

그는 차마 나를 잡지도 못하고 내 뒤쪽에서 손만 머뭇거렸다. 슬쩍 고개를 돌리다 생각보다 그와 가까이에서 눈이 마주쳐 화들짝 놀랐다.

“아.”

간신히 식혀 놓은 얼굴이 다시 달아올랐다. 나는 다시 고개를 푹 수그리며 어색하게 말했다.

“흠흠, 전하. 일단, 그, 공작님부터 만나러 가시겠어요?”

“그게 좋겠습니다.”

나는 그와 눈을 마주하지 않은 그대로 총총 귀족들의 테이블로 다가갔다.

마무리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아쉬운 눈으로 황태자를 보긴 했지만, 더 잡진 못했다.

“그럼 천천히 머물다 가세요,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어쨌거나 그가 이곳에 온 진짜 명분은 공작의 병문안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조금 앞서 걸어가다, 건물 안에 들어가서는 그와 나란히 걸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스스로가 조금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어쨌든 아직은 루퍼트의 아내로 있으면서, 에녹이 고작 클로에를 잡아 주었다고 질투를 하고 있었다.

에녹의 마음을 받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백작.”

조용히 걷던 그가 걸음을 멈추며 나직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 역시 아까보다 조금은 차분해진 상태로 그를 바라보았다.

“초조했습니다. 너무 멀리 간다 하셔서요.”

“폐하께 감사드려야겠네요.”

“……내가 먼저 청을 드린 겁니다. 백작의 편지를 받자마자.”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하자마자 입이 살짝 벌어졌다. 에녹은 민망한 듯 살짝 눈을 피했다가도 다시 나를 보았다.

“그랬……군요.”

“다만 그 영애에 관해서는 조금 알아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혹 뭔가를 보더라도 오해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뭐……를요?”

“쉿.”

그가 검지를 들어 자신의 입술에 가까이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왜 그러는 거지? 그러다 잠시 후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타박타박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소리의 주인공은 엘리아나였다.

그녀는 우리를 발견하고는 조금 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묵례했다. 그리고는 안내를 하듯 앞으로 걸어나갔다.

여기부터는 그녀의 안내를 받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클리포드 공작의 안위를 곁에서 보살피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참 고민이었다. 독을 타는 건 과연 누굴까?

노크를 하고 들어간 방에는 공작이 홀로 앉아 있었다. 그는 침대에 앉아 서류를 뒤적거리며, 시선을 서류에 고정한 채였다. 바로 어제만 해도 누워 있었는데, 지금은 상태가 훨씬 좋아 보였다.

“가지 말랬더니, 부른다고 굳이 그곳에 가서 눈칫밥을 얻어먹고 왔느냐.”

공작은 핀잔을 주면서도 그녀를 아끼는 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 공작 각하.”

엘리아나는 주저주저하며 공작을 불렀고, 그제야 공작은 흘긋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에녹을 보자마자 눈이 크게 뜨였다.

“황태자 전하……? 맞습니까?”

“맞습니다, 클리포드 공작. 상태가 좀 어떠십니까.”

에녹이 그의 곁에 다가가니 공작은 부들부들 떨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자 그가 말리며 공작을 다시 침대 위에 앉혔다.

“괜찮습니다, 무리하지 마십시오.”

“어찌하여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그대는 제국의 충신이 아닙니까. 폐하께서 염려하시어 나를 보내시었습니다.”

“이 늙은이는…… 보시다시피, 어제까지는 꼼짝도 못하더니 오늘은 좀 살 만합니다. 그래도 이렇게 전하를 앉아서라도 뵐 수 있으니 다행입니다.”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나는 엘리아나를 향해 물었다.

“어떻게 되신 거죠?”

“저도 모르겠어요. 며칠 전 급격히 나빠지시더니, 어제 도련님과 마님께서 다녀가신 후로는 또 좋아지셨어요.”

“그랬군요.”

나는 좋아졌으니 다행이다 정도로 생각했지만, 에녹은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공작과 나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나는 입모양만으로 ‘왜요.’라고 물었고, 에녹은 고개를 저었다. 엘리아나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공작의 머리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어 주었다.

“정말 철렁했어요. 갑자기 정신을 잃으셔서…….”

한숨과 함께 공작을 꼼꼼하게 챙기는 그녀의 손길과 눈빛에서 공작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이 묻어 나왔다. 그럼 엘리아나는 아닌 건가.

“공작, 필요하다면 신관을 불러 드리겠습니다.”

에녹은 진지한 어투로 말했지만 공작은 느리게 손을 저어 보였다.

“아닙니다, 그저 나이가 들어 그런 것을 신관까지 부를 필요는 없습니다. 폐하께 안부나 전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혹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그것보다는…….”

공작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망설이다 결국 느리게 입을 열었다.

“제 아들놈이지만, 모자라거나 제국에 누를 끼치는 것 같으면 언제든 쳐내십시오, 전하. 그리하셔도 괜찮습니다.”

공작이 루퍼트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처음 들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새삼 공작이 참 나라의 충신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에 루퍼트에게는 그리 자상한 아버지는 아니었겠구나, 라는 생각도 동시에.

“루퍼트는…… 훌륭한 기사입니다, 공작.”

공작은 그 말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다만 희미하게 웃으며 에녹의 손등 위에 손을 겹쳤을 뿐이다.

“어쨌든 장성하신 전하를 뵈니 안심이 됩니다. 이제 편히 눈을 감겠군요.”

“공작, 그런 말씀 마세요. 오래오래 사셔서 고견을 들려주셔야지요.”

나는 두 손을 모은 채 에녹의 뒤쪽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클리포드 공작은 주름 가득한 눈으로 잠시 내 쪽으로 시선을 줬다.

“억지로 인연을 끌어다 놨지만…… 이것만큼은 아직도 잘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에녹은 그 말만큼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내 공작은 손을 저으며 피로에 젖은 목소리로 우리에게 말했다.

“이제 소인은 눈을 좀 붙여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쪼록 이 성에서 편히 지내시다 가시기 바랍니다. 가시기 전에나 한 번쯤 들러 주십시오, 전하.”

“알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엘리아나가 냉큼 다가서서 공작을 눕히고, 나와 에녹은 그가 눕는 것을 잠시 지켜본 후에 방에서 빠져나왔다.

몇 걸음 걷던 에녹이 잠시 멈춰 서며 말했다.

“백작, 잠시 이야기를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 층에 마련된 내 방과 가까운 작은 응접실로 그를 안내했다.

1층 응접실을 쓰지 않은 건, 드나드는 사람들의 눈과 귀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제니에게 차를 부탁한 후, 양쪽 소파에 각자 앉았다.

“마법석 광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주제를 듣자마자 나는 눈을 번쩍 뜨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가 설핏 웃는 듯 나를 보다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수도에 오시는 대로 내 집무실로 출근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전하의 집무실로 직접 출근하라고요?”

에녹은 싱긋 입꼬리를 올리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뜻 보면 음흉해 보이는 눈빛에 나는 눈을 흘기다 픽 웃고 말았다.

“계속 말씀하세요.”

“일단 황실의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발표할 겁니다. 그리고 초기 자본금을 투자할 투자자와 채굴업자를 따로 고용할 겁니다. 그 면접을 백작이 나와 직접 보시게 될 겁니다.”

구체적인 일정을 읊어 주자 뭔가 진짜 시작되는 기분이 들었다. 한시라도 빨리 수도에 가고 싶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에녹이 자상한 어조로 나를 달래 줬다.

“공고가 났으니 어차피 모이는 데 시간이 필요합니다. 느긋하게 생각하세요, 물론 나부터가 잘 안되지만요.”

“전하께서 왜요?”

내 물음에 에녹은 팔짱을 끼더니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몰라서 물으십니까?”

나는 그런 그를 멀뚱멀뚱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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