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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그냥 너 가지세요 (48)화 (48/129)

48화

성의 로비를 지나 식당으로 간 나는 지나가는 하녀에게 부탁했다.

“물 한 잔 갖다 주렴, 시원한 거로.”

“예, 마님.”

그렇게 받아 든 물을 한 모금 마시려는데, 바로 뒤따라 온 사람이 있었다. 바로 루퍼트였다.

“괜찮아? 얼굴이 빨갛던데.”

그를 피해 들어왔는데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나는 마시던 물을 풉 하고 뱉어낼 뻔했다.

“왜 따라왔어요?”

“내가 따로 보자고 했잖아. 그래서 들어온 거 아냐?”

나는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후, 목소리를 조금 낮춰 말했다.

“그건 나중에요. 호스트가 둘 다 자리를 비우면 어떡해요.”

“흠, 책임감이 강한 편인 거야? 아니면 정말 제대로 안주인 노릇 할 마음이 있는 거야?”

그가 흥미로운 듯 턱을 만지작거리며 웃음기 서린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 표정에 난 흠칫하며, 컵을 테이블 위에 세게 내려놓았다.

“비꼬려고 따라온 거예요? 좋아요, 그럼 안주인 노릇은 다 관둘까요?”

“아아, 진정해, 대화를 하려는 거잖아.”

내 날 선 반응에 루퍼트는 마치 달래는 것처럼 내 어깨를 토닥거렸다. 나는 슬쩍 그의 손길을 피했다.

1층 식당 창문 너머로 가든파티가 열리는 곳이 훤히 보였다. 멜라톤이 클로에에게 술을 따라 주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쪽을 흘긋 보면서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말하세요, 금방 가 봐야 하니까요.”

잠시 머뭇거리던 루퍼트는 갑자기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아까 한 말은 비꼰 게 아니야.”

“뭐를요?”

“안주인 노릇, 제대로 할 마음이 있다면 해도 좋아.”

나는 나도 모르게 귀를 후볐다. 일부러 무례한 행동을 한 게 아니라 그의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 년보다 더, 그 이상 결혼 생활을 유지해도 된다고. 빚은 걱정 마, 네가 대답만 하면 당장이라도 갚아 줄 테니.”

나는 루퍼트의 푸른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며 홀로 팔짱을 꼈다.

“왜 그렇게 마음이 바뀌었는데요? 처음 계약과 다르지 않나요?”

“당신과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게 내게 나쁘지 않다 생각하니까. 당신도 그렇지 않아?”

피식 비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손으로 가리며 잘게 헛기침을 했다. 나와 정반대의 생각을 하게 된 까닭은 그의 감정이 변했기 때문인가?

“당신 정부도 그렇게 생각하나요?”

“그래, 이건 사실 클로에가 제안한 거야. 그녀는 정말로 착해. 날 진심으로 생각해 주지.”

“참, 그렇기도 하네요.”

클로에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궁금했지만, 결코 그렇게 선량한 의도가 아니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았다.

기가 막힌 그의 말에 굳이 진지하게 반박하고 싶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그저 둘이 있는 이 시간이 불편했을 뿐이다.

곁눈질로 창문 밖을 보니, 마차가 한 대 도착하고 있었다. 귀부인이 급하게 그 마차에서 내려섰다.

“저 부인은 누구죠?”

“……숙모님이시군. 멜라톤 숙부님의 부인이셔. 이제 당신 차례야, 대답은?”

“글쎄요, 당신은 당신을 그렇게나 진심으로 생각해 주는 여자와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무슨 말이야?”

나는 알아듣지 못하는 그를 위해 친절한 가면을 뒤집어쓴 채 말했다.

“그녀를 공작 부인 자리에 앉히고 싶지 않냐고요. 정말 사랑한다면, 나라면 그렇게 정부로만 두지 않을 텐데.”

“그녀는 이해한다니까. 몇 번을 말해. 혹시 내가 정부를 두는 게 싫은 거야? 그래서 대답하지 않는 거야?”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전혀요. 나는 상관없어요. 뭐 이왕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루퍼트의 단정한 미간에 주름이 잡히는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사실 여유로운 척했지만 아주 조금은 긴장했던 것 같다.

“당신의 지위는 유지하고 싶고, 사랑하는 사람도 곁에 두고 싶고. 그거 좀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건 사실 소설 속 루퍼트를 보면서부터 느꼈던 감정이었다. 자꾸 질척거리는 게 짜증나서 그만 속마음을 털어놓고 말았다.

“……뭐?”

사실은 일 년이 되기도 전에 너와 이혼할 생각이다, 라는 말을 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일까. 나는 그와 되도록 일정한 거리를 둔 채 평화롭게 지내고 싶었다. 그건 순전히 그가 내가 하는 일을 방해할까 봐서였다.

내 손에 실질적인 돈이 쥐어지는 순간, 그 순간 그에게 이혼을 통보할 것이다.

나는 늘 그랬듯이 적절하고 납득 갈 만한 이야기를 하며 대답을 회피했다.

“이해는 해요. 사람은 원래 다 이기적인 거니까. 그런데 나는 그렇게 오래 유지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두 사람 사이의 이물질이 되는 거 썩 좋은 기분이 아니라서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려 했다. 그가 손목을 또 갑자기 낚아채지 않았다면.

“네가 왜 이물질이야?”

“아닌가요?”

“네가 내 부인인데 어떻게 이물질이 돼?”

화내는 포인트가 어딘가 상당히 어긋나 있다. 내가 잡힌 손목이 아파 눈살을 찌푸리자, 그가 다시 힘을 풀고 놔 주었다.

“미안.”

“그럼 앤드론 영애가 이물질인가요?”

“…….”

역시나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다른 소리를 늘어놓았다.

“많이 화가 난 모양인데, 좋아. 그럼 오늘부터는 당신을 정말 내 부인으로 대해 줄게. 그럼 되겠어?”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내가 남편 노릇을 하겠다는 거야. 어젯밤 내가 방에서 나갔기 때문에 화가 난 거잖아?”

정말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나는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말문이 막혀 있다, 이내 크게 한숨 쉬었다.

“루퍼트, 잘 들어요. 우리는 계약 결혼을 한 거예요. 나는 돈이 필요했고, 당신은 당신의 지위와 안락한 연애 생활을 위해 했던 거죠.”

“꼭…… 그렇게 말해야겠어?”

창문으로 보니, 귀족들은 하나둘 일어나고 있었다. 막 도착한 멜라톤의 부인이 앉아 있는 멜라톤 에게 격양된 표정으로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사실을 말한 것뿐이잖아요. 왜 당신은 계속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만 해요, 이제 정말 나가 봐야겠어요.”

그 순간, 뒤돌아선 나를 향해 루퍼트가 말했다. 타이밍도 맞지 않았거니와, 절대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왜냐고? 당신이 좋아졌어, 에린 클리포드. 그래서 그래.”

그의 말에 나는 발걸음을 멈칫했지만, 굳이 뒤돌아보진 않았다. 만일 돌아봤다면, 그 이기적인 마음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을지도 몰랐다.

“착각일 거예요. 당신은 앤드론 백작 영애를 사랑하잖아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이 자리에 그리 오래 있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다시 성 안을 빠져나왔다. 가든 파티가 열리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다, 나는 그곳에서 펼쳐지는 장면을 보고 머뭇거렸다.

루퍼트의 숙부 멜라톤은 한쪽으로 나와 그의 부인에게 뭔가 추궁당하는 눈치였다. 그 부인의 목소리가 하도 커서 여기까지 들렸다.

대충 듣자하니 여자 문제로 혼나는 중인 것 같았다. 아까 클로에를 대하던 태도로 볼 때 그럴 만 하다고 여겨졌다.

내 관심은 그것보다, 내가 앉아 있던 테이블에 있는 두 사람이었다. 클로에가 에녹 바로 옆자리에 앉아 살살 눈웃음을 치며 도란도란 뭔가를 얘기하고 있었다.

“잠깐, 에린. 내 얘기 아직 안 끝났어.”

멈춰선 내 뒤로 루퍼트가 다시 또 따라 나왔다.

***

여럿 자리를 비운 상황 속에서도 에녹은 우아하게 식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따금씩 본성 쪽의 어느 창가를 보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전하, 천천히 머물면서 영지도 한번 돌아보고 가심이 어떠신가요? 곧 이 근방 영지의 귀족들이 함께 여는 파티도 있을 예정이랍니다.”

“말씀 감사합니다만, 국사가 바빠 오래 머물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까요.”

“저런, 하긴 황태자 전하이시니 오죽 바쁘실까요.”

귀족들은 말 한마디라도 더 붙여 보려는 듯 그에게 다가와 인사말을 건넸고, 에녹은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 주었다.

하지만 그가 동석을 권하진 않았기 때문에, 귀족들은 서서 몇 마디 나눈 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만 했다.

‘시간이 좀 걸리는 것 같은데, 가 볼까?’

에녹이 에린이 사라진 곳으로 고개를 돌린 사이, 클로에가 자신의 잔을 들고 에녹의 옆자리로 왔다.

“저랑 전하만 남았네요. 두 분은 어디 간 걸까요?”

클로에가 잔을 내밀었고,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녹은 가볍게 잔을 부딪혀 주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때가 되면 오지 않겠습니까.”

“하긴…… 그런데요, 전하.”

클로에는 살짝 취기가 올라온 듯 발그레한 얼굴로 턱을 괸 채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아까 멜라톤이 주는 술을 받는 족족 마실 때부터 이미 취해 있었던 것 같았다.

“전하의 눈엔…… 제가 아름답지 않으신가요?”

에녹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곁눈질로 흘끔 본 후,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 여자가 왜 이러는 거지?

“내 대답이 필요한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에녹은 클로에가 자신의 옆으로 온 이유 중 적어도 두 가지는 알 것 같았다.

하나는 자신과 함께 뭇 귀족들의 시선을 함께 받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지금 남편을 닦달하고 있는 멜라톤 클리포드 백작 부인의 눈총을 피할 수 있는 것이었다.

루퍼트가 자리를 뜬 후, 멜라톤은 좀 더 적극적으로 클로에를 희롱했고 클로에는 그것을 다 받아 주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걸 본 백작 부인의 눈이 뒤집어진 건 당연하고도 뻔한 일이었다.

“전하, 실은…….”

클로에는 에녹에게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거리다 한숨을 내쉬었다. 풍겨 오는 술 냄새에 에녹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아아…… 꼭 드릴 말씀이 있는데, 지금은 좀 어렵겠네요.”

클로에가 눈짓하며 가리킨 쪽에서는 에린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로 허겁지겁 따라오는 루퍼트가 있었다.

에녹은 반사적으로 일어나 클로에와 거리를 벌렸다. 클로에도 주춤주춤 그를 따라 일어났다.

“아, 술이 너무 취했나…… 어지러워.”

그리고 그 순간 클로에는 갑자기 이마를 짚더니 그가 있는 쪽으로 기대듯이 쓰러졌다. 너무 빤한 행동이었지만 에녹은 반사적으로 쓰러지는 클로에의 몸을 받쳤다.

걸어오던 에린이 그 모습을 보고 우뚝 멈춰서 버렸다. 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에녹과 에린의 눈이 마주쳤다.

“……젠장.”

에녹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홀로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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