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루퍼트, 공작께서 편찮으시니 자네 마음도 성치 않겠군.”
에녹은 내 옆에 있던 루퍼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황제 폐하의 위로, 마음 깊이 새기겠습니다.”
루퍼트는 눈앞에 있는 황태자가 아닌 그를 보낸 황제께 감사 인사를 올렸다.
내가 듣기에는 의도가 너무 빤히 보이는 말이었지만, 겉으로는 문제 될 바가 없었다. 황태자가 이곳에 온 건 황제의 명령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물론이지, 가서 전해 드리겠네.”
황태자가 루퍼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것으로 짧은 대화가 끝이 났다. 어쨌든 지금은 이 성의 안주인 노릇을 해야 했으니, 나는 조금 앞서 걸어 나갔다.
“전하, 이쪽으로.”
그런데 루퍼트가 내게 다가오더니 또 손을 잡으려는 게 아닌가. 내가 조금 움찔하는 사이, 에녹은 고개를 돌려 뒤쪽에 있는 클로에를 바라보았다.
“앤드론 백작 영애께서도 이곳에 계셨군요.”
“예,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에녹이 홀로 있는 클로에를 에스코트하게 되었다. 그 모습을 보니 마음속 어딘가가 싸하게 식어 내렸다. 그럴 수도 있다는 걸 알지만, 그렇지만.
“가지, 당신이 안내를 해야 하잖아.”
“……그래요.”
흘긋 옆을 보니 루퍼트는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자신의 연인을 다른 남자, 그것도 저렇게 잘생기고 멋있는 황태자가 에스코트해 주는데 정말 질투가 나지 않는 걸까? 나도 이렇게 질투가 나는데?
순간 스치는 생각에 나는 화들짝 놀라면서도, 겉으로는 온화한 미소를 유지한 채 사뿐사뿐 걸어갔다.
해가 내리쬐는 곳은 더웠지만, 다행히 나무 그늘 아래는 시원했다. 에녹은 딱 거기까지만 클로에를 에스코트한 후에 가볍게 묵례하고는 내게 가까이 왔다. 나도 동시에 루퍼트의 손을 놔 버렸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전하.”
귀족들은 각자 눈치를 보며 적당히 서열에 따라 우리와 가까운 자리를 골라 앉았다.
“전하, 나날이 볼 때마다 훤칠해지시는군요. 제 조카도 그렇거니와, 정말 둘을 함께 보면 제국의 앞날이 앞으로도 빛나는 것 같습니다.”
멜라톤 클리포드 백작이 제일 먼저 아부성 짙은 인사를 하며 그의 왼쪽에 앉았다.
내가 에녹의 오른쪽, 그 옆은 루퍼트가 앉았다.
한 자리가 비었지만, 뭐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다. 하인들이 오고 가며 빵과 에피타이저를 나르는 사이, 우리와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서 갑자기 고성이 들려왔다.
“당신의 자리는 없어요!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내려온 거죠?”
클로에가 있는 테이블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바라보는데, 엘리아나 양이 그 자리에 나와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을까 싶어 일부러 부르지 않았던 건데, 왜 나와 있는 거지?
“저는…… 내려오라 하셔서.”
마렌드 자작 부인이 뾰족한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누가요?”
“공작님을 모시는 하녀가…….”
그러자 클로에가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아나 양을 자신의 자리로 데리고 왔다.
“뭔가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하지만 이렇게 내려온 사람을 어떻게 그냥 돌려보내겠어요. 공작님을 옆에서 모시는 사람이니, 한 끼 정도는 양해 부탁드려요, 자작 부인.”
양해를 왜 자기가 구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같은 정부 신세라 측은해지기라도 했나. 그리고 나는 분명 엘리아나 양을 부르지 않았다.
엘리아나는 클로에의 손에 이끌려 앉아 놓고도 어쩔 줄 몰라 하며, 주변의 눈치를 봤다. 가엾게도.
“그럼 영애께서는 어디 앉으시려고요? 이제 자리가 없는데요.”
“음, 저는…….”
클로에는 난처한 듯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다, 이쪽 중앙 테이블에 남은 자리를 보곤 시선을 사선으로 내리깔았다.
“……글쎄요, 저곳은 안 될 것 같고.”
그걸 들은 루퍼트가 일어나 남아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나를 보며 물었다.
“이쪽에 앉게 해도 되겠어?”
나는 당황한 눈으로 루퍼트를 보다 다시 에녹을 봤다. 그의 무례한 행동에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에녹이 나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리가 남으니 이쪽으로 오시면 되겠군요.”
에녹까지 그렇게 말하니 내가 할 말이 없었다. 내가 포크를 꽉 쥔 채 눈으로 따져 물으니, 에녹은 입꼬리를 살짝 올려 보이는 것으로 내 눈빛을 받아넘겼다.
“실례하겠습니다.”
클로에는 다가와 앉아 있는 이들에게 무릎 인사를 한 후, 루퍼트가 빼 준 의자에 다소곳이 앉았다.
“고생했어, 어젯밤 제대로 잠도 못 잤을 텐데.”
루퍼트가 다시 앉으며 내 수고로움을 칭찬했는데, 그 말의 뉘앙스가 묘했다.
“아뇨, 모두가 아랫사람들이 수고한 덕분인걸요. 그리고 저는 어젯밤 아주 잘 잤답니다.”
“그렇지, 당신은 늘 잘 자는 편이지.”
이 사람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우리는 한 번도 같은 방에서 잔 적이 없다.
앞에 놓인 스테이크 조각을 잘게 썰며 곁눈질로 에녹을 보았다. 에녹은 샴페인 잔을 입으로 기울이며 가느다란 눈초리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적당히 받아치려는데, 멜라톤 클리포드 백작이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역시 신혼부부 아니랄까 봐 대낮부터 뜨겁군요, 전하. 샴페인 맛이 어떠십니까, 향이 아주 그윽하지 않습니까.”
“괜찮은 것 같군요.”
“클리포드 영지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든 샴페인입니다. 일조량이 좋아 지금이 딱 제철이지요.”
에녹은 샴페인 잔을 내려놓고는 가볍게 휘저으며대답했다. 입매는 올라가 있었는데 눈빛은 차가웠다.
아아, 모르겠다. 나도 결국 샴페인 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달콤한 향과 씁쓸한 맛이 입안에서 함께 어우러졌다.
“백작의 입맛엔 어떻습니까, 맛이 좋다 생각하십니까.”
“아, 저도 괜찮네요.”
“다행입니다, 그럼 한잔 더 드리지요.”
황태자가 직접 병을 들어 내 잔에 가득 부어 주었다. 뭐, 뭐지, 왜 그러는 거지? 눈을 마주치자 에녹이 예쁘면서도 짓궂게 눈매를 휘어 보였다.
그러니까…… 이건 질투?
“이것도 좀 먹어 봐, 당신 요새 너무 말랐어.”
루퍼트는 갑자기 자기 접시에 있던 구운 감자를 썰어 내 접시 위에 올려 주었다. 감자, 사실 나는 감자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것도 모르면서 새삼스럽게 챙겨 주려는 저의를 모르겠다.
그러는 와중에 에녹의 시선이 한 번씩 클로에 쪽으로 향하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유난히 에녹이 클로에를 신경 쓴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일까, 하고 클로에를 보자마자 납득이 갔다.
오늘 그녀는 예뻤다. 밤의 화려한 무도회에 어울릴 법한 복장이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래도 화사한 드레스는 자연광 아래서 더 빛나 보였다.
앵둣빛 붉은 입술과 다소곳한 시선, 얌전한 손놀림까지, 그녀가 여주인공이라는 걸 몸소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런데 조용히 있던 그녀가 갑자기 말문을 열었다.
“부인께서는…… 이번에 발견하신 마법석 광산을 어찌하실 생각이신가요?”
“어찌하다니요, 영애께서 그것이 왜 궁금하실까요?”
“저는 그저…….”
클로에는 루퍼트를 슬쩍 보다 자신의 입술을 냅킨으로 닦으며 말했다.
“부인이 얻으신 행운이니, 클리포드 일가에도 더없는 기쁨이 아닐까 싶어서요. 축하드려요, 두 분께도.”
클로에가 루퍼트와 멜라톤을 번갈아 보며 눈가를 사르르 접었다.
나는 잡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달칵, 소리 나게 내려놓고는 웃음 띤 얼굴로 그녀를 봤다.
남편을 건드리는 건 참아도, 내 돈을 건드리는 건 참을 수 없지.
“이상하네요, 폐하께서는 저 스필렛 백작의 소유로 인정해 주셨는데요. 뭐, 두 분의 축하까지 제가 받은 거로 칠게요. 고마워요, 앤드론 영애.”
“부부의 재산은 함께 관리해 나가는 게 맞지 않을까요?”
클로에가 순진한 척 오렌지색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그런가요? 하긴, 안 그래도 공작 각하께서 공작가의 재산 관리를 저에게 맡길까 하시는 거 같던데, 당신 생각은 어때요?”
루퍼트를 휙 돌아보며 말했다. 타운하우스의 재정권을 맡는 것과 공작가 전체의 살림을 맡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이 공작가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는 문제였으니 말이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지. 이 자리의 주제로 적합하지 않은 것 같아, 클로에.”
루퍼트는 클로에를 나무라며 주의를 줬다. 역시나 예상대로의 반응이었다. 저 경계심 많은 도련님이 공작가의 재산 관리를 덜컥 넘겨줄 리가 없지. 받을 생각도 없었지만.
그 후로 오고 간 대화는 대부분 시시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묘하게 신경 쓰이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건 멜라톤이 클로에에게 은근한 관심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언제 그렇게 마셨는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그녀의 손목 부근을 손으로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영애의 손목은 참 가늘고도 곱군요. 이 팔찌는 오팔인가요? 그것참 신비하고 오묘한 빛깔이…… 하얀 피부와 참 잘 어울립니다.”
“감사합니다, 백작님.”
그런데 클로에는 별로 불쾌한 기색 없이 그의 아슬아슬한 농담을 잘 받아 주었다. 역시나 이상한 건 루퍼트였다.
그는 클로에가 자기 숙부에게 희롱을 당하고 있는데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그는 나를 두고 에녹과의 신경전을 하는 데 몰두해 있었다.
“그때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만, 제 아내를 구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전하.”
“아닐세. 그대 몸이 두 개가 아니니 어찌 두 여인을 챙기겠나. 개의치 말게. 덕분에 나는 마물을 잡아 일등을 챙기지 않았나.”
그에 맞받아치는 에녹도 만만치 않았다. 먹던 빵이 목에 걸리는 바람에 나는 냅킨으로 입을 가린 채 작게 콜록거렸다.
그러자 동시에 내 앞에 물잔과 주스잔이 내밀어졌다.
“백작, 괜찮습니까?”
“그러게 천천히 좀 먹지 그랬어.”
손과 발이 동시에 곱아드는 기분에 나는 견딜 수 없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야만 했다.
“저, 잠시만 자리 좀 비울게요.”
계속 남에게 휘둘리는 기분이 든다. 이건 정말 나답지 않았다. 붉어진 얼굴을 손으로 부채질하며, 나는 총총 그 자리를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