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마님, 잠시만요. 움직이지 마세요.”
“서둘러 줘, 제니. 이제 시간이 거의 다 됐어.”
곱게 틀어 올린 머리카락 사이로 제니가 하얀 꽃 모양 머리핀을 꽂아 넣었다. 드레스는 너무 화려하지 않게, 은은한 푸른 빛깔이 도는 새틴 소재로 골라 입었다.
폭은 적당히 넓지만 이리저리 걸리적거리지 않는, 딱 그 정도였다.
거울 앞에 서서 마지막 점검을 하며,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에린은 역시 뭘 입어도 예쁘다.
흘긋 창문으로 아래를 바라보니, 클리포드 성은 아침부터 부산스러웠다.
사용인들은 정신없이 성 곳곳을 쓸고 닦으며 귀빈을 맞이하기 위한 가든 파티 준비로 분주했다.
나도 거울을 한 번 더 돌아보고는 서둘러 정원으로 내려갔다.
원래 황족이 영지에 방문하는 날이면 성대하게 몇 날 며칠간 파티를 여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황태자의 이번 방문은 아픈 공작을 위로하기 위한 행차이니만큼 점심 시간에 맞춘 가든 파티 정도로 그 규모를 축소했다.
정원사들이 삐죽삐죽 솟은 정원수들의 가지를 잘라 냈고, 정원을 가로지르는 수로에 떠다니는 나뭇가지며 나뭇잎들도 모두 걷어냈다.
“달리아 꽃이 피었네요. 여기 몇 송이 가져다가 테이블에 장식해 주세요.”
“네, 마님.”
나는 손수 정원과 성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챙겨야만 했다. 이 성에서 이 일을 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전이 다 지나갈 무렵이었다.
“이제 올 때가 됐는데…….”
“루퍼트 녀석은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까?”
“어서 오세요, 멜라톤 숙부님.”
공작의 동생인 멜라톤 클리포드 백작이 뒤에서 불쑥 나타났다. 그는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도 제법 안주인 티가 나는군요.”
조금은 비꼬는 듯한 그 말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 신경 쓰이는 건 별궁 쪽 일이었다.
벌써 두 차례나 사람을 보내 봤지만, 별궁의 문은 열리지 않고 있었다. 안에서 대체 뭐 하느라 여태 저러는 건지.
황태자가 온다는 건 알고 있을 텐데. 나와 보지 않을 셈인가?
하지만 곤란했다.
황태자 에녹이야 원래 루퍼트가 오만불손한 걸 아니 그렇다 치더라도, 그를 수행하는 보좌관들이나 다른 황실 소속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뿐이랴. 이제 영지 내에 있는 지방 귀족들도 속속들이 도착할 것이다. 파티 규모를 축소하여 많이 부르지는 않았다 해도, 그들의 눈과 귀로 보고 들은 것들은 모두 사교계로 퍼져 나갈 것이다.
아무리 클리포드 공작의 유일한 아들이라지만, 황실이 두렵지 않은 건가.
그렇게 초조해하고 있는 사이, 귀족들을 태운 마차가 속속들이 도착했다. 다행히 집사장이 함께 나와 도착하는 이들이 누군지 하나씩 소개해 줬다.
“이분들은 마렌드 자작과 그 부인 되십니다.”
“안녕하세요, 부인.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정말 영광이에요.”
“저야말로 와 주셔서 감사하죠.”
“그런데 소공작님은 아직……?”
마렌드 자작 부인이 의아한 눈을 하면서도 조금 뒤쪽으로 물러났다. 그들 뒤에도 아직 소개받지 못한 귀족들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당황하는 표정을 다시 능숙하게 감추며 다음 귀족과 인사했다.
“이분은 오스틴 남작이십니다.”
“스필렛 백작님은 제가 오래 전부터 존경한 분입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부인.”
“감사합니다, 부디 차린 건 없지만 즐거이 보내시길 바랄게요.”
“황태자 전하는 곧 도착하시겠죠?”
“네, 아마도…….”
그 뒤로도 여러 귀족이 내 앞으로 와서 인사를 했다.
점점 내가 왜 혼자서 이러고 있어야 하나 자괴감에 빠진 사이, 별궁에서 미적거리며 기어 나오는 이가 있었다.
다행히 늦잠 잔 것 치고는 몰골이 멀쩡했고, 옷도 갖춰 입고 나왔다. 그는 따스한 햇살 아래 흐트러진 금발머리를 손으로 넘기며 걸어 나왔다.
푸른 눈동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자기가 마치 주인공이라도 되는 것처럼, 늦었으면서도 미안한 감정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참, 주인공 맞지?
그런데 왜 혼자 나오지? 클로에가 있다는 걸 집안 사람들이 뻔히 아는데. 궁금해서 물어보려던 찰나, 나는 눈을 의심케 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저 레이디는 누구죠?”
누군가 놀라움과 경악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앤드론 백작의 양녀 클로에 양이에요.”
나는 덤덤하게 설명했지만, 나 역시 놀라움을 숨기려 애를 써야 했다.
클로에는 새하얀 레이스 바탕에 핑크색 프릴이 가득 달린 드레스를 입고 나왔다. 오늘 그녀의 복장만으로 보자면 당장 데뷔탕트를 치뤄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루퍼트는 뒤에서 오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고 이곳까지 에스코트해서 걸어왔다.
우리는 모두 그늘에 있었고, 그 둘은 정오의 태양 아래 있었다.
자연스럽게 반짝반짝 빛이 나는 그들에게 모두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만일 눈길을 끌 생각이었다면, 그야말로 성공이었다. 비록 상황과 장소에 맞지 않는 드레스임은 분명했지만, 그래도 클로에는 그 드레스를 소화할 만큼 아름다웠다.
가까이 온 그녀는 조금 당혹스러운 듯 오렌지빛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거기까지는 그럴 만했다. 그런데 다음 대사가 문제였다.
“저…… 파티가 열리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요?”
나를 보고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마치 내가 잘못 알려 주기라도 했다는 듯이, 서글픈 얼굴은 덤이었다. 그러자 주위 귀족들의 눈초리가 대번에 내게 향했다.
나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안타까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그리고 최대한 나긋하게, 타이르는 듯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앤드론 영애도 참, 아버님이 편찮으신데 어떻게 이 집에서 호화로운 파티를 열 수 있겠어요. 조촐하게 점심 가든 파티 정도로 대신하겠다고 전했던 것 같은데요.”
“그 얘기는…….”
루퍼트가 뭐라 대신 말하려는 걸 내가 가로막아버렸다.
“아, 두 분은 주무시느라 못 들으셨나 보군요. 세 번이나 하인을 보냈는데. 저런, 제 불찰이에요.”
나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이제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귀족들은 클로에와 루퍼트를 번갈아 보며 옆 사람과 귓속말로 수군덕거렸다.
흘긋 보니 클로에가 앙다문 입술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두 사람이 아침까지 붙어먹느라 파티에도 늦었다는 걸 내가 간접적으로 주위에 알린 셈이었다.
만일 남편을 지극히 사랑하는 부인이었다면, 이 상황조차 수치스럽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아니었다.
나는 먼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자연스럽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클리포드 공작 성은 완만한 언덕 위에 있었다. 거기 서 있으면 영지와 바다까지 한눈에 보였다.
그리고 그때, 공작성으로 올라오는 외길 끝에서 깃발이 펄럭거렸다. 하얀 테두리에 은회색 바탕, 그 안에 선명하게 새겨진 푸른 장미가 눈길을 끌었다.
그것을 본 건 나뿐만이 아닌 듯,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저기 황태자 전하께서 오시는 모양입니다!”
조금이라도 자세히 보려는 듯 귀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목을 길게 빼고 그가 오는 길목을 바라보았다.
귀족이라 해도 황족을 직접 보는 건 드문 일이었다. 특히 지방에 있는 중소 귀족들은 신년회 때 딱 한 번 황실이 주최하는 연회에 참가할 수 있었고, 그것도 황족을 가까이에서 알현하는 건 아주 특별한 때나 가능했다.
하지만 에녹을 비교적 자주 봤던 나 역시, 마음만은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콩닥콩닥 심장 소리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그를 가장 기다린 건 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태자 사절단이 더 가까이 오자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그들은 마차가 아닌 각자의 말을 타고 있었다.
특히 가운데에 있는 에녹은 하얀 말을 타고 있었다. 양옆으로 깃발을 펄럭거리며 위풍당당하게 다가오는 모습은 새삼스럽게 저 사람이 이 제국의 황태자라는 걸 깨닫게 했다. 그야말로.
“백마 탄 왕자님이네.”
나도 모르게 소리 내서 말해 놓고는 당황하여 주변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작은 목소리였기에 아무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나를 흘겨보는 루퍼트만 빼고 말이다.
클로에는 나와 루퍼트의 뒤에 있었기 때문에 표정을 알 수가 없었다.
황태자 일행이 거의 정문까지 당도하자, 우리도 그쪽을 향해 걸어갔다.
루퍼트가 내 손을 잡아 들어올렸다. 에스코트의 의미였지만, 갑작스런 손길에 조금 놀라 바라보니 루퍼트는 뻔뻔하게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클로에의 행방을 찾았다.
그녀는 다소곳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리깐 채 역시나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공작성의 기사 리차드가 영지 바깥 경계선까지 황태자를 수행하며 왔다.
“황태자 전하께서 도착하셨다. 성문을 활짝 열어라!”
리차드가 가장 먼저 와서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뒤 문을 열게 했다.
그 후에 에녹이 천천히 말을 몰아 문 바로 앞까지 와서 멈춰 섰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예쁘게 눈매를 휘었다.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푸른 잔디와 나뭇잎을 그대로 옮겨 담은 것과 같은 색을 띠고 있었다. 새카만 머리카락이 늦여름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제국의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를 마중 나온 귀족들이 앞다투어 인사하는 와중에, 나는 뻣뻣하게 서 있는 루퍼트를 발견했다.
“뭐 해요?”
내가 루퍼트의 옆구리를 툭툭 치자 그는 건성으로 그들을 따라 하더니, 내게 갑자기 귓속말을 했다.
“이따 따로 좀 봐, 할 말이 있으니.”
나는 순간 미간을 찌푸리며 루퍼트를 돌아봤다. 이게 뭐 그리 중요한 이야기라고 귓속말을 하는 거야.
말에서 내려선 에녹이 고삐를 잡은 채 우리를 빤히 보고 있었다. 하필이면 이런 순간에 가까이 붙을 게 뭐야.
나는 루퍼트가 잡고 있던 손을 티 나지 않게 뿌리치며 에녹에게 다가갔다.
“이곳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부디 지내시는 동안 불편함 없으시길.”
내가 살짝 눈을 내리깔고 인사말을 건네자 에녹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백작께서 맞아 주셨는데 불편함이 있겠습니까. 오랜만입니다, 스필렛 백작.”
그와 나의 시선이 마주쳤다. 짧은 눈맞춤에서 그의 감정이 날것 그대로 밀물처럼 밀려왔다. 아니, 어쩌면 이건 내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그동안 나는 그가 보고 싶었던 것 같다.